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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권 전개
강실이의 번민과 그것을 이용하여 접근하려는 춘복의 행동이 서서히 나타난다. 강실이는 어떻게 될런지 시간은 흘러간다.
⛱️⛱️ 강모의 소식을 기다리는 강실
그 검은 신에 고인 달.
아마, 굳이 불을 밝히지 않아도 방안이 그렇게 우련했던 것은, 장지문에 가득히 밀리어 비치는 빛깔의 달빛 때문이었으리라.
무엇 하러 달은 이리 밝을까.
희부윰한 방안의 한쪽 자리에 모로 누운 강실이는, 부시게 흰 장지문을 손으로 쓸어 보며 생각하였다. 창호지 한 장으로 내려와 그네의 손 끝에 만져지는 달빛은 싸르락, 바람 스치는 소리를 냈다.
그소리에 강실이는, 저도 모르게 흠칫 귀를 세웠다.
그러나 그뿐,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떨어져 덩굴 잎사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혹한의 뜰에, 사람을 문득 놀라게 하던 나못잎 소리조차 들릴 리 없는데.
그네는 귀를 거두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발소리만.
그저 다만 발소리만이라도 들었으면,
그냥 지나가 버려도 좋으니, 왔다는 기척만이라도 들렸으면.
마음의 깊은 골짜기 아무도 짐작할 수 없는 곳에, 그네는 귀 하나를 심어 놓고 날마다 기르면서, 할머니 청암부인의 출상을 앞둔 저녁 어스름 속에서, 또 새해가 다가서는 섣달 그음날의 오밤중에, 그
리고 아까 그렇게 달 뜨는 한밤에. 오직 발소리 몇 점을 기다리면서
전신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네의 온몸은 어느새 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 소리마저 달빛에 흡입되어 파랗게 얼어 버린 밥. 문풍지도 울지 않는데, 못 듣고 놓쳤을 리 천만 없건만, 그의 발소리
는 어디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무정한 사람,
💥💥강실이는 언제까지 강모를 가슴속에다 꽁꽁 부여메고 살 것인가? 겨울의 꽁꽁 언 강물도 봄이 되면 소리없이 풀려나는데, 언 가슴속으로 스며들 봄기운은 언제런가?
⛱️⛱️ 대보름날 이야기
그리고는 꽃니한테도 일렀다.
"보름날 아칙에는 누가 불러도 대답 않는 거이여. 어쩔래, 인자,
너. 올여름에 더우깨나 머겄네. 너도 어서 어디 가서 니 더우 팔고 와, 쩌어그 강아지한테라도."
어미의 말에 꽃니는 안채 뒤안 마당에서 요강을 부시고 있는 콩심이한테로 통통거리고 뛰어가 이름을 불렀다.
콩심이는 입을 쪽 오브리고 대담을 하는 대신 새 주둥이처럼 뾰족 내밀어 보였다. 애가 탄 꽃니는 자꾸만 콩심이를 부르고, 콩심이는 그러는 것이 재미있어 웃음 소리도 못 내고 키킥, 웃었다.
사람들은 아직 해가 뜨기 전에 보리 :조:콩에 기장을 섞어 찹쌀로 지은 오곡밥을, 고사리 .도라지.호박 오가리 같은 담백한 나물반찬에 먹고는, 귀밝이술 이명주 (耳明酒)를 마시는데
"이 술을한 잔 마시면, 일년 내내 소식을 빨리 듣고, 귀가 환히 밝아져서 남이 하는 말을 잘 듣고, 잘 판단할 수가 있다."
고하였다.
아침상을 물리고 나면 온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부름 깨물자."
하고는, 콩이나 밤, 호두를 이빨로 깍, 소리가 나게 깨물었다.
그리고는 해가 지기 전에 저녁밥을 먹고 나서. 모두 다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달맞이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 동산 기슭에는 하늘을 찌르고 세워 놓은 달집이 있었다. 달집은 푸르렸다.
