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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북의 사찰

대웅전을 찾아-팔공산 동화사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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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대구 동화사 봉황문 (大邱 桐華寺 鳳凰門)

「대구 동화사 봉황문」이 위치한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창건(極達和尙 또는 心地王師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봉황문으로 불리는 일주문은 조선후기 1633년(선조 11년)에 최초 건립되었다. 원래는 옹호문(擁護門) 자리에 위치하였으나 196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봉황문 앞쪽에는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華寺鳳凰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화사 봉황문은 5량가의 단칸 팔작지붕이며 주심포와 주간포를 가진 다포식이다. 축부는 주천방(柱穿枋, 기둥을 꿰뚫는 부재)을 사용한 상부사재형(上部斜材形, 양팔보형에서 주기둥의 상부에 비스듬히 부재를 덧댄 형태)과 보조기둥형(주기둥 옆에 2개의 보조기둥을 세운 형태)이 혼합된 형식으로 사례가 드물다. 보조기둥은 1920년~1951년 사이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창방(기둥머리에 가로로 맞추는 목재) 전체 배치형식은 주기둥 사이에 창방이 놓인 ‘日’자형으로 평방의 배치형식인 ‘口’자형과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공포는 지역적인 특색이 있는 교두형공포(날개 모양 등으로 도출되지 않은 단조롭게 깎은 공포)로 내부 사면과 외부사면 모두가 동일하다. 또 포간 거리가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좁아지는 다포식이다. 처마는 연목(서까래)와 부연(종된 서까래)을 사용한 겹처마로 되어있다. 봉황문 내부천장은 우물반자 형식으로 우물은 총 4개로 구성하였으며, 중앙 2개소의 우물을 제외하고 양측단 우물에는 용두(龍頭) 2개가 걸려 있다.

대구 동화사 봉황문은 지역적으로 계통이 비슷한 교두형 공포장식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일주문 축부와 구별되는 독특한 축부를 가지고 있다.

보물
대구 동화사 당간지주 (大邱 桐華寺 幢竿支柱)
Flagpole Supports of Donghwasa Temple, Daegu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두 기둥이 66㎝의 간격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기둥이 마주보는 부분과 앞뒷면은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었을 뿐 아무 장식이 없고, 바깥면에는 모서리를 깎고 중심에는 세로로 능선을 조각하였다. 기둥의 꼭대기는 반원으로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둥의 앞면 중간부분 1m정도를 살짝 들어가게 새겼다. 이러한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주 보이는 장식 수법이다. 기둥의 위와 아래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는데, 위는 네모난 모양이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다.

당간을 받치던 석재가 없어지고 전체의 형태가 경쾌한 맛은 없지만 견실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 지주가 만들어진 시기는 당간지주에서 둔중함이 엿보이고, 동화사의 창건시기가 신라 흥덕왕 7년(832)인 것임을 참작하면 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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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수마제전 (大邱 桐華寺 須摩提殿)

대구 동화사 수마제전은 1465년(세종 11)에 건립되었고, 임진왜란 뒤 1702년(숙종 28)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현재의 유구도 17세기 이후의 기법과 고식의 기법이 공존해 연혁과 부합하는 등 그 조영 시기가 명확히 확인된다.

수마제전은 사방 1칸 규모로, 다포식 공포를 가지며 맞배지붕으로 된 불전인데, 이처럼 사방 1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불전은 현재 국내에서 수마제전이 유일한 유구이다. 맞배지붕 불전으로 측면에 공포를 구성하지 않았지만 평방을 구성하고, 귀포에는 전각포를 구성하여 이전에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이었던 것을 해체해 일부 부재를 재사용해 다시 지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이다. 이는 곧 본 건물의 연혁을, 1465년에 다포계 팔작지붕 불전으로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일부 피해를 입자 1702년에 해체한 후 부재 일부를 사용해 다시 지은 것으로 구체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수마제전의 공포 의장은 극락전과 마찬가지로 전ㆍ후면, 그리고 내ㆍ외 모두 제공의 단부에 수서나, 앙서를 만들지 않은 교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공포 의장 기법은 17~18세기에 걸쳐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지역적 특성으로서, 당시 이 일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동일한 계보의 기술자 집단에 의해 조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건물의 지붕가구 기법 역시 특기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삼량가 구성이나, 내목도리를 받는 승두의 내단부를 안쪽으로 늘이고 그 아래에 판대공을 세워 지지한 위에, 종보를 올리고 종도리를 받는, 즉 오량가의 이중량 구조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중도리 없이 하나의 서까래만 걸친 삼량가인,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되어있다. 그 결과 전후 도리간의 수평적 일제성이 강화되고, 더욱 안정적인 방식으로 종도리를 받을 수 있는 독창적인 구조가 되었다. 이러한 지붕가구 기법은 다른 문화유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전통 목조건축 지붕가구 기법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종도리와 내목도리 사이에 설치한 고식의 솟을합장 부재가 남아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으로 언급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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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극락전 (大邱 桐華寺 極樂殿)

