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정은
부산에서 태어나 경주에서 자랐다. 영남대학교 국어교 육학과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했다. 전북일보와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에 수필 이, 2015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밤의 소 리"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눈 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있다. 에스콰이어몽블랑문 학상 대상, 천강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 스마트소설박 인성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과 2022년에 아르코 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차례
누가 불의 게임을 하는가 _ 7
레이나의 새_ 39
핀셋과 물고기 73 태연한 밤 109
우리들의 두번째롬복_ 141
흙새 171
우리는 손가락을 모르지 203
새들의 목욕 237
🌐🌐🌐문서정 소설집 핀셋과 물고기는
주위에 흔하디 흔한 사연들을 각색해서 연출한 듯 하여 오히려 신선감이 퇴색된 듯 하고 진부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끈기 있게 읽어 나가며 진부함의 재료를 다듬어 맛있는 비빔밥의 향취를 안겨준다.
가족, 연인, 이혼, 죽음, 동료, 싸움, 등의 이야기를 버물러 다시 태어난 언어의 재구성에 소설속으로 빨려든다.
1, 누가 불의 게임을 하는가
세번째로 봤을 때 해수라고 확신했다.~~~ "긴급 공지문 :방 화범을 찾습니다"라는 문구가 굵은 고딕체로 쓰여 있었다.
먼 친척에게 방 하나를 세 놓을 만큼 궁핍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방 하나를 누구에게 그냥
내어주고 챙길 만큼 여유로웠다는 말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받던 공무원 연금의 절반이 매달 엄마의 계좌로 또박 또박 입금~~ 엄마는 문화유산 해설가로 활동하며 용돈 정도는 손수 해결했는데 엄마의 남자(나는 그 남자를 그렇게 명명했다)와 함께 살고 있는 마당에 내가 엄마를 걱정할 일은 없었다
글쎄. 엄마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다른 남자와 사실혼 관계가 된 엄마를, 아버지의 연금을 계속 타기 위해 혼인신고는 일부러 하지 않은 엄마를 담담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소설적 구성이 아닌 현실에서 공무원의 유족연금은 60%로 이지만, 오롯이 연금을 모두 수령하려고 사망 신고까지 늦추는 현실이고 보면, 경제적 바탕이 없는 결합은 항상 문제를 야기 시킨다.
나는 불의 게임이 뭐냐고 묻듯이 해수를 쳐다봤다 '타다 남은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고선 아침에 화재가 났나, 안 났나 확인하는 게임이에요. 불이 났으면 지는 거고, 불이 나지 않았으면 이기는 거예요. 심장이 쫄깃해지고 통쾌한 게임이죠.
💥💥고통의 배출구는 지금의 세상에서 불특정다수를 향하여 언제나 열려 있다. 가장 친밀하고 내편이 되어야 할 엄마나 아빠로부터 내쳐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누구에게 화살을 돌려야 할까?
왜? 왜? 맞고만 있었어? 누구도 네게 폭력을 휘두를 자격이 없어! 그럴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고! 목소리는 심하게 떨려 나왔다. 맞을 땐 아무 생각이 안 나요 그냥, 그냥 좀 덜 아프게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려요. 공처럼요. 어서 빨리 아빠가 감정의 배설물을 다 쏟아내길 기다려요. 아빠는 분이 풀리면 매질을 그만하거든요.
작은 섬에서 '정말 행복해요' 라고 말하던 해수의 얼굴 위로, 깊은 밤 아파트 놀이터에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요. 가족들이 사는 곳에서 가장 멀리요'라고 말하던 해수의 그늘진 얼굴이 겹쳐졌다.
💥💥해수는 폭력의 희생양이 된 자신의 도피처이자 유토피아로 해외의 작은 섬으로 선택을 한다. 눈에 보이지 않게 멀리 멀리.
