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있고 풍광이 수려하면
그러한 곳엔 길이 끊어지고
발 길 디딤 또한 어려워지면
그곳엔 암자가 있다.
창녕군 영산의 만년교(보물 564호)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라고도 불리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에 다시 쌓아 놓은 것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
물이 세월에 관계없이 흘러 가듯
흔적 남김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저 다리를 건너 다녔다.
만년교 옆의 물레방아
“물이 떨어지는 힘으로 물레바퀴를 돌려 곡식을 찧게 된 방아” 나도향은 물레방아를 소재로 하여 재미있는 단편을 하나 썼다. 물레방아 라고 생각이 들면 작가 나도향의 물레방아를연상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라도물레방아란 단어를 들으면 낭만적이 된다. 물레방아가 있는 집 아리따운 아가씨 혹은 물레방앗간 아저씨라든지 하는 ‘사랑’이란 말을 연상시키는 이말이 옛날이나 요즈음이나 친숙한 단어이다. 물레방아란 말은 다른 단어와 같이 찌들고 병든 우리 조상들이 유희했던 말은 아니다. 과부, 이혼녀, 홀아비, 씨받이등 사랑에 얽힌 여러 가지 부정적인 말들은 많지만 물레방아는물줄기, 또는 물 쏟아짐 등의 의미에서 물이 의미하는 재생과 씻김의 의미로써 청순한 사랑, 애틋한 사랑, 피지 못한 사랑등 말 자체가 순수하고 깔끔한 맛,신선한 맛이 난다. 물레방아는 나무로 만든다. 물레방아의 설치 장소는 한가한 농촌은 아니고 산골짜기에 주로 있었으며 계곡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곳에서 물을 받아 동력을 얻어 방아도 찧고 곡식도 갈아서 식생활에 이용했다.
시도유형문화재69호법화암다층석탑
법화암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다층석탑으로,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유행한 청석탑(靑石塔) 또는 와탑(瓦塔)의 형태를 띠고 있다. 본래 영취산 위 보림사 소속 암자에 있던 것을 현재의 법화암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전한다.
탑은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과 같은 독특한 모습으로, 기단부(基壇部)는 화강암이고 탑신부(塔身部)는 점판암(벼루를 만들 때 사용되는 돌)으로 되어 있다. 연꽃을 새긴 기단은 불단과 비슷한 형태로 보인다.현재 탑신은 몸돌 1개와 지붕돌 7개만 남아있다.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상징하는 선이 그어져 있고, 얇게 만든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 있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을 대신한 다른 종류의 자연석이 놓여 있다.
석재를 많이 잃어버렸지만 원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점판암이라는 특별한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화사는 통도사의 말사로
예전에 법화암으로 보림사의 암자였다.
보림사는 사중에 천여명이 거주 할 정도의 큰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와중에 법화암만 남아서 부처님의 법을 면면히 이어 오고 있다가 현재에 법화사로 도량을복원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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