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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5

구마라집 역경 여정 - 마지막 구마라집 역경 여정-9(마지막)예전에 구마라집이 구자국(龜玆國)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구마라집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여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사실(파계한 사실)을 아직 몰랐다.어느 날, 구마라집에게 물었다.“그대는 중국 땅에 지중한 인연이 있네. 법을 전수 받은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중국 땅에는 아직 경장과 율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과 여러 논(論)들은 대부분 제가 번역해냈습니다. 3천 명의 학도들이 저에게 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업장(業障)에 깊이 얽매여 있어서 스승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初什在龜茲從.. 2024. 12. 10.
구마라집 역경 여정-8 구마라집 역경 여정-8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어가고, 현묘한 의미를 문자 밖까지 이끌어 내 놓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집에게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꿰뚫었다. 석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펼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불교계의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어,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龍光釋道生慧解入微玄搆文外每恐言舛入關請決廬山釋慧遠學貫群經棟梁遺化而時去聖久遠疑義莫決乃封以諮什語見遠傳과거에 사.. 2024. 12. 6.
구마라집 역경 여정-7 불법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와 진(晋) 시대를 경과하면서 경론(經論)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文字)에 막혀서, 뜻을 도가의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흥(姚興)은 어려서부터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경론을 결집하리라 날카롭게 뜻을 세웠다.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이른 뒤에 요흥(姚興)은 그에게 청하였다.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해 냈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다 암송하고, 경문의 뜻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말에도 빼어나 말소리도 유창하였다.自大法東被始于漢明涉歷魏晉經論漸多而支竺所出多滯.. 2024. 12. 1.
구마라집 역경 여정-4 이미 구마라집의 도는 서역에 퍼지고, 그의 명성은 동쪽 황하에까지 미쳤다. 그 당시 부견(符堅)이 관중(關中)에서 외람되이 천자라고 일컬었다[僭稱]. 외국(外國)의 전부왕(前部王)과 구자왕(龜玆王)의 동생이 모두 와서 부견에게 조회하였다. 부견이 두 왕을 알현하였다. 이 두 왕이 부견에게 진언하였다. “서역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이 산출됩니다. 청컨대 군사를 이끌고 가 평정하여 속국이 되기를 요구하십시오.” 什旣道流西域名被東川時符堅僭號關中有外國前部王及龜茲王弟竝來朝堅堅引見二王說堅云西域多產珍奇請兵往定以求內附 부견의 건원(建元) 13년(378)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태사(太史)가 아뢰었다.“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나타났습니다. 덕이 높은 슬기로운 사람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보좌할 것입니다.” 부견이 .. 2024.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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