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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촘촘하게 엮은 그물같은 삶 황여정 장편소설 숨과 입자

by 돛을 달고 간 배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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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여정 작가는
2017년 알제리의 유령들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 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내 이름을 불러 줘"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등이 있다.



♨️♨️ 들머리
정확히 두시 삼십분이었다. 매일 오후 두시 삼십분이 되면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항상 그 노래를 틀었다. 노래는 반복 재생되었다. 모르는 노래였다. 대충 개화기 때의 유행가가 아니었을 싶긴 했다. 선율이나 반주의 뉘앙스도 그렇고 여가수의 창법이나 음질 상태도 어쩐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접했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연상케했다. 거리 때문인지 볼륨 때문인지 가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딱 한 단어가 귀에 잡히긴 했다. 푸르구나.


⛱️⛱️⛱️ 항상 두시 삼십분이 되어 들려오던 음악이 들리지 않아 궁금하던차에 한 여인이 가져 온 책에 의해서 삶의 그물이 이래 저래 엮이어 진다.


1. 돌아서 제자리

그 순간 그 사람은 사람 같지가 않았어. 뭐랄까, 입자 라고 해야 할까. 더는 쪼개지지 않는 궁극의 단위 같은 거.
그 모습은 어쩐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는 듯했지. 그런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더라.
반으로 접힌 메모지를 펼치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오선지였고 글씨는 내 것이었다. 메모지는 "믿음의 형식"이란 책에 끼워저 있었다.
길병소님께 이 책의 시들을 번역해보세요. 놀라운 일이 당신을 기 다리고 있을 거예요. 도이영 드림.
당신은 왜 나에게 그 책을 주있니. 춤 당신을 만나고 싶다.

여자는 `'당신'이 길병소의 마음이 옮겨 간 대상이라고 확신했고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가 남긴 네권의 일기장을 꼼꼼히 정독했다.



2. 요가원의 아드리아나와 도이수
⛱️⛱️⛱️ 도이수(도이영의 언니)가  광고회사의 일을 그만 두고서 나의 존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한다. 존재 탐구에 다가가는 여정인데 그 첫발은 포르투갈에서 아드리아나 요가원장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때 나는 서른이었다. 포르투같에 간 것은 그해였다
이름은 운명이야. 아드리아나는 말했다. 무슨 운명까지. 우연과 인연의 중간쯤 되는 어떤 것이 라면 모를까.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이름이 생을 입고 그녀를 이끈 운명적 행보가 어땠는지. 그녀는 그대로 침묵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아드리아해를 보았니?"

⛱️⛱️⛱️ 아드리아나는 아드리아해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딱히 아무 관계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드리아해는 아드리아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동해를 어디에서 어디까지라고 특정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그녀와 대화를 나눈 시간은 총 일곱시간이었다. 고작 그랬다. 고작 그랬을 뿐인데, 그뒤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일곱시간의 대화만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일곱시간을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었다. 술집에서 두시간, 그녀가 운영한다는 요가원으로 걸어가면서 삼십분, 그녀의 요가원에서 요가를 한 뒤 세시간, 그녀의 요가원에서 잔 뒤 아침에 일어나 삼십분, 요가를 한 뒤 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

⛱️⛱️⛱️ 요가의 가르침은 육체적인 강건함을 이루게 하는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본래의 지침은 마음의 동요를 멈추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요가경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잠깐 언급한다.

💥💥요가수트라 제1절
अथयोगानुशासनम्아타요가~누샤싸남
아타अथ 요가~누샤싸남योगानुशासनम्(요가 아누샤싸남)
♤아타~지금. ♤아누샤싸남~가르침, 설명, 전수

💚 지금부터 요가योगा의 가르침을 시작하겠다.
그런데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궁금증 ?
☆요가는 무엇일까? 잡히는 존재일까? 그냥 흘러가는 존재일까? 어째든 요가 가르침이 지금 시작된 거다. 선가에 이르기를 `현전직하`라 이르니 바로 지금 숨쉬고 내뱉는 이 순간에 이미 요가의 가르침은 끝났다. 왜냐 요가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끝없이 갈고 닦고 버리는 연습이다. 갈고 닦는 것도 버리기 위함이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는 탐ㆍ진ㆍ치를 갈고 닦아 버리니 戒ㆍ 定ㆍ慧로 거듭난다고 한다.
요가의 가르침도 매 한가지 일 터, 웅크린 동굴 속의 어둠의 제왕을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인 만큼 지금 요가의 가르침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이다.