2,레이나의 새
치골에서 검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한 날은 우리가 보리사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구름이 낮게 내려와 있었고 늦은 오후부터는 비가 내렸다. 결국 그날 우리는 보리사에 가지 못했다.
💥💥레이나는 경력을 속이고 들어와 스타강사가 된 경우이고, 이 선생은 교사에 임용되어 고등학교에 근무하였으나 서휘의 죽음으로 사표를 내고 학원 강사가 된 경우였다.
임용고시에 세 번이나 떨어진 서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휘는 보리사 근처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실종된지 딱 삼 일 만이었다. 서휘가 일한 곳은 대형 화장품 체인점과 24시간 영업을 하는 해장국집이었다. 하루 두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형 화장품 체인점은 뷰티. 헬스 잡화점이라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해장국집은 중년 이상이면 누구나 아는 식당이었다. 낮에는 감정노동을 하고 저녁 이후로는 육체노동을 한 셈이었다. 서휘의 장례식장에서 그녀의 룸메이트로부터 서휘에게 카드빚이 많았다는 것, 집에서 생활비가 오지 않은 지 이 년이 넘었다는 것, 이번 임용고시 준비를 포기하며 무척 불안해하고 우울해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랜 연인 사이이면서도 정작 나는 서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말요. 한 번이라도 거짓말해본 적 있을 것 아니에요" "음 그거야..."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한 사람을 사귀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결혼까지 생각했으면서 진짜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거요. 사랑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던 것 같아요." ~~~ 그런 건 거짓말 축에도 못 들어요. 오직 살기 위해서 거짓 말을 해야 할 때도 있어요. 쓰러지지 않으려고,
💥💥레이나(박은미)는 살기 위해서 가짜 경력 증명서를 제출해 강사가 되었다
실례합니다. 박은미 씨를 찾아왔어요.혹시 집에 있습니까?
노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훑어보다가 거칠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박은미 씨와 같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휴대폰도 안 받고 연락이 안 돼서 찾아왔습니다." "요즘 은미를 찾는 사람이 왜 이리 많지? 경찰도 찾더라고 은미 개가 뭐 나쁜 일 저질렀어요? 개 어릴 때부터 행실이 아주 제멋대로였어."
그때였다. 어느 모퉁이에서 날아왔는지 검은 빛을 띤 새 한 마리가 퍼드덕 세찬 날갯짓을 하며 나를 비껴 지나 허공 높이 날아올랐다. 새는 허공의 길 한 축을 따라 저 너머로 사라졌다.
💥💥레이나나 이선생은 심리적 자유를 갈구한다. 마치 날갯짓을 날아가는 새 처럼 하지만 둘의 길은 어긋나기만 한다. 같이할 수없는 평행선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달려간다. 치골에서 검은 새 한마리를 발견한 날을 빼고는.
3,핀셋과 물고기
"핀셋 훔치는 거 다 봤어요." 이층 계단 벽에 어떤 여자가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다가 내 가 지나가자 툭, 말을 던졌다. 나는 사측에 있는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마치고 계단으로 내려오던 참이었다. 나는 걸음 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그 여자를 째려봤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진료실에 CCTV 있는거 몰라요?"
여자가 따지듯 묻는 바람에 나는 당황해서 처방전을 계단에 떨어뜨릴 뻔했다. 처방전을 손으로 다잡으며 당신이 뭔데 내게 그걸 물어요?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여자를 쳐다보았다.
"요즘 병원에는 진료실과 대기실에도 다 CCTV가 설치되어 있어요. 정말몰랐어요?"
"나는 박소정이에요. 그쪽은요?" 소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내 이름을 물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지? 내게 왜 이러는 거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 머뭇대다 대답을 했다. "유주요, 나유주."
이비인후과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책상 서랍에 핀셋을 넣었다. 귓속에서 곤충 떼가 위이잉 날아오르는 소리가 났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준모의 모습이었다.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은 짐작조차 못했다. 그의 숨소리는 점점더 거칠어졌다. 준모는 눈을 희번덕이더니 갑자기 내 뺨을 때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나를 계단 벽으로 몰아세운 뒤 주먹으로 벽을 세게 쳤다.