시퍼렇게 솟구친 대나무를 텅, 터엉, 찍어다가 없어서 꼭대기를 한점에 모은 울타리를 원뿔처럼 만들어 이엉으로 감싸고, 달 뜨는 동쪽은 훤히 터 열어 놓은 달집 속에는, 산에서 쳐 온 생솔가지기 채곡채곡 쟁여져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꼭대기에는 새끼줄을 꽁꽁 묶어 달모양을 만들어서 매달아 놓았다.
💥💥채이를 들고서 집집이 오곡밥을 얻으러 다녔던 그 기억이 슬며시 떠 오른다. 대보름날은 세상의 혼탁을 깨부수는 날이었다.
⛱️⛱️
"무신 이애기들 허여?"
아랫목 요대기 아래로 손을 집어 넣으며 비오리어미가 불었다. 딸내미의 놀란 얼굴이 심상치 않게 뵈인 것이리라. 나도 모르겄네. 무신 오루꿀덕 강실이가 화냥년이당가아." "으응?"
비오리어미도 순간 놀라 무슨 대꾸를 못하였다.
언제 마주서서 똑바로 볼 일도 없는 애기씨였지만, 사람들이 오가며 하는 말로 짐작하기는, 참으로 읍전하고 귀티나는 규수라고 알고 있던 그 큰애기가 화냥년이라니, 이게 무슨 소린가.
"무신 말을 잘못 들었능게비제."
비오리어미가 못 미더위 고개를 짜우뚱하며 옹구네를 바라보 았다.
"앗다. 참말로. 앵간헌 사램이 헌 말이먼 내가 요러고 숨이 넘어가겄소? 내 눈으로 본 거이나 똑 한가지로 틀림없는 사램이 그러든디." 찰진 입귀에 허연 거품이 물리는 옹구네의 말에, 비오리와 그어미는 어느결에 홀린 듯이 빨려들어가, 눈을 번들거리며 바싹 다가 앉았다.
옹구네 입시울에 맹렬한 기름이 돈다.
'아니, 그 대실서방님은 시방 여가 지시도 안허장여?"
'하아. 그 일 있고는 도망을 가 부렸제이. 잘못을 해도 어디 에지간 했어야 얼굴을 들제. 죽어도 못 들것잉게 아조 먼 디로., 만주로 가분 것 아니라고? 그것도 벌쎄 언지 이애긴디? 안 오장여,여그는.
💥💥 본격적인 강실이 가두기 작업이 시작된다. 주막에서, 아낙네들이 모인곳에서 소곤소곤거리는 이야기가 번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 연을 만든다
아녀자의 바느질 솜씨나 마찬가지로, 남자가 자신의 연 만드는 솜씨를 한것 뿜내어 많은 사람들 앞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만일 손이 둔하고 무디어, 틀이나 겨우 얽어서 후줄근하게 만든 연이라거나, 하찮고 볼품없는 그림이 얼룩덜룩 그려진 연을 들고 나와. 여럿 가운데 서서 날리게 되면 본인도 머쓱하여 부끄러워하였고, 남들한테도 은근히 흉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에나가. 한 개에 몇 전씩 하는 연을 사다가 날리는 것은 더욱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다.
연은 자기가 만들어서 놀아야 멋이었다.
그래서 으레 정초가 되면 집집마다 어린 아들이나 손자를 앉혀놓고 한지를 장방형으로 반듯하게 자르며 가느다란 대오리를 곱게 깎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자상한 손길이, 신명나고 흥겹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방안에는 벌써부터 들판과 언덕 위의 바람이 설레이며 부풀어 차오르는 듯하였다.
이기채도 어린 날의 강모를 위하여 연을 만들어 주었으며, 기표도 그의 아들 강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연을 손수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집안에 연을 날릴 소년이 없는 기응은, 남달리 매시라운 손끝으로 장구도 잘 쳤지만, 연 만드는 솜씨도 그에 못지않아, 큰집 작은집의 두 조카들을 주려고 공들여 고운 연을 만들곤 하였다.