제2절
चित्तवृतिनिरोव/찓따위르띠니로와
💚요가는 마음의 동요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찓따चित्त~개별적 의식, 무의식/찓뜨चित्~초월적 의식
♤위르띠वृति~동요하는, 소용돌이치는
♤니로와निरोव~멈춤, 중단, 그침
☆마음의 동요: 따마스(지루하거나 무기력한), 라자스(동요되거나 흔들림), 사뜨와(고요한)
☆마음의 동요.~감각과 의식 작용의 상호 관계에서 내ㆍ외부에서 개입된 요소들에 의해 인식 작용이 갈등요소(번뇌화)로 변하는 것.
☆ 예를 들어 보자.
👉 음식을 먹는다.(원초적 전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반복적 전제)
👉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다. (중의적 전제)

1. 원초적 전제는 건물의 기초라고 한다면, 반복적 전제는 대들보가 되고. 중의적 전제는 섯가래가 된다. 맛있는 음식은 처음부터 알 수 있는게 아니 듯,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반복되는 감각의 인식이 필요하다. 업식으로 저장되어 간다고나 할까? 그러면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먹는다. 좋은 음식일까? 싫은 음식일까? 맛이 있을까? 맛이 없을까? 또한 선택의 기준은 아내일까? 음식일까? 이는 감각처와 받아들이는 곳이 상호 작용하여 어떻게 나타날런지는 알 수가 없다.
2.쌓이고 쌓이고, 반응하고 또 반응하고. 그렇게 존재하는게 지금의 내가 가진 아뜨만인데, 아뜨만이 경계에 반응하면서 작용하고 동요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텐데 작용을 제어하고. 마음의 동요를 멈추게 함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고 수행의 한 과정으로 여겨야 되는게 아닐지.
3.찓따는 마음을 총체이고, 기본적인 마음은 아함까라 혹은 자아,라고도 하며 그것을 "나"라고도 부릅니다. 분별이나, 판단을 하며 지성이라고도 일컫기도 합니다. 또한 외부적인 것에 감각적으로 끌리는 마음의 단계를 마나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 외부로 부터의 끌림에 자재로운 이는 이미 요가의 수행을 마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동요를 뛰어 넘어 자재한 해탈의 길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5. 상호 작용의 정화와 조율이야말로 요가의 참 공부라 할 만 합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은 사람 같지가 않았어 뭐랄까, 입자 라고 해야 할까. 더는 쪼개지지 않는 궁극의 단위 같은 거. 그 모습은 어쩐지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해주는 듯 했지. 그런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더라.  

아드리아나의 요가원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액자의 한  문장이었다. 고대의 철학자가 깃털 펜으로 쓴 것으로 서체가 고전적이고 유려하여 한참을 들어 보았다. 영어였더라도 굴림과 기울임이 심한 흘림치를 읽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더욱이 그것은 포르투갈어였으니 당연히 읽을 수 없었고 의미도 알 수 없었다.
시집은 rAlba Plena: Vida de Nossa Senhorag라는 책이 었다. '알바 플레나'는 동백나무의 일종이며 부제는 '성 모님의 삶'이라는 뜻이었다. 저자는 아우구스투 질. 당연히 포르투갈의 시인이었고 주로 자연과 빈곤을 주제로 시를 썼다. 아드리아나의 어머니가 필사했다는 문장을 번역 하다 지쳐 머리도 식힐 겸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본 것이 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아드리아나가 안내한 자세들은 '수리야 나마스카라 였다. '수리야(surya)'는 '태양 또는 지고한 빛'을, '나마 스카라(namaskara)'는 '경배하다'를 뜻하는 산스크리트 어로, 말하자면 태양을 향해 경건한 인사를 드린다는 의미의 요가다.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는 기 초 수련 자세로 열두개의 기본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 수리야 나마스카라(태양 예배 자세)

