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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북의 사찰88

봉기리 삼층석탑-165 청도봉기동3층석탑은(보물113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위·아래층 기단 모두 각 면 가장자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안쪽에는 가운데기둥 2개씩을 새겼다. 그 위로 뚜껑처럼 덮어놓은 넓적한 윗돌도 8개의 돌로 구성되어 짜임새가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 몸돌의 높이가 지나치게 높은 반면 2층부터는 급격히 짧아져 보기 좋은 비례라고 볼 수 없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며, 지붕돌 밑면받침은 5단이고 처마끝은 수평으로 되어 있어 경쾌하다. 처마끝에는 작은 구멍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 방울이 달려 있던 옛 모습을 떠올리면 흥미롭다. 전반적인 탑.. 2008. 2. 10.
금오산 해운사-157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으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嵩山)이라 불리기도 했다. 금오란 이름은 아도화상이 이곳을 지나다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 곧 태양 속에 산다는 금오(金烏)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밖에도 이 고장 사람들의 금오산에 거는 기대와 애정을 보여 주는 얘기가 많다. 선산에서 보면 붓끝같이 보이는 금오산의 ‘필봉(筆峰)’ 덕에 선산에는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이 난다고 한다. 칠곡 인동에서 이 산을 보면 귀인이 관을 쓴 것 같아서 ‘귀봉(貴峰)’이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큰 부자와 높은 벼슬아치가 흔한 까닭이 이 때문이라는 게 이곳 사람의 자랑이다. 금릉 개.. 2008. 1. 4.
내연산 보경사-144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법사가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지은 시기를 알 수 없고 다만 숙종 3년(1677)과 1932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대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 바닥은 마루를 깔았으며,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며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태이다. 가운데칸 뒷부분에는 불단을 마련하여 삼존불상을 모셔 놓았다. 건물의 형식이나 세부 기법이 전형적인 19세기 불전 형식을 보여 준다.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법사가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은 지은 시기를 알 수 없고.. 2007. 8. 19.
주왕산 대전사-143 대전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 의상대사가 지었다는 설과 고려 태조 2년(919)에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조선 현종 13년(1672)에 보수해 오늘에 이른다. 대전사 보광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자비의 부처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공포의 모양은 조선 중기 이후 목조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건물(建物)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12년(672)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創建)하였다고 전하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조선(朝鮮) 현종(顯宗) 13년(1672)에 중창.. 2007.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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