그 선배가 그런 혀 짧은 소리로 강의 노트를 빌리러 다니고., 과제 점수도 잘 받아 조교 자리를 꿰어찼느냐며 내 의자를 발로 차더라고. 나는 테이블 아래로 나뒹굴었지. 선배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넘어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넌. 매번 그런 식이야. 공정하지 않아, 하며 다시 얼굴을 때렸어
술이 취했다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어.
"물고기들은 중요한 일이 없어서 좋아. 그냥 바라만 봐도 좋아." 소정이 소중한 사랑을 내게 소개하는 직접 가득한 얼굴로 수족관의 물고기들에 대해 말했다. 나는 증오라는 단어가 낯설었지만 짐짓 모른 척 되물었다. "너, 증오하는 사람 많아?" "증오하는 사람들 얼굴 생각날 때면 물고기들 유영하는 모 습을 들여다봐 얼마나 부드럽고 아름다운지 몰라 봐, 봐 저 애들을 보라고.
💥💥소정과 유주는 폭력이라는 동병상련을 겪는다. 같은 아픔을 겪는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 할 수가 있다.
비슷한 나이, 이비인후과를 같이 다니는 소정은 학교 선배로부터 극심한 폭행을 당했고, 유주는 데이트폭력을 휘두르는 전 남친의 환청을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다. 어느날부터 유주는 핀셋을 훔치고 싶은 충동이 버릇이 된다. 그녀에게 핀셋은 자기 방어의 기제이며 은연중에 치유의 방법으로 변모되기도 한다.
한 편 소정은 수족관의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4,태연한 밤
"저기요....잠깐만요."~~~도와 줄래요?"
~~"삼 년 전부터였어요."~~"남편이 내게 폭력을 쓰기 시작한 거요"
도현은 찬희가 돌을 문호에게 던질까 봐 오금이 저렸다. 다행히 찬희는 문호 앞까지 걸어와서 돌을 문 호 뒤편으로 던졌다. 그러곤 문호를 한동안 집어삼킬 듯이 노려보았다. 새끼, 그만하자고 했잖아! 머리에 맞을 뻔했다고!
인마, 죽고 싶어? 분노에 찬 찬희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날카로웠다 곧이어 주먹으로 문호의 가슴팍을 쳤다. 그러자 새파랑게 질려 있던 문호가 종이보다 가볍게 뒤로 넘어졌다. 하필이면 그 돌 위로,
도현은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삼십 년 전 그날, 싸움을 말리지 않고 방관만 했던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인지도 몰랐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고 있는데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제법 오래도록 초인종 소리가 났다. 나중에는 손바닥으로 현관문을 탕,탕,탕 두드리는 소리도 났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도 들렸다. 도현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러곤 잠이 깨서 오래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잠결에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어 경찰차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잠시만...아주 잠시만...좀 도와줄래요?
💥💥학창시절에 문호와 찬희의 싸움에 개입하지 못한 졸장부였듯이, 이웃의 도움 요청을 끝까지 살피지 못했다.