💥💥연을 날리기 위해, 연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집안의 비법인지도 모른다. 부자간으로 전승되는 기술을 잘 배워야 연 또한 멀리 나는 것이다.
⛱️⛱️ 연은 액운을 무리친다.
오늘은 보름밤.
지치게 날리고 놀던 연이나 금방 만든 새 연이나 가릴 것이 없이, 이제 더는 가지고 있지 못한다.
생솔가지와 생대나무로 푸르게 엮어 지은 달집이 뭉글뭉글 구름덩이 같은 흰 연기를 토하며 타오르는 붉은 불길에 던져 넣은 연들은, 화르르 불너울을 일으키며 눈 깜짝할 사이에 스러져갔다
"모든 액(厄)은 다 타 버리라."
고 사람들은 연을 던져 넣으며 빌었다.
제 연이 허망하게 불티로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얼굴에 불 그림자가 주황으로 일룽였다. 그러나 아까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이 대보름날 밤이면, 집집마다 멀리 날리어
앞으로 다가올 액을 미리 막으려는 액막이 연을 띄우는 것이었다
마치 소복을 한 듯 아무 색도 입히거나 칠하지 않은 백지의 바탕이 소술한 흰 연에다. 섬뜩하리만큼 짙고 검은 먹빛으로
'厄(액)'
'送厄(송액).'
'送厄迎福(송액영복)'을 써서. 갓 떠오르는 새 달의 복판으로 날려 보내는 이 액막이 연은, 얼음같이 푸르게 비추는 정월의 달빛 속에 요요한 소지(燒紙)처럼 하얗게 아득히 올라갔다
월레에 감긴 실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있는 대로 모두 풀어 그연을 허공에 놓아 주었다.
멀리. 저 멀리. 더 먼 곳으로 날아가라고
💥💥 액을 태우면서 복을 바라는 건 누구나가 바라는 바이다.
⛱️⛱️ 강실이 액연으로 모든 걸 태웠으면 바란다.
그리고는 보름날이 되었던 것이다.
강실이도 그 제웅이 달린 액막이 연을 보았다.
귀신의 낮빛으로 허옇게 질린 연의 이마에 꼭두서니 홍꼭지 대신에 검은 글씨로 ''厄"이라 써 놓은 것이 달빛을 받아 더욱 귀기를
띠는데, 꽁지에 매단 지푸라기 허수아비 제웅은,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쳤지만, 백지로 얼굴을 씩워 감은데다 눈이며 코며 입술이며 검은 붓으로 그려 넣은 것이, 강실이를 철렁 놀라게 하였다.
저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를 대신하여 멀리 허공으로 죽으러 가는가.
제웅은 시늉으로 그린 눈을 부릅뜨고 강실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허새비의 고리 눈빛이 표창같이 그네의 가슴을 뚫고 복판에 꽂힌다. 무서웠다. 그것이 단순한 허새비가 아니라, 정말로 무슨 넋이스며 들어 자신의 혼을 빼 가는 것도 같았다.
매달고 있던 나락 모가지가 다 잘려 버린 지푸라기 몇 올을, 이리 엮고저리 결어 만든 제웅의 마른 가슴 갈피에다 생일 적고 생시 적어, 몇 번이고 접어서 조그맣게 찔러 넣은 백지는, 이제 한낱 종이
조각이 아니라 강실이의 혼백이 되었으며, 제웅 또한 한낱 지푸라기 인형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 강실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치 그 허새비 인형이 실제 강실이고, 그것을 보고 섰는 강실이가 오히려 허옇게 껍데기만 남아 사람 시늉하고 있는 허새비인 것만 같았다.
💥💥얼마나 좋을까. 나의 액운을 모두 다 가져가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강실이는 염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희망이란 걸 이미 알고 있다.
