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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6

고승전-제3권 불타집 불타집(佛馱什)불타집은 중국말로 각수(覺壽)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 미사색부(彌沙塞部)의 승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밀하게 뛰어났다.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빼어났다.송(宋)나라의 경평(景平) 원년(423) 7월에 양주(楊州)에 이르렀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의 범본(梵本)을 얻었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울의 여러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러한 학문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佛馱什此云覺壽罽賓人少受業於彌沙塞部僧專精律品兼達禪要以宋景平元年七月屆于楊州先沙門法顯於師子國得『彌沙塞律』梵本未被翻譯而法顯遷化京邑諸僧聞什旣善此學於是請令出焉그 해 겨울 11월에 용광사(.. 2025. 1. 25.
고승전 제3권-석담무갈 석담무갈(釋曇無竭)석담무갈은 중국말로는 법용(法勇)이라 한다.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곧 고행(苦行)을 닦았다.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여 은사가 소중히 여겼다.일찍이 법현(法顯) 등이 몸소 부처의 나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슬퍼서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는 서원[忘身之誓]을 세웠다.마침내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의 무리 25명을 불러모았다. 번개(幡蓋)와 공양(供養) 도구를 갖추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釋曇無竭此云法勇姓李幽州黃龍人也幼爲沙彌便修苦行持戒誦經爲師僧所重嘗聞法顯等躬踐佛國乃慨然有忘身之誓遂以宋永初元年招集同志沙門僧猛曇朗之徒二十五人共齎幡蓋供養之具發.. 2025. 1. 19.
고승전/법현전-3 그러고 나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을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두려워하였다.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법현은 그들이 불경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중국의 대중 승려들 사이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바람에 실려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된 곳이 없었다.旣而附商人大舶循海而還舶有二百許人値暴風水入衆皆惶懅卽取雜物棄之顯恐棄其經像唯一心念觀世音及歸命漢土衆僧舶任風而去得無傷壞10여 일 정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였다.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20여 일 만에 밤중에 갑자기 큰.. 2025. 1. 9.
법현의 역경 여정-2 차츰 천축국(天竺國)에 이르렀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그 절을 방문하였다. 법현은 다음 날 새벽에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가려고 하였다. 그 절의 승려가 말렸다.“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집니다. 게다가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법현이 말하였다.“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숨쉬는 것조차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들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승려를 딸려 보냈.. 202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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