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 스님도 없는
돌궐족이 사는 곳
호국(胡國) 이북은 북쪽으로는 북해에, 서쪽으로는 서해에, 동쪽으로는 중국에 이르며, 그 이북은 모두 돌궐 ( 투르크Turk)족이 사는 지역이다. 이들 돌궐족들은 불법을 알지 못하며 절이나 스님들도 없다. 옷 입는 복장은 모직 외투와 모직 적삼이며 고기를 먹는다.
성곽을 거처로 하지 않고 전포로 천막을 쳐서 집으
로 삼는다. 거주할 곳을 찾아다닐 때는 이 천막을 몸에 지니고 물과 풀을 따라 다닌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같지 않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고 선악을 알지 못한다. 땅에서는 낙타, 노새
말 종류가 많이 난다.
원문/혜초
역/지안
이 장에서 말하는 북해와 서해는 아랄해와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아랄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두 나라의 영토에 걸쳐 있는 바다이다
돌궐 (투르크Turk)은 6세기 중엽부터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흉노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된 유목 제국을 세워 약 200년간 중앙아시아 일대를 장악했던 민족이다. 처음 나라를 세운 건국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 건국 초기의 역사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오르콘Orkhon)에 돌궐 비문이 남아 있어 이를 연구한 학자들의 설명으로는 6세기 중엽 수령 부민(Bumin)이 초원길을 장악하고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새로운 초원의 지배자가 된 토문은 자신을 일 카간(이리 가한)이라고 부르고 수도를 오르콘 강 유역의 외투켄) 에 정하였다. 오르콘 강변에서 발견된 돌궐 비문은 돌궐 제국의 건국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다.
"위로는 푸른 하늘과 아래로는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고이 사이에 인간의 아들들이 태어났다. 인간의 아들들을 위해 우리의 위대한 조상인 부민 카간(Bumin Qaghan)과 이스테미 카간 Istemi Qaghan)이 군림하였다. 이들이 군림하시면서 돌궐 민족의 국법을 잡아 주셨고 세워 주셨다
그때 사방은 모두 적이었다. 그분들은 군대를 이끌고 사방에 있는 적을 토벌하여 복속시켰다. 그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였고 무릎을 꿇게 하였다. 조직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 돌궐 민족을 잘 조직해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하고 용감한 군주들이셨으며 신하들도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왕족들과 백성들도 융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돌궐은 성립 초기부터 이원적 통치 체계를 갖추어 부민 카간은 동쪽을 통치하고 동생 이스테미 카간은 서쪽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통치구조가 나중에는 결국 제국의 분열을 가져왔
다. 제3대 목간 가한( 재위 553~572년)이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세웠다. 그는 영토를 확장하여 서역 제국을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하고 동으로는 거란을, 북으로는 키르기스를 정
복하여 돌궐의 판도를 바쨌다. 결국 돌궐의 세력이 동으로는 요동만, 서로는 카스피해, 북으로는 바이칼호, 남으로는 고비사막에까지 이르렀다.
목간 가한은 제국을 중앙과 동부.서부 남부. 서부변경부 등으로 구역을 5부로 나누어 통치하면서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목간 가한이 죽은 후 타발 가한 재위
(572-581년)이 즉위한 후에도 돌궐의 발전은 계속되있다. 동쪽으로 중국 북방 변경까지 세력이 확대되어 중국과 마찰을 초래했다.또 타발 가한은 불교를 장려하여 불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타발 가한의 사후에 가한 승계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 결국 583년 제1돌궐 제국은 시파라(始波羅)를 가한으로 하는 동돌컬과 대
라편(大邏便)을 가한으로 하는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이후 7세기 중엽에 당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수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고 있던 동돌궐이 수말당초에 내분에 휩싸이다가 630년 당나라 이정(李靖)이 이끌고 간 토벌군에 의하여 힐리 가한(재위 62-63년)이 생포되고부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서돌궐은 594년 당시 중국에 망명해 있던 이스테미의 아들 달두 가한(재위 576-~603년)으로 등극한 이래 서 투르키스탄의 여러 민족을 복속시키고 돌궐의 재통일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가 603년 토욕혼의 반란을 평정하다 전사하자 권력 다툼이 일시 재연되다가 618년 통 엽호 가한 (재위618-630년)이 등극하여 수습되었다, 통 엽호는 숭불정책을 써 불교
를 크게 장려하였다. 현장이 구법 도중 통 엽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서돌궐도 통 엽호 가한이 피살된 후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급속히 기울어져 당나라의 정벌군에 의해 망하고 만다.
이 해가 658년이었다. 이후 돌궐족은 당으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그러다 제2 돌궐이 다시 부홍한다. 중국에 저항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돌궐이 골탈록 가한(682~691년)을 중심으로 682년 막남지역에서 제2 돌궐 재건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 제2 돌궐 제국은 골탈록 사후에 등극한 묵철 가한(재위 691~716년)이 다시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투르크계 부족연맹체인 회홀, 복고, 혼, 발예고 ,동라, 사결, 계필, 아포사, 골륜 옥골 로 등 9성을 복속시키고 국력을 크게 신장하였다 그러나 발예고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묵철이 피살되자 골탈록의 아들 비가(재위 716~734년)가 가한으로 즉위하였다. 이 비가 가한의 치세 때 혜초가 이 지역을 지나며 돌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보인다. 비가 가한은 친중국정책을 쓰며 나라를 이끌어 갔지만 734년 신하에게 독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제2 돌궐 제국도 망하고 위구르 제국이 일어나게 되었다.
돌궐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중에서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었다. 이들이 사용한 문자는 고대 게르만족이 사용한 룬(Rune) 문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둘 사이에 특별한 연관성은 없다고 한다. 셈어족에 속하는 아람 문자 계통의
고대 소그드 문자와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혜초의 말처럼, 주변의 다른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와는 매우 다르다. 제2 돌궐 제국시대에 세워진 비석이 현재까지 전해지
고 있어서 이를 통해 돌궐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었다.
'왕오천축국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왕오천축국전-34 ㆍ35 (0) | 2024.03.13 |
---|---|
왕오천축국전-33.객수(客愁)를 달랬던 호밀국 (0) | 2024.03.12 |
왕오천축국전-30 ㆍ31 (0) | 2024.03.10 |
왕오천축국전 29 근친 혼인을 하는 호국(胡國) (0) | 2024.03.09 |
왕오천축국전-27. 28 (1) | 2024.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