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비슬산 헐티재를 넘어 용천사 가는 길은 누구의 눈길이라도사로잡을 만큼 아름답다. 산 능선을 타고 구비구비 산길을 넘어가면 길가에 천년 고찰 용천사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용천사(湧泉寺)는 신라 문무왕 10년(670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해동화엄전교(海東華嚴傳敎)의 10대 사찰 중 한 곳이다.
화엄 십찰은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세운 사찰인데 최치원(崔治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절 이름이 나온다. 『법장화상전』에 의하면 태백산 부석사(浮石寺), 원주 비마라사(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팔공산 미리사(美理寺), 계룡산 갑사(甲寺), 웅주 가야협 보원사(普願寺), 삼각산 청담사(靑潭寺) 10개 사찰을 말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이중 부석사와 비마라사·해인사·옥천사·범어사·화엄사 6개 사찰만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사찰은 의상대사가 전파한 화엄사상을 널리 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불교 전성기에는 승려가 천여 명이나 되었고 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암자들은 백련암, 청련암, 일련암, 남암, 서암, 내원암, 부도암 외 47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오랜 세월 속에 모두 없어져버렸다. 이미 24명의 도인이 나왔고 앞으로 104명의 도인이 나올 것이라는 설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 중 3중창(1631년) 때의 것은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만 남아 있고 다른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것이다.
고려 원종 8년(1267년) 일연 선사가 중창하여 불일사(佛日寺)라 칭하였다가 다시 용천사로 고치고, 임진왜란 후 인조 9년(1631년) 조영대사(租英大師)가 3중창하였으며 순조 5년(1805년) 의열 화주가 크게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물로서는 법당의 삼존불, 후불탱화, 나한십육존불, 영탱, 석조물 등이 있으며 불을 밝히는 데 사용하였던 정료대가 남아있고 절 오른쪽 골짜기에 고승들의 부도(浮屠) 6기가 이 절의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용천사라는 이름은 맑고 풍부한 석간수가 끊임없이 용솟음쳐 흘러내리고 있어 용천(湧泉)이라 부쳐진 것이라고 전한다.
응진전(應眞殿)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로 처음 1631년(인조 9)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최근에 중건하였다. 안에는 금동 석가여래 삼존상을 중심으로 석조 나한상 16위, 제석·범천·감제사자(監帝使者)·직부사자(直符使者)·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상 등이 봉안되어 있다. 이들 상설(像設)은 양식으로 볼 때 모두 17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주련) 花雨動地放神光 꽃비 내리고 땅 흔들리며 신이한 빛 비추이더니 大憑又通徧十方 그 신통력 온 세상에 두루 퍼지네. 出定乘龍誰海橋 선정에서 깨어나 용을 타고 바다를 건너 歸山跨虎入松房 호랑이 걸터타고 산으로 돌아와 송방에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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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용천의 샘물은 가물 때나 장마가 질 때도 늘 일정한 양의 맑은 물이 흐르고 사철 마르지 않으며 한겨울에도 어는 법이 없다고 한다. 1300년 전에도 흐르던 이 샘물은 지금도 여전히 중생들의 감로수가 되어 우리의 마른 목을 축여주고 있다.
최정산에 위치한 용천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의상법사가 처음 짓고 옥천사라 이름하였으나, 후에 용천사로 고쳤다.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는데, 조선 순조 5년(1805) 의열화주가 다시 지은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3,000여 명의 승려가 도를 닦고 47개의 암자가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곳곳에서 그 흔적만을 찾아 볼 수 있다.
용천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못 하나 사용하지 않은 매우 웅장한 건물이며, 기둥이 되는 목재는 아름드리 칡덩굴을 사용하였다. 안에는 보존상태가 좋은 거대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어 옛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앞에 석탑이 서 있는데, 부재가 많이 없어졌고 현재는 상층 기단, 탑신 1개, 옥개석 2개만 남아 있다. 그렇지만 현재 남아 있는 부재의 조각 기법으로 보건대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내에는 또한 석등의 팔각 간주석(竿柱石)이 있다. 하대석과 화사석 및 옥개석 등은 없지만 꽤 고식(古式)이다. 표면에 '…式'이라 새겨져 있지만 다른 글씨는 판독하기 어렵다. 그 밖에 요사 옆에 아직도 물을 담는 데 사용되는 석조(石槽)가 있다. 표면에 '…二十一年 四月 造…'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에 중건하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명부전 옆 고목 아래에도 조선시대의 석조가 있다. 이러한 석물(石物)들은 전부 용천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나타내주는 유물 자료가 된다. (출처 : 전통사찰총서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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