5,우리들의 두번째 롬복
결혼 십오 주년 기념으로 신혼여행지였던 롬복으로 다시 여행을 갔습니다. 아이들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당분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배에서 발을 헛디더 넘어질 때 본능적으로 아내의 팔을 잡았습니다. 바다로 떨어질 줄은 몰랐으니까요. 떨어질 줄 알았다면 둘 다 위험하게 아내의 손을 잡진 않았을 겁니다. 떨어지고 나선 아내의 손을 잡고 버텼죠. 너무 고통스러워 손을 놓고 싶었어요. 죽는 게 낫다 싶었어요. 그러나 내가 손을 놓으면, 외판 위에 엎드려 내 손을 잡고 있던 아내가 떨어질 테니 손을 놓을 수도 없었어요. 그냥 붙잡고 죽을 힘을 다해 버텼어요. 나중에는 누가 먼저 손을 놓았는지 모르겠어요 "
다음 날, 현오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현오의 실 직원들 중 유일하게 양성으로 나왔다. 나와 아이들도 진료소에서 검사를 받았지만 모두 음성 판정을 받았다. 나는 이내 현오와 현오의 거래처 여직원인 이십대 확진자 여성의 동선이 같다는 것을 알아챘다. 같은 시간에 같은 모텔에 투숙 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확진자의 동선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안전안내문자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현오는 그날 밤 친구와 만나 흑맥주를 마신 게 아니었다. 이십대의 거래처 여직원을 만나러 간 거였다. 나는 시청 홈페이지와 시청 공식 블로그에 접속해서 208번인 현오와 204번인 그 여직원의 감염경로 노선을 수십 번 확인했다.
현오의 손을 이런 식으로 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현오가 내 손을 힘껏 아래로 잡아당겼다. 내 몸이 바다로 내던져졌다. 내 몸이 떨어지고 있었다. 구명조끼 덕분인지 몸의 절반만 가라앉았다. 그때 사나운 물살이 나를 감싸더니 어딘가로 획 던졌다. 내 몸이 물에 휩쓸려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현오를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기를 내심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던 현오는, 나를 붙들고 싶다던 현오는 오히려 내 손을 놓아버렸다. 삶이란 고도의 기술로.
💥💥롬복의 여행으로 나는 그와의 결별을, 그는 나와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현실의 속에서 나타난 모습들은 나는 현오씨를 놓치기 싫고, 그는 나를 보내고 싶어 한다.
6,흙새
나는 여기 앉아 있다 A타운하우스 104동 앞뜰 의자 위에 멀리 경주 남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물결치듯 부드럽게 흐르 는 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부서진 차창엔 봄 햇살이 조각조각 잘게 나뉘어 어른 거리고 있다. 곧이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있다. 어느새 경찰차도 와 있었다. 소방대원이 먼저 아들을 안아서 구급차에 실었다. 어, 애는 괜찮네. 외상도 없어 그래도 조심해. 라는 소리들이 응 응 응 떠다녔다. 여자는 빨리 병원으로 후송해, 라는 말이 뒤이어 들렸다.
나는 C의 거실 소파에 않아 창에 스며든 햇빛이 소파 가장 자리를 지나 발치에 닿으려는 것을 바라보며 C에게 물었다 C는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우리 둘 사이를 말이야 그건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나눈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였다 글쎄, 우리가 꼭 무슨 사이가 돼야만 만날 수 있어요?" C가 어두운 낮빛으로 말했다. 이내 애써 담담한 듯이 무슨 커피 마실래요? 하고 물으며 싱크대로 걸어갔다. 그는 에티오피아와 과테말라 안티구아를 반반씩 섞은 커피를 갈아 드 리퍼에 담고는 끓인 물을 드립포트에 담아 원을 그리듯 커피 위로 조금씩 부었다.
지우는 지난주부터 병원에서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 차 안에서 자신이 아이스크림을 엄마에게 건네지 않았다면, 그래 엄마의 시야를 가리지 않았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데다 나의 죽음을 목격한 후 외상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우는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밤에는 소리를 지르며 깰 때가 많았다.
거실에는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애기를 나누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파스타에 치킨, 과일, 캔 맥주가 널려 있다. 그는 주방과 거실을 분주하게 오가며 지인들을 향해 크게 웃는다.