출처 시바난다 요가센터, 박지명 옮김, 하남출판사

요가의 기본은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키는 거야. 따라서 호흡과 어긋난 동작을 하는 건 요가가 아니야. 그러려면 일단 본인의 호흡에 집중해야 해. 언제 가빠지고 언제 느슨해지는지. 숨이 어디로 들어와 어디에 머물다 어디로 나가는지

시간은 계속 흘렀는데 점차 멈추었고 그뒤로는 몸이 한없이 아래로 꺼져드는 것 같았다. 딱히 낙하의 감각은 아니었고 무중력 공간에서 불현듯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닥은 그런 몸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는 보호막 처럼 여겨졌다 아득한 침묵이 이어졌다. 편안하지만 나른하지 않았고 막연하지만 명료했다. 지금 이곳에 내가 있다는 감각이 또렸하면서도 의식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 너머를 유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수리가 놀랍도록 시원해졌다. 맑고 상쾌한 물이 정수리에 쏟아지는, 혹은 정 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환희가 차올라 나모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요가인으로서 이전까지의 여정을 갈무리하던 중 소마요가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소마요가는 움직임의 재학습 과정으로 통칭되는 소마틱스(Somatics) 기법들 중 하나인 펠든크라이스 (Feldenkrais)를 요가에 적용한 분야였다. 말하자면 특정 움직임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계에 각인된 자신의 습관적 동작 패턴을 자각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몸의 움직임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선하는 요가라고 할 수 있었다. 소마(soma)는 고대 그리스어로 '총체적인 생명체'를 뜻했고 이는 움직임의 변화를 통해 생각, 정서, 감각이 유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표명하는 이름이었다.



3.건축학 평론의 루카와 도이영

이영이 여행에서 돌아온 뒤 알게 된 일이지만, 이영이 그곳에 가게 된 것은 모 건축 전문 잡지사와 모 출판사 가 공동 주최한 독후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 었다. 말하자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 5박 6일 여행 경비가 부상이었던 셈이다. 루카 에글리라는 스 위스의 건축비평가가 쓴 여행서 당신의 무덤: 한 건축비 평가의 세계묘지 인상기가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진행 된 홍보 이벤트였다. 거의 800면에 달하는 분량의 책이었고 응모자는 50여명이었다고 했다.
그대로 복원한건 아니고 모양만 얼추 비슷하게. 진짜로 복원하려면 시간도 돈도 훨씬 많이 들여야 했을 거야 몇백년 된 거리와 건물들이 잘 보존된 유럽의 구시가와는 달라. 한옥마을은 신 시가야. 그리고 감천마을도 육십여년 전 한국전쟁 피난민의 거주지에서 시작해 내내 저소득층이 살던 낙후 지역이었는데 재개발사업으로 그런 색깔을 갖게 되었어. 너희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도시의 빛깔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아드리아나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이더니 픽 웃었다. 재밌네. 뭐가?" 여기도 마찬가지거든!

⛱️⛱️⛱️ 우리가 보는 문화라는 것도 과거의 시간에서 단절 된 순간으로 존재할 순 없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숭례문이 그러하고 불국사도 그러하다. 다들 복원의 흔적을 간직한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이다.

루카의 책에서 읽은 그 문장이 어떤 질감을 지닌 말이 있는지 이영은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중학교 동창이었던 한 친구가 떠올랐다는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 다. 그 친구는 고등학생 때 죽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일로 자신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이야기도.

⛱️⛱️⛱️ 이영의 동창인 승아는 실업계 고교 다날 때 산업현장에 실습 갔다가 사고로 죽는다. 지붕이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루카와 이영의 연을 이어준 문구는 이것이었다.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 의 온갖 마음들이 느껴진다. 형도 색도 없는 마음들에 형과 색을 입혀 외화한 것이 건축물이기 때문일까. 그 렇다면 어떤 건축물에 대해 훌륭하다든가 형편없다는  평가를 내리는 건 부당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건축물은 확실히 훌륭하고 어떤 건축물은 확실히 형편없다. 왜 그럴까. 애초에 훌륭한 마음이 있고 형편없는 마음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마음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마음이 투영된 형색이 본래 마음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도, 그 어떤 마음도 제대로 반영하지 않기도 해서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건축물을 본다. 그것에 투영된 사람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지 계속해서 생각한다.

