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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남의 사찰

술정리 동 서 탑 사이에서-91

by 돛을 달고 간 배 2006.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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찿고 보니 쉬운 걸...

하지만 도로변에 출입구를 알리는 표시가

없었다.

서탑은.....


보물 310호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물227호 탑금당치성문기비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인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비로,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년(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이 담겨 있다.

비는 직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커다란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 뒷면에는 스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사찰 조성에 관련된 당시의 승려를 기리기 위해 새겨놓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님은 애띤 얼굴에 자비로운 모습이며, 사람의 몸을 모방한 부드러운 선이 8∼9세기 조각수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양사를 비롯하여 이와 관련이 있는 여러 절의 범종, 탑, 금당 등의 조성연대와 쓰인 식량 등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는 비로,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 인양사 종을 만든 일로부터 이 비석을 세운 신라 헌덕왕 2년(810)까지 40년간 이루어진 일의 내용이 담겨 있다.


비문에 새겨진 글씨의 형태는 당시에 유행했던 해서체의 범주를 벗어나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새로운 서체의 전개를 살필 수 있다.

당시 일반적인 비의 형태를 벗어나고, 지나치게 큰 지붕돌이 원래의 것인지는 의심스럽지만 통일신라 전성기의 불찰조성을 기록한 비석으로서 특수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동삼층석탑



국보34호(동삼층석탑)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기단에는 위·아래층 모두 각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탑신 역시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한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가 간결한 모습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1965년 탑을 해체, 복원할 당시 3층 몸돌에서 뚜껑달린 청동잔형사리용기 등의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바닥돌 주위에 돌림돌을 놓았던 구조도 밝혀졌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창녕술정리 서삼층석탑 (보물520호)


이 탑이 속해 있던 사찰의 이름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이 탑은 아래·위층 기단을 8개의 돌로 구성한 특이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은 바닥돌과 한돌로 붙여서 만든 8개의 돌을 짜 맞추었는데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그 사이로 가운데기둥을 2개씩 새겨 놓았다. 위층 기단도 8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마다 중간에 작은 널돌을 한 장씩 끼웠으며, 모서리기둥을 두지 않고 4면에 2개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현재 남쪽면의 중간에 끼워져 있는 돌에는 거친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후대에 작업한 것으로 짐작된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얇고 평평하며 밑면의 받침은 5단씩이고, 네 귀퉁이가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진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원래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과 함께 있었으나 그 위치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며 같은 절터의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볼 때, 동삼층석탑보다 다소 떨어지며 조성시기도 훨씬 뒤지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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