그의 표정 어디에도 슬픔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바로 옆에 앉은, 긴 머리에 베이지색 점퍼스커트를 입은 여자의 어깨에 자주 손을 올리거나 여자의 앞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콩, 콩 누르기도 한다. 내가 없으면 자신도 내 곁에 묻히고 싶다던 C가 맞나 싶어 창 너머로 그의 얼굴을 보고 또 쳐다봤다. 언제였던가.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응. 괜찮아. 잘 해결될 거야. 부도는 막을 수 있겠어. 고마워. 걱정하지 말고. 잘 자, 하는 말을 끝으로 남편은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내게는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다정한 목소리였다. 왜 나는 몰랐을까. 남편이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쩌다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었을까. 내가 살아 있었을 때에도 우리는 서로 이승과 저승의 거리만큼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생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내 삶에서 남편과 세 아이들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지만 그들의 삶에서는 나를 빼도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모든 것을 잃고도 그들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내 영혼이 가여워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이미 그들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헤매고 다닌 거였다.
💥💥사고를 당한 나는 육신에서 분리된 영혼이 되어 가족과 애인을 관찰한다. 사랑한다던 C는 이미 딴 여자가 있었고, 무뚝뚝한 남편은 다정하게 구는 여자를 벌써 만들었다.
7,우리는 손가락을 모르지
"뭐 그렇게 어물대니? 오른손 엄지에 딱딱한 뾰루지 같은 게 생겨서 자꾸 커지고 있지 않아?" 옆에서 듣고만 있던 경주 언니가 답답하다는 듯이 다시 물 었을 때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숨기고 있던 비밀을 들켜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간지럽고 시리면서 통증이 있어. 가려울 때마다 굵었더니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지면서 점점 커지고 있어. 처음엔 나도 이게 뭔지 몰랐다. 시우가 엄마 오른손가락 옆에 그게 뭐야,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씨앗이야.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그것은 오른손 엄지에 까만 씨앗 하나 박힌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티눈이 생겼다고 여겼다.
당뇨합병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결국 재작년에 치매 판정까지 받고서는 요양원으로 들어왔다. 엄마. 내가 조용히 엄마를 불렀다. 엄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엄마의 입술이 조금 당겨 올라가는 게 살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경민이냐? 예. 엄마는 아직까지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왜 우산도 안 쓰고 왔어? 옷이 다 젖었잖아, 했다. 순간, 가슴 한 군데가 베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을 쏟지 않으려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비 오지 않아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추운데 왜 나와 계세요?
손가락 때문에 난리를 치고 있지?" '말 그렇게 하지 마. 이게 왜 여섯번째 손가락이야? 그냥 피부 부스럼일 뿐이라고. 이건 유전되는 게 아니라고. 분명 그날 산소에서 뭔가 옮은 것 같아. 옷이 오르는 것처럼 말이야 경혜 언니가 답을 했다. 그렇게 부정하면서 왜 우리 손가락을 직접 봐야겠다고 한 거야? 그런다고 이 손가락처럼 생긴 뾰루지가 없어질 것 같아? 나는 요즘에서야 엄마의 인생이 이해돼. 이혼하고 보니 온전히 엄마를 이해하겠더라고. 엄마는 우리 다섯 형제를 혼자 어떻게 먹여 살렸는지 몰라. 그리고..... 엄마가 요양원에서 잠꼬대할 때마다 화냥년, 죽일 년,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는 일도 다 이해가 되더라.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빼앗겨본 사람이면 다 공감 가는 얘기지.
은오는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고 바로 문자로 보내주었다. 경주 언니가 와, 사진 잘 나왔네. 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에 엄마와 형도 있었더라면 완벽한 가족사진이 됐을 텐 데--.. 은오는 사진을 들여다보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때 경혜 언니가 작은 탁자 위에 통장을 조용히 올려놓았다 부의금 남은 것과 엄마 전세금이야. 이거 다 네 거야. 그 동안 엄마 모시고 살았잖아. 그날, 이 돈 내가 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어. 은오는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경주 언니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언니, 한마디 상의도 없이 뭐야? 다섯 명 똑같이 나누기로 한 거 아니었어? 우리, 말은 좀 똑바로 하자. 은오가 엄마 집에 얹혀 산 거지, 뭘 모시고 살았다는 거야?"
