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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북의 사찰

대웅전을 찾아-황악산 직지사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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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일주운

직지사에는 천불의 부처님이 모셔져있습니다. 비로전이라는 전각에 모셔진 천분의 부처님은 같은 얼굴을 한 부처님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연유로 천분의 부처님을 다르게 모셨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천분의 부처님을 ‘현세불’이라고 부릅니다. 항상 우리들이 현실세계에서 겪는 고통을 해결해 준다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와 닮은 부처님을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들은 직지사를 참배하는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직지사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법을 전하기 위해 내려오다가 세운 절로서 1,6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최초의 절인 도리사보다 창건연대가 늦었지만 동국제일가람으로 위용을 느낄 수 있는 대가람입니다.

그러나 대가람의 위용은 다른 사찰과 다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사찰이 주는 특유의 엄숙함과 달리, 수로와 오솔길 그리고 숲과 담장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나무에서 맑고 깨끗한 힘찬 기운을 주고 있습니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에서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생활공간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가족과 함께 산사의 길을 걸으며 행복을 그리고, 자신의 부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기회를 직지사에서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보물

김천 직지사 천왕문 (金泉 直指寺 天王門)「김천 직지사 천왕문」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때 왜적의 방화로 직지사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천불전, 자하문과 함께 피해를 입지 않고 유지되어 오다 1665년(현종 6) 사천왕상을 새로 조성하기 이전에 중건(重建)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조로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보은 법주사 천왕문 다음으로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어칸은 통로로 사용되고, 좌·우 협칸에는 1665년(현종 6) 전라도 송광사 승려 화원이 조성하여 보물로 지정(‘23.10.27)한 소조사천왕상이 각각 봉안되어 있다. 지붕 가구는 2고주 7량가로 천왕문 내에 봉안된 소조사천왕상의 규모와 연동되어 규모, 높이를 결정한 것으로 지붕처마에 비해 몸체가 다소 높은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공포는 전·후면 내·외 2출목 형식으로 정면과 배면의 협칸은 주심포와 주간포를 1조씩 놓은 다포형식이나 어칸은 주간포 대신 화반(花盤)*을 설치한 절충형으로 17세기 다포형식에서 18세기 익공형식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며, 어칸 주상부에 창방과 결구된 안초공**의 경우 17세기초 궁궐건축(宮闕建築)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 기둥과 기둥 중간 사이에 창방 위에 얹어서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초새김한 받침부재

** 기둥 상부 머리에 보 방향으로 끼워 넣어 공포를 받는 부재

보물
김천 직지사 소조사천왕상 (金泉 直指寺 塑造四天王像)


사찰 입구 천왕문에 봉안된 사천왕상은 수미산 중턱에 살며 동서남북 네 곳에서 불법 및 불국토를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이다. 사천왕은 동(지국천왕), 서(광목천왕), 남(증장천왕), 북(다문천왕) 네 방위에서 맡은 바를 수행하는데 각기 보검(寶劍), 보당(寶幢)과 보탑(寶塔), 용과 여의주, 비파 등 지물을 들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일정하다. 부릅뜬 눈, 크게 벌어진 입 등 두려움을 주는 얼굴 모습, 갑옷을 입고 있는 신체, 발밑에는 악귀 등의 생령을 밟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김천 직지사 소조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사천왕상으로는 드물게 발원문이 발견되어 1665년에 완주 송광사를 근거로 활동하던 단응(端應)과 그의 유파 조각승을 초정하여 조성한 것임이 밝혀졌다는 점에서 자료적으로 의미가 있다. 그동안 1649년에 제작된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과 1676년에 제작된 수타사 소조사천왕상 사이의 작품이 없어 공백기로 남아 있었는데 직지사 소조사천왕상의 제작연대가 밝혀짐에 따라 17세기 중엽 경 사천왕상 연구에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또한 발원문에는 화원들의 활동 문제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 호남과 영남 조각승들의 불상 제작과 교류 문제를 다룰 수 있어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 연구에 도움이 되어 학술적 가치도 매우 크다.

직지사 소조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일반적인 사천왕상 배치의 경향대로 천왕문의 진입 우측 방향에 동방지국천왕과 북방다문천왕이, 천왕문의 진입 좌측 방향에 남방증장천왕과 서방광목천왕이 배치되어 있는데, 특히 직지사 소조사천왕상에서는 방위가 적힌 묵서도 발견되어 그동안 논란이 분분했던 사천왕상의 방위 문제도 한층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직지사 소조사천왕상은 전체 비례에서 상체가 긴 특징을 지니며, 지물에서도 다른 사천왕상과 달리 독특한 점이 보이고 있다. 서방광목천왕이 들고 있는 당의 깃대는 대나무로 드문 사례이며 탑의 모습 역시 다른 사천왕상에서와 다른 이형탑이고, 북방다문천왕의 비파에 청사자가 올라가 있는 것도 특이한 사례이다.