⛱️⛱️⛱️ 인간을 지탱하고 있는 뼈대와 혈관, 건축물의 석조와 건축자재. 하나 하나가 더하고 더해져서 온전한  인간과 건축물이 되듯이, 그럼에도 각각의 재료는 특유의 개성을 유지한다.

이영은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들을 다시금 하나씩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에게 속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라 말할 수 있는지, 나라는 것이 그렇게 명확히 구분지어 설명될 수 있 는 건지. 그럼에도 나는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으며, 따라서 오직 나만이 나라는 감각은 사라지지 않아.
파편화되고 고립된 존재로. 그 모든 것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성 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로지 자신의 선택의 결과라는 무거 운 책임을 젊어진 채. 이상한 일이지. 원래 '나'라는 의식은 자유를 원해서 탄생한 것인데.

한국과 오스트레일리 아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기획된 창령사터 오백나한전, 이라는 전시회였다 오백나한은 한국 영월의 창령사라는 옛 절터에서 발굴된 석상들을 말했고 '나한'은 산스크리트어 '아르하 (arhat)'의 음역인 '아라한'의 줄임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뜻했다. 전시회장에는 오십점의 나한상과 한점의 부처상이 천여개의 스피커를 탑처럼 쌓아 만든 설치미술 작품과 함께 배치되어 있었다 성자라고 하기에 나한들의 표정은 지극히 세속적으로 보였다. 속세의 번뇌를 초월한 자에게서 흘러나올 법한 거룩함이나 고결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기쁘고 슬프고 수줍고 우울하고 익살스럽고 퉁명스럽고 천진하고 노여운 보통 사람의 얼굴들만 가득했다. 하지만 루카는 그 놀라운 생동감에 마음을 홀딱 뺏겼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눈은 툭 불거진 그 모습이 늙은이의 진면목일세, 위로는 하늘, 아래로는 땅을 버티고선 그것을 부처도 조사도 원래는 찾아내지 못했다. 우습도다. 그것이 무엇일까. 남북동서에 오직 나뿐이로다.

⛱️⛱️⛱️ 어떤 형상을 특정 할수록 고정 관념의 틀 속에 갇히게 된다. 건축이란 구조물도 정형화 된다면
완성품의 품격이 떨어지듯이.

4. 다큐멘터리  길병소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당신이라고 해서 세상의 질서를 당신만이 관장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세상의 질서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당신께서 나에게 주신 귀한 생명을 단지 자신을 그런 존재로만 여기는 것으로 소모한다는 건 도리어 큰 죄가 아닙니까? 당신의 피조물로서 나는 당신과 같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질서에 면면이 관여하겠습니다.
"나는 길병소다 둘 다 자신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자신의 목소리가 아 닌것 같기도 했다. 내가 미친 것인가, 길병소는 생각했다 그 순간 기도를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기도해야 할지, 누구를 향해 기도 해야 할지,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기도는 하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거라고, 저는 생각 해요. 이년 전 읍 기도원에서 이영이 한 말이었다.
제목은 "기도" 였고 줄거리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는 감독이 한 여자를 취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길병소와 이영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 은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길병소는 이영만을 촬영 했고 길병소만 나오는 장면은 프레임이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직접 촬영한 것 같았다.

⛱️⛱️⛱️기도는 이영과 그녀의 중학교 친구 승아의 이야기가 모티브로 차용되었다. 기도를 하는 듯 하여 승아에게 물었더니 기도가 아니란다. 그게 기도가 아니라면 뭐냐고 물었더니 그럼 기도인것 같다고 말했다. 믿음의 형식은 누가 결정하는가? 목사도, 신부도, 스님도 아니다. 자신이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가의 수련자나, 건축의 외형을 중시하는 건축가나 전체를 아울를 수 있는 개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기도했다면서. 그게 기도였던 것 같았다고 했지. 아. 이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친구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튼 기도의 내용이 뭐였는데? 기도의 내용? 기도의 내용이라∙.... 그런 건 없었는데. 이번엔 이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기도라고 할 수 없는 거 아냐?"

