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승민 작가는
불면증을 해결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콘크리트" "나의 왼쪽 너의 오른쪽" "당신은 신은 얼마" 출간했으며 앤솔러지 "뉴 러브" "사람의 얼굴"로 참여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 살고 있다.

🌐🌐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
몇 페이지를 읽어 넘긴다.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탐정소설의 서두마냥 글과 글 페이지와 페이지의 연관성을 구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꾸역 꾸역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고 있는 것 같이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문장속으로 빠져드는 나를 발견한다. "이드"라는 고래가 던져주는 화두는
근본적으로 현대사회가 지향해야 할 환경에 대한 나침반이라 여겨질 만 하지만, 현실의 온갖 문제는
모범답안을 쉽게 허락하지는 않는다. 노력의 실제적 모습으로 보여지는 장면으로 자연의 순수한 소통에 근접하는 "돌마"와 인위적으로 고래의 언어를 인간의 소리로 치환하려는 "성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을 읽어 가면서 인간은 모든 종족의 우위에 위치하는 종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승민 작가의 《발끝이 바다에 닿으면》에서 거대 고래 '이드'가 던지는 화두와 돌마, 성원의 대비는 우리가 자연을 대하는 두 가지 왜곡된 시선을 거울처럼 비춰줍니다.
작품 속에서 돌마는 자연의 순수한 소통에 근접하지만 어쩌면 인간이 도달하기 힘든 이상향을 보여주고, 성원은 고래의 언어를 기계와 인간의 소리로 치환하려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인위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 결핍과 한계의 틈새에서 소설은 우리에게 "인간은 과연 만물의 영장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죠.
현실의 온갖 복잡한 문제 속에서, 인간이 이 세상을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은 '지배자'가 아닌 '연결자이자 정원사'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우위(Dominance)'에서 '관계(Relationship)'로의 전환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을 생태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이드"가 보여주는 바다의 거대함과 깊이는 인간의 기술과 오만이 얼마나 사소한지 깨닫게 합니다.
지배가 아닌 공존: 인간은 자연의 '우위'에 있는 종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거대한 그물망의 '일부'일 뿐입니다. 세상을 이끈다는 것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들이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공간과 권리를 양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2. 성원의 '치환'을 넘어선 '경청'의 자세
성원처럼 자연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데이터, 수치, 가치)로 억지로 번역하고 계량화하려는 시도는 늘 한계에 부딪힙니다. 우리는 자연을 '이해하고 통제할 대상'으로만 봅니다.
"고래가 어떻게 사람 말을 하지."
"나도 그게 궁금해."
성원은 고래에게 언어를 학습시키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할지 생각해봤다.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아이는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며 말을 배운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반응이다. 마마, 파파 같은 말을 했을
때 부모가 보여주는 행복한 모습은 아기에게 보상으로 작용한다.아기는 언어가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을, 내 기대 수준을 충족시킬 수 있는 행동을 상대로부터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맘마'가 밥을 뜻한다는 것을, '아야"가 엄마의 관심을 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언어 습득이 느린 아이라도 자신이 큰 소리로 울면 방문이 열리면서 부모가 달려온다는 사실을
익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연이 내는 신호와 경고(기후 위기, 생태계 붕괴)를 인간의 경제적 이익으로 저울질하지 않고, 이드의 목소리 그 자체로 들을 수 있는 '낮은 자세의 경청'이 필요합니다.
3. 현실적 정원사(Gardener)로서의 역할
현실은 돌마처럼 완벽하게 순수한 소통만을 하며 살아가기엔 너무나 복잡합니다. 우리는 기술을 써야 하고, 자원을 소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리더십은 '책임감 있는 정원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정원사는 정원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고치지 않습니다. 꽃과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흙을 보살피고, 잡초를 솎아내며, 생태계의 밸런스를 맞춥니다.
돌마는 혼잣말을 많이 하는 아이에요. 꼭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 처럼요. 아내(돌마의 엄마)가 공안에 잡혀간 이후로는 부적 심해졌어요.뭐 하냐고 물어보면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해요. 눈을
감으면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가 보인다고요. 그곳의 소리가 들린다고 했어요. 그쪽에서도 돌마가 보는 걸 본다고 했어요.
