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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북의 사찰88

최정산 운흥사-168 운흥사는 신라 흥덕왕(재위 826~836) 때 운수스님이 창건했다. 창건 당시에는 동림사(棟林寺)라고 불렀다고 구전되어 내려온다. 운흥사의 사명에 관련해 전설이 하나 있다. 당시 운흥사는 3개 군에 걸쳐 있고 특히 청도와 대구 사이의 길목에 자리해 있었다. 창건 당시에는 산 정상에 사찰이 자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풍족해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귀찮아하는 주지스님은 “연못을 메우면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진다”는 꿈 속에 나타난 어느 노인의 말을 따라 그대로 연못을 메우니 갑자기 어디선가 하얀 학이 나타나 몇 번 구슬피 울고는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이 때부터 운흥사는 인심을 잃어버려 손님이 뚝 끊어지고 사찰의 살림이 점차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운흥사는 절을 곡산(谷山)으로 옮기고.. 2008. 2. 17.
비슬산 용천사-167 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비슬산 헐티재를 넘어 용천사 가는 길은 누구의 눈길이라도사로잡을 만큼 아름답다. 산 능선을 타고 구비구비 산길을 넘어가면 길가에 천년 고찰 용천사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용천사(湧泉寺)는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 화엄 십찰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인데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절 이름이 나온다.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 2008. 2. 17.
호거산 운문사-166(2) 신라시대에 세운 운문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쳤는데 지금의 절은 조선 숙종 44년(1718)에 있었던 네 번째 보수 때의 것이다. 대웅보전도 이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보물835호)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기둥 사이의 간격을 넓게 잡아서 같은 규모의 건물보다 크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다포계 건물들과는 달리 장식으로 치우치지 않았다. 앞면에는 꽃무늬를 넣은 문을 달았는데, 특히 가운데 칸은 넓어 5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안쪽은 큰 기둥을 하나만 세워 넓고 탁 트인 공간을 꾸미고 있다. 천장의 가운데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천장으.. 2008. 2. 14.
호거산 운문사-166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운문사에 모셔져 있는 높이 0.63m의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이다.(보물 317호)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불상이지만, 호분이 두껍게 칠해져 세부표현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분명하다. 신체 비례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인데, 가는 눈썹·작은 눈·오똑한 코·작은 입 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평판적인 모습이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그 안에 비스듬히 표현된 속옷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배꼽 부분에 놓여져 있는데, 손이 작고 표현이 섬세하지 못해 투박한 모습이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투박.. 2008.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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