직지사 관음전

보물
김천 직지사 석조약사여래좌상 (金泉 直指寺 石造藥師如來坐像)
Stone Seated Bhaisajyaguru Buddha of Jikjisa Temple, Gimcheon

직지사에 모셔져 있으며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불상의 머리는 민머리이고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세부표현을 자세히 살필 수 없지만, 둥글고 원만한 인상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옷에는 평행 계단식의 무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고, 왼손에는 약합를 들고 있어서 이 불상이 약사여래상임을 알 수가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온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폭이 넓어 맵시있는 모양은 아니지만 덩쿨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전반적으로 세부표현이 둔감해졌으며 광배의 무늬도 세련미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약사여래좌상으로 볼 수 있다.

보물
김천 직지사 괘불도 (金泉 直指寺 掛佛圖)
Hanging Painting of Jikjisa Temple, Gimcheon

김천 직지사 괘불도’는 1803년에 제작된 괘불로, 현재 알려진 19세기 괘불 중 가장 이른 예에 해당하고 규모도 가장 크다. 머리에 보관(寶冠)을 착용한 보살형 본존이 양손으로 연꽃을 받쳐 들고 정면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독존(獨尊) 형식의 괘불도이다. 괘불 하단에 쓰인 화기(畵記)를 통해 직지사를 중심으로 경북권역에서 활동한 제한(濟閑)을 비롯하여 위전(偉傳), 탄잠(綻岑), 부첨(富添), 신화(信和) 등 총 13명의 화승들이 제작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단독의 보살형의 본존을 중심으로 화면 상단에는 작게 10위의 시방제불과 5위의 보살상을 배치한 간단한 구성이나, 앞 시기 괘불의 중량감 넘치는 형태에서 가늘고 늘씬한 형태미로 변모한 점, 섬세하고 유려한 선의 구사보다는 굵고 대담한 선묘가 돋보여 시대적 전환기에 제작된 불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색감도 채도가 낮은 적색과 녹색의 대비로 18세기 보다는 시각적으로 다소 엄숙한 느낌이며, 일부 권속에 국한되어 적용되던 음영법이 본존에까지 확대 적용 되는 등 시대적 미감(美感)이 반영되어 있다.

높이 12m 이상 되는 대형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도상의 배치, 상․하축의 조형성, 색채감과 선묘 등 여러 면에서 19세기 불화를 대표할 만큼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작품으로, 한국불교회화사에서 19세기의 첫 장을 여는 선구적인 작품이라는 상징성에 비추어 보물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타당하다

직지사대웅전삼존불탱화(直指寺大雄殿三尊佛幀畵)는 직지사 대웅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로 비단바탕에 채색되었다.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액자나 족자형태로 만들어지는 불화로, 일반적으로 이 직지사처럼 대웅전 본존불의 뒷벽에 위치한다. 조선 후기에는 대웅전이나 대광명전 등에 흔히 3폭의 불화를 봉안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인데, 이 불화도 그러한 형식을 따르고 있다. 중앙에 석가여래의 영산회상도, 왼쪽에 약사회도, 오른쪽에는 아미타불의 극락회도를 배치하였다.

중앙에 배치된 불화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여러 불·보살에게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불이 있고 좌우에 8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으며 둘레에 많은 범문을 써 놓았다. 왼쪽 어깨에만 옷을 걸친 석가불은 악귀를 누르는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다. 비교적 균형잡힌 체구와 둥근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세밀하게 그렸다.

왼편에 있는 약사회도는 화면의 중앙에 약합을 든 약사여래가 앉아 있고 그 주위에 8대보살과 사천왕, 12신장 등이 에워싸고 있는 복잡한 구도이다. 본존불의 신체는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인데 비하여 얼굴은 지극히 작은 눈과 입 등이 매우 단아하고 엄숙한 인상을 풍긴다. 이러한 모습과 등뒤의 물결무늬 원형광배, 옷의 문양표현 등이 18세기 불화의 시대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른편의 아미타회상탱화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두고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을 비롯하여 신장상 등이 주위를 둘러싼 구도이다.

이 세 폭의 탱화는 영조 20년(1744) 세관(世冠), 신각(神覺), 밀기(密機) 등 10여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을 염불도인(念佛道人) 진기와 지영(智英)스님이 증명한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뛰어난 묘사력, 안정감 있는 색감 등으로 당시 불화를 대표하는 걸작에 속한다.

* 증명 : 그림이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에 합당한지, 또는 법대로 그려졌는지를 확인하고 감독하는 스님을 일컫는 것으로, 그림을 직접 그리는 화원(화사, 금어, 출초, 편수 등)과 구분되어 사용됨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직지사석조나한좌상 (直指寺石造羅漢坐像)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나한좌상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높이 45㎝, 무릎 폭 28㎝의 아담한 크기로, 본래 서운선사의 원불(願佛)로 전해진다.

호랑이를 어르는 모습에서 당당한 기품과 사실적인 표현기법이 돋보인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문화의 절정기인 인종(재위 1123∼1146), 의종(재위 1147∼1170)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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