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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33.객수(客愁)를 달랬던 호밀국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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客愁(객수)를 달랬던 호밀국


토화라국(토카리스탄)에서 동쪽으로 7일을 가서 호밀(胡密,와칸Wakhan) 왕이 사는 성에 이르렀다. 오다가 마침 토화라에서 번(蕃:서쪽 이역 변방)으로 들어가는 중국 사신을 만났다. 이에 간략하게 넉 자의 운을 맞춘 오언시 (四韻五言詩)를 지었다.

그대는 서쪽 이역이 멀다고 한탄하지만
君恨西蕃遠(군한서번원)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한다네.
余嗟東路長(여차동로장)
길은 험하고 산마루엔 눈이 잔뜩 쌓였는데
道荒宏雪嶺(도황굉설령)
험한 골짜기 길엔 도적떼가 들끓고
險澗賊途倡(험간적도창)澗,산골물 간
새도 날다가 솟아 있는 산봉우리에 놀라며
鳥飛驚峭嶷(조비경초억)嶷(산이름 의,높을 억)
사람은 가다가 조심조심 외나무다리도 건너야 한다네.
人去偏樑雖(인거편량수)
평생 눈물을 흘려본 적 없었는데
平生不捫淚(평생불문루) 捫,어루만질 문
오늘따라 하염없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구나.
今日灑千行(금일쇄천행)

겨울 어느 날 토화라(토카리스탄)에서 눈을 만난 소회를 오언시로 읊었다

차디찬 눈이 얼음 위에 쌓이고
冷雪牽氷合(냉설견빙합)

차가운 바람이 땅이 갈라질 듯 매섭게 부는구나.
寒風擘地烈(한풍벽지열) 擘,엄지손가락 벽.

바다마저 얼어붙어 발라놓은 단壇인 듯하고
巨海東墁壇(거해동만단)墁,흙손 만.

강물은 벼랑을 갉아먹고 있네.
江河凌崖囓(강하능애설)囓, 물 설

용문엔 폭포수마저 얼어 끊기고
龍門絶暴布(용문절폭포)

우물 가장 자리도 도사린 뱀처럼 얼어붙었는데
井口盤蛇結(정구반사결)

불을 벗하여 층층대를 오르며 노래하지만
伴火上陔歌(반화상핵가) 陔해,층층대, 언덕

어떻게 파밀 (파미르고원)을 넘을 수 있을까?
焉能道播密(언능도파밀)

호밀 왕은 군사가 적고 약해 스스로를 지켜낼 수가 없어서 대식의 관할 하에 있다. 해마다 비단 3,000필을 세금으로 보낸다. 주거지가 산골짜기여서 처소가 협소하고 가난한 백성이 많다. 옷은 가죽 외투와 모직 적삼이며, 왕은 비단과 모직 옷을 입는다. 빵과 보릿가루만을 먹는다, 이곳은 매우 추워 다른 나라들보다 추위가 훨씬 더 심하다. 언어도 다른 나라들과 같
지 않다. 양과 소가 나는데, 아주 작고 크지 않다. 말과 노새도 있다. 스님들도 있고 절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진다. 왕과 수령, 백성들 모두가 불교를 섬기며 외도(外道)에 귀의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나라에는 외도가 없다. 남자는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으나,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주거지가 산 속이기는 하나, 그곳 산에는 나무와 물 그리고 풀조차 없다.

[왕오천축국전]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은 혜초의 기록에 의구심을 품는 대목이 여러 곳 있다고 한다. 호밀국(와칸)에 관한 기록에서도 우선 혜초는 토화라(보카리스탄)에서 동쪽으로
7일을 가서 호밀국에 이른다 했는데 지리상으로 보아 도저히 7일에는 같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혜초가 말한 토화라에서 호밀까지의 거리가 현대로 보면 탈라깐에서 와칸까지의 거리로 볼 수 있는데 이 거리가 1,500리 정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주일을 가지고는 이를 수 없는 거리
라고 보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는 사람이 하루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대략 50리로 보았다는 설이 있다. 이 거리는 물론 밤낮을 쉴 새 없이 걷는 것은 아니다.
호밀(胡密,와칸Wakhan)은 휴밀(休密), 발화(鉢和), 호밀단(胡密丹), 호멸(胡滅)등 여러 가지로 음사해서 표기되고 있다. 모두 범어 와카나(wakhama)에서 음사된 말이다.
중국의 역사서에는 호밀에 관한 기록이 몇 곳에 나온다.
먼저 위서 (魏書) 서역전 에는 발화국은 갈반타(渴槃타 갈반단국,총령) 서쪽에 있는데, 대단히 춥고 사람과 가축이 함께 땅굴 속에서 산다. 큰 산은 멀리서 보면 은이 덮인 봉우리에(銀峰)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빵과 보릿가루를 먹고 보리술을 마시며 모직 외투를 입는다.
[신당서][ 서역전] 에도 호밀의 설명이 나오는데 왕이사는 성 이름을 색가심성이라고 하였다. [대당서역기]에는 호밀을 달마실철제국이라고 불렀다. 호밀의 위치는 파미르 고원 남쪽으로 교통의 요지인데, 서쪽으로 토화(토카리스탄)를 경유해서 파사(페르시아)에 이르고 남쪽으로 오장(우다나)과 가섭미라(카슈미르)를 지나면 인도로 이어진다. 5~6세기에 천축으로 행하던 스님들이 대개 이 길을 따라갔으며,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소발률을 토벌할 때도 군대를 이끌고이 길을 지나서 소발률을 정벌하였다. 13세기 후반 동방건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도 토화라로부터 이곳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국까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당나라 때는 특히 호밀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여 현종은 호밀 왕들에게 왕위를 책봉해 주고 숙종 때는 759년 호밀왕 흘설이구비시가 내조하자 숙종이 이씨 성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한다.
용문은 중국 산서성 (山西城) 하진현 ( 河津縣) 서쪽과 섬서성(陝西城) 한성현 (漢城懸) 동북쪽에 걸쳐 있는 지명이다.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 우왕이 황하의 물을 이곳으로 끌어 왔는데, 황하의 물고기들이 여기를 넘어 올라가면 용이 되고 올라가지 못하면 햇볕에 아가미가 쬐여 말라 죽는다 한다. 그리하여 용문(龍門)은 용이 된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써 왕이 되거나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용문에 오른다고 했으며, 도교나 불교에서는 신선이 되거나 도를 깨단는 것을 용문에 오른다고 비
유해 말하기도 하였다

이 장에서도 두 편의 시를 움어 적어 놓았다. 산속의 나라 호밀에 오다가 마침 중국 사신을 만나 서로의 노정(路程)에 대해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 같은 내용이다. 또 눈 오는 날의 행로의 고달픔도 혹한의 추위를 통해 기술해 놓아 읽는이의 마음마저 아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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