대구 동화사 극락전은 1600년(선조 33) 금당암 영역에 건립하고 금당(金堂)이라 했다. 이전의 수마제전을‘고금당(古金堂)’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 대웅전 영역이 중심인 것과 달리 창건한 이후 동화사의 중심은 금당암이었다는 것이고, 극락전을 금당(金堂)이라 하고 수마제전을 고금당(古金堂)이라고 한 것은 이전의 금당이 수마제전이고 새로 건립한 금당이 극락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에 가람을 창건한 당시의 위치에, 당시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부에 17세기 전반의 목조건축을 현재에 전하고 있다. 창건 당시의 기단과 초석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감주나 이주 없이 동일한 기둥 간격의 평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상부 목조가구의 기본 틀 역시 고대의 기법이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마루바닥 하부에도 방전이 깔려 있는 등 고식의 기법이 많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상부의 목조건축은 문헌기록을 통해 건립연대가 1622년으로 명확히 확인된다.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후에 재건된 조선후기 불전 중에서는 건립 시기가 빠른 편에 속하며, 처마와 창호, 단청 등에서 일제강점기 이후의 개변이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구조와 의장은 건립 당시의 상태를 잘 유지하고 있고, 건물을 이루는 부재간 및 전체적인 비례가 미려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극락전의 공포 의장과 구조 역시 주목할 만하다. 먼저 고대의 기둥 간격 위에 17세기의 다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미세한 첨차 길이의 조정을 통해 공포대 구성의 의장적 통일성을 확보한 점에서 이 건물을 조영한 목수의 탁월한 실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제공의 내외부 끝을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추녀와 선자연이 걸리는 모서리 부분 퇴칸의 공포에 병첨을 사용하는 방식은, 17~18세기 팔공산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기법으로, 특정 지역에서 활동했던 기술자 집단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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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大邱 桐華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Wooden Amitabha Triad of Donghwasa Temple, Daegu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높이 2m 이상의 대형 불상조각으로, 이 시기 삼존상으로는 드물게 좌상의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우 입상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이 불상은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현진(玄眞)이 주도하여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1629년(인조 7)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현진은 광해군비 장열왕후(莊烈王后)가 발원한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의 11존 불상 제작 시 전국의 조각승을 이끌어 17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뚜렷한 자취를 남긴 승려 조각가이다. 이 불상은 듬직하고 온화한 얼굴과 무게감 있는 당당한 신체 표현 등 현진 특유의 조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 목조 불상으로 제작된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완전한 형태의 불신(佛身)과 대좌(臺座)를 모두 구비하였고 지금까지 큰 변형 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다.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각가, 제작연대, 봉안사찰과 전각 등에 대한 온전한 내력을 갖추고 있고 현진이 제작한 현존 유일의 입상 작품일 뿐 아니라 시대적 조형감각이 잘 표현되어 있어 예술적, 학술적 가치 등 모든 면에서 17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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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대웅전 (大邱 桐華寺 大雄殿)
Daeungjeon Hall of Donghwasa Temple, Daegu

동화사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후 8차례에 걸쳐서 새로 지었으며, 대웅전 또한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있는 대웅전은 조선 후기인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은 이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문짝은 여러 가지 색으로 새긴 꽃잎을 장식해 놓은 소슬꽃살창을 달았다. 또한 기둥은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서 건물의 안정감과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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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大邱 桐華寺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Wooden Amitabha Triad of Donghwasa Temple, Daegu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높이 2m 이상의 대형 불상조각으로, 이 시기 삼존상으로는 드물게 좌상의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좌․우 입상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이 불상은 발원문(發願文)을 통해 현진(玄眞)이 주도하여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1629년(인조 7)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현진은 광해군비 장열왕후(莊烈王后)가 발원한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의 11존 불상 제작 시 전국의 조각승을 이끌어 17세기 조각사에서 가장 뚜렷한 자취를 남긴 승려 조각가이다. 이 불상은 듬직하고 온화한 얼굴과 무게감 있는 당당한 신체 표현 등 현진 특유의 조각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 목조 불상으로 제작된 작품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완전한 형태의 불신(佛身)과 대좌(臺座)를 모두 구비하였고 지금까지 큰 변형 없이 유지되어 오고 있다. ‘대구 동화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각가, 제작연대, 봉안사찰과 전각 등에 대한 온전한 내력을 갖추고 있고 현진이 제작한 현존 유일의 입상 작품일 뿐 아니라 시대적 조형감각이 잘 표현되어 있어 예술적, 학술적 가치 등 모든 면에서 17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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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아미타회상도 (大邱 桐華寺 阿彌陀會上圖)
Buddhist Painting of Donghwasa Temple, Daegu (Amitabha Buddha)

이 불화는 1699년 대화원(大畵員) 의균(義均)을 비롯한 묘해(妙解) ·지영(智英) ·상명(尙明) 등이 참여해서 그린 아미타불화로서 불보살과 호법신중을 3폭에 나누어 그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세 폭 모두 박락이 심하고 채색이 떨어져 나가긴 하였지만 가는 철선묘(鐵線描)의 양감 있는 얼굴, 균형 잡힌 신체비례, 섬세한 인물표정, 담채색의 은은한 색조 등에서 의균의 뛰어난 필력과 색채 감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불화는 화폭의 구성에서 본존을 중심으로 보살, 나한, 신중을 모두 한 폭에 그리는 일반적인 불화형식과 달리 아미타불과 팔대보살을 한 폭에, 나한과 범천·제석천, 사천왕 등 호법신을 각각 좌우 2폭으로 나누어 그림으로서 부처님의 설법장면과 수호신중을 구분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쳐 팔공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화사인 의균의 현존 작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화라는 점에서 그의 초기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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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 (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
Agalmatolite Reliquary from the Three-story Stone Pagoda at Biroam Hermitage of Donghwasa Temple, Daegu (Presumed)

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

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 구연부 지름 8.0㎝, 밑지름 8.5㎝이다. 현재는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추정된다.

구연부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

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경문왕 3년(863)에 탑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였다.

통일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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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
Rock-carved Seated Buddha of Donghwasa Temple, Daegu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臺座)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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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 (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
Rock-carved Seated Buddha of Donghwasa Temple, Daegu

동화사 입구 오른쪽의 암벽을 다듬어서 조각한 불상이다.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臺座)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자료출처:국가유산포털, 동화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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