⛱️⛱️⛱️ 다큐멘터리는 길병소가 단편 영화의 편린이 축적 된 것이다. 영화 감독이라는 원을 세웠지만, 주위의 사정은 온전치 못했고, 그는 이런 사실을 수긍하면서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 이영이란 여성을 등장시켜 자신의 이야기인 듯 하면서 이영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속에 담았던 것이다.



5.나와 이영

피곤한 표정과 허전한 말투는 나 아니고 언니 너였어 뭐래. 언니가 사과했을 때 딱 그랬다고. 그래서 내가 화를 못 낸 거야. 내가 기억을 더듬는 사이 이영은 또 말했다 '그 시절 언니는 주구장창 그랬어. 피곤해하고 허전해 하고. 거의 웃질 않았어. 어쩌다 한번 웃을 때는 냉소였고. 저러다 언제 한번 터지겠다 싶었는데 하필 나한테 터뜨리 길래 나도 꽤나 억울했다고. 생각해보니 이영의 말이 맞았다.

⛱️⛱️⛱️나와 나 아님에 대한 혼란, 직장에서의 번민이 쌓인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포르투갈로 간다.

"응 뭐라도 줘야 했어서. 아니, 주고 싶었어. 나도 받았 으니까." "그럼 그런 의미심장한 글은 왜 쓴 거야? "무슨 글"? 나는 시집의 표지 뒤 첫 장을 펼쳐 보여주었다.
질병소님께
<이 시들을 번역해보세요. 놀라운 일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도이영 드림.
"그 사람이 써달라고 해서 써준 거야." "이렇게 써달라고 했다고"?





6.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할머니

그 노래가 들렀다. 한때 매일 오후 투시 삼십분에 요가 원 근처 어디선가 들려왔던 노래 이영은 그 노래를 잘 알고 있었다. 노래의 제목은 다방의 푸른 꿈. 이난영이라는 가수가 1939년에 발표한 곡이 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고 있었던 유일한 가사 푸르구나'의 진짜 가사는 부르누나'였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 이영의 할머니가 잘 부르던 노래가 "다방의 푸른 꿈" 노래였고, 아버지는 휴식시간(2시 30분) 맞춰서 그래를 틀었다.

나는 아드리아나의 요가원에 있던 액자 속 글귀에 대 해물었다. 어떤 소설에 나오는 대사였고 너의 할머니가 그 소설을 좋아해 옮겨 쓴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 알리나는 할머니가 그 글귀를 옮겨 적을 때 옆에 있었
다고 했다. 할머니는 펜대에 화려한 녕쿨 문양이 새겨져 있는 수제 딥펜으로 만족스러운 필체가 완성될 때까지 수 십번이고 다시 썼다고 한다. 그 펜을 만들어준 친구에게 선물로 줄 거라면서.
그건 정말이지 나에게 엄청난 사건이었단다. 16만년 이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시간을 건너 끝내 그 빛이 나에게 와닿았다는 것 말이다. 내 앞에서 그 별은 아직 폭발 중이었지. 멀고 먼 그 옛날에 이미 끝나버린 사건이 그 순간 나한테는 현재였던 거야. 말하자면 나를 통해 현재가 된 거지. 내가 그 순간 그것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이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그러니까 알리나, 영원히 과거이기만 한 채로 사라지는 건 없단다. 너에게 닿은 것들은 모두 현재의 일이야. 그 모든 것을 현재로 만드는 건 너란다. 그걸 잊지 마.


7. 촘촘한 그물망

이따금 우연히 별을 보게 되면 알리나의 할머니가 했 다는 그 말이 떠오르곤 했다. 그런 때마다 어쩌면 모든 것들이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었다. 과거의 시간도, 미래의 시간도, 그 시간 속에 있었거나 있을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겪었고 겪을 일들도 모두 기다 리고 있다고. 나를.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나도 나를. 와닿고 가닿기 위해서.
살아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니까.

⛱️⛱️⛱️ 과거의 어떤 일도 현재의 나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의 나의 모습도 미래의 무엇인가에 당연히 연관될 것이기에 지금 너와 나는 별개의 타인이 아닌 우리여야 한다. 나의 정체성에 대하여 작은 의심을 가진 독자에게 일독을 권함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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