나는 엄마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엄마가 아버지를 원망하던 말들도 다 거짓말이었던 것 같아. 은오를 데려다 키우고, 요양원에서 늘 아버지를 기다린 걸 보면.. 나는 휴대전화를 열어 조금 전 은오가 보내준 사진을 바라 보았다. 사진 속에서는 우리 넷 다 활짝 웃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엄마가 경주 언니의 이혼 사실을 몰랐듯이, 내가 경혜 언니의 절절한 연애 이야기를 몰랐듯이, 경주 언니와 내가 은오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했듯이. 우리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다.
💥💥살다보면 시간이 만만치 않다. 가족인들 무슨 절절한 얘기를 하여 마음을 터 놓았겠나. 몇 되지도 않는 가족들도 일치된 의견의 통일이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8,새들의 목욕
새는 목욕 그릇에 담긴 젖은 배춧잎에 몸을 비쳤다. 나는 새의 등에 물을 조금씩 끼얹었다. 새는 포르르 날아올랐다가 욕실 바닥에 내려앉았다. 목욕을 마친 새는 몸을 흔들어 스스로 물기를 털어냈다. 나는 새를 새장 안에 넣고 새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난방 온도를 조금 높였다. 이제부터 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야겠지만 무섭고 외로웠다. 스물다섯 살이 될 때까지, 내 삶은 새들의 노래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을 만큼 팍팍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새장을 청소하고 새 목욕시키는 따위의 일을 해야 하다니. 그 사실이 나를 작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는 새만큼 줄어들고 있는 중인 줄도 몰랐다. 차라리 그 구인란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떴을까,
아르바이트생 구함. 새 목욕시키실 분. 성실한 분. 매주 월요일 오후 2시~4시.
급여 협의 후 결정
나는 인터넷 생활정보신문 구인란에서 이 짧은 광고를 보자마자 전화를 했다. 젊은 목소리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일하는 중이니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돈을 많이 주지는 못합니다. 최저 시급에 왕복 교통비만 지급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괜찮다고 답을 했다
네번째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커피와 함께 접시에 파이 한 조각이 올려져 있었다.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십 개월분 보수를 한꺼번에 입금합니다. 매주 입금하려니 좀 성가시네요. 애들과 잘 놀아줘서 고맙기도 하고요 나는 쾌재를 불렀다. 좁은 집 안을 빙그르르 돌았다. 두 달 치 월세는 이제 해결됐다. 작은 방문을 여니 믿음이가 다답 태, 다답태, 하는 소리를 냈다. 녀석이 답답해, 하고 말을 하거나 말거나 절뚝거리며 춤을 추듯 돌았다. 양 입술 끝이 저절로 당겨지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사람 집세와 관리비를 몇 달째 안 냈어요. 그 사람 소식은...... 남의 개인 정보라 . 알리고 싶지 않네요. 끔찍한 짐작들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앵무새를 힐끗 쳐다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나는 하루 아침에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은 것 처럼 몸에 힘이 빠졌다.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봐요, 새는 어쩌라고요! 즉시 답이 없으면 앵무새 귀에 샤워기를 틀 거야! 씨발, 대체 나보고 어쩌란 거야!
💥💥새들의 돌보기로 한 소유주와 새의 관리를 맡은 구직자도 결국 돈이란 폭력에 의해 연대의 띠가 풀려버린다. 집을 비우라니? 새들은 어디로 가고 나는 또 무엇을 해야 하나?
🌐🌐🌐나가면서
나는 주위의 사람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내밀한 번민을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바로 옆에서 호흡을 같이 한다고 전부를 안다고 착각을 하지는 않을까? 속 깊은 감정을 공유하고 가벼운 허물마저 사랑하며 큰 고통조차 안아갈 수 있을 때, 서로는 사랑이라는 큰 우리에서 서 있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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