그게 누군지, 그곳이 어딘지는 모른다더군요. 처음 보는 모습이라고, 이 근처 어디에서도 그런 존재는 본 적이 없다고 했어요. 그 팔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이 가요? 이 애가 귀신을 보는구나 했지요. 자세히 설명을 해보라고 했어요 그때 돌마가 그린 그림이 저거예요."
돈둡이 뒷마당을 가리켰다. 짚더미가 가리고 선 담장에 못으로 긁은 그림이 가득했다. 서툰 솜씨로 그린 바다였다. 심해에서 솟아오르는 물방울, 수면 위로 내리꽃히는 햇살, 바다에 떠 있는 어선. 그리고 그 가운데 티베트에서 자란 아이가 한 번
도 본 적이 없을 커다란 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현지는 카메라를 들어 그 풍경을 찍었다.
인간의 뛰어난 지성과 기술은 자연을 파괴하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망쳐놓은 생태계를 복원하고 치유하는 대리인(Agency)의 도구로 쓰여야 합니다.
"발끝이 바다에 닿는 순간"의 의미
인간이 발끝을 바다에 담그는 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의 경계를 낮추고 연결되는 순간을 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앞장서서 '끌고 가는' 지배자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드가 던진 나침반이 가리키는 진짜 방향일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본질을 허약하게 만들어 자연과의
소통을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건 아닐까요.
⛱️⛱️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지구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는 거대한 착각을 주지만, 역설적으로 인간 개인의 본질은 그 어느 때보다 나약하고 고립되게 만들었습니다.
소설 속 성원의 모습이 바로 이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우리가 자연과 멀어지고 허약해지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짚어볼 수 있습니다.
1. 감각의 퇴화와 '간접 경험'의 함정
과거의 인간은 날씨를 알기 위해 바람의 냄새를 맡고 구름의 색을 보았습니다. 자연의 신호를 온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였죠. 하지만 지금은 기상청 앱으로 확인합니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나약함으로 기술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주었지만, 자연과 직접 부딪히며 살아가는 신체적·감각적 면역력을 앗아갔습니다.
성원의 한계: 소설 속 성원이 고래의 소리를 인간의 기계로 치환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능력이 퇴화해 버렸기에, 오직 '기술이라는 필터'를 거쳐야만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허약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2. 거대한 스크린이 만든 '가짜 연결'
우리는 여러 방송기기에서 송출되는 초고화질 다큐멘터리를 보며 자연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크린 뒤에 숨어서 안전하게 소비하는 '자연의 착시'일 뿐입니다.
진짜 자연은 비바람이 불고, 벌레가 들끓고, 예측 불가능한 불편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술은 인간을 이 불편함으로부터 철저히 격리해 '온실 속 화초'로 만들었습니다. 온실 안의 인간은 화려한 기술을 가졌지만, 온실 밖 진짜 자연(이드의 바다)과 소통하는 법은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3. '효율성'이라는 종교가 가로막은 소통
과학 기술의 핵심 논리는 '최소한의 시간과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것(효율성)'입니다. 하지만 자연과의 소통, 즉 돌마가 보여주는 소통은 지극히 비효율적입니다. 마냥 기다려야 하고, 가만히 스며들어야 하니까요.
인간이 기술의 속도에 중독되면서, 자연의 느린 호흡을 견디지 못하는 '조급하고 허약한 내면'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을 기다려주지 못하니, 소통은 끊어지고 정복과 개발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만:기술을 누리되, '발을 진흙에 담그는' 용기
결국 과학 기술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기술이 만든 문명 속에 갇혀 스스로를 생태계와 분리된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인간의 오만이 인간을 허약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성원의 편리한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끊임없이 돌마의 순수함을 갈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가끔은 모니터와 스마트폰을 끄고, 맨발로 흙을 밟거나 거친 바닷바람을 가만히 맞아보는 것.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의도적으로 불편한 자연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야성'을 지켜내야만 인간은 본질적인 건강함을 회복하고 이드의 화두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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