⛱️⛱️활인 복덕
신새벽에 귀설은 빗자루 소리 들리면, 오들은 또 누가 와서 마당을 쓰고 싶더니라. 인제 후제 내가 죽더라도 그렇게 이마당 찾는 사람을 박대허지는 말어라. 그것이 인심이고 인정이다. 이 마당에
활인(活人) 복덕 (福德)이 쌓여야 훗날이 좋지, 태장(笞杖)소리 낭자허먼 안택(安宅)굿도 소용이 없어. 집안이 조용허지를 못헌 법이다."
청암부인은 이기채에게 그렇게 일렀다
"내 젊어서는 혼자몸으로 눈앞이 캄캄하여 살림을 이루노라고, 남한테 모질고 독한 소리도 많이 들었다마는, 그것은 한때라, 종내 그렇게 모으기만 한다면 그것이 도척이지 사람이겠느나. 내가 이
만큼이라도 살만 허게 되었으니 나눌 줄도 알어야지 싶어지고, 또 내 앞에 모이고 쌓인 재물이 다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 눈물나게 억지로 빼앗은 것도 있지 싶어져서, 하늘이 무섭고 사람이 가여워
무엇으론가 갚어야 가벼이 될 것만 같았더니라. 이제는 전답이 무거워. 눈물이 무겁다... 굳이 좋게 생각허자면, 내가 남보다 좀 치부한 것은 하늘이 내 능력을 믿고, 여러 사람 쓸 것을 나한테 한번에 말기어 심부름 시키는 것이라고, 고지기 시키신 것이라고나 헐까. 나는 그러니. 곳간의 쇳대만 책임지고 있을 뿐, 내 한 입에. 내 뱃속에 그 곡식 그 재물을 다 둘러 삼키라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사람의 욕심이지 하늘이 그리허라고 그대로 두시지도 않어.
그것을 혼자 다 삼키려고 혈라치면, 입이 찢어지고 배가 찢어져 살 수가 없게 되느니. 그래서 옛말에도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랬다고, 재물이란 비록 비루하고 독하게 번 것이라 할지라도 쓸 데를 제대로
선하게 써야 헌다.
💥💥복은 베풀어야 하는 게 도리이니 거기에서 나의 잘못을 감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춘복이의 염원의 시작
아아, 달 같은 작은아씨.
작은아씨. 내사람 되시요. 나도새 세상 살고 잪소,
작은아씨도 인자 나랑 새 세상 한번 낳고 살어 보십시다.
나는 선산에도 댕게왔소.
다아 댕게왔소.
이보시오, 작은아씨.
춘복이는 얼른 담벽 쪽으로 몸을 붙이고 숨을 죽이었다.
그리고 강실이를 향하여 눈빛을 모았다.
마치 꿈을 꾸다 나온 사람처럼 허망하고 처연한 모슴으로, 성에가 허옇게 어린 저고리의 흰 옷고름 하나 나부끼지 않는 앞섶을 두 손으로 붙움켜 누른 채, 고개를 들어 검푸른 겨울 밤 하늘의 깊고도 깊은 물속 한가운데 그무슨 시린 소원처럼 얼음 박힌 달음 우러르며 오래오래 서 있는 강실이 . 그네는 윤기 잃어 여윈 머리 위에 달무리를 에이도록 푸르게 두르고 서 있었다.
춘복이는 그네의 희고 푸른 모습을 조금씩조금씩 깊은 숨으로 빨아 들이기 시작하였다. 마치 아까 거명굴 무산(巫山)의 동산 날망
바윗돌 위에 서서, 두 팔을 벌리어 가슴을 내밀고
"달 봤다아."
함성을 지르며 있는 힘을 다하여, 두려운 달을 들이삼키던 그때 처럼.
무서운 힘으로 강실이를 흡인하는 춘복이 기운에 삼투(渗透)되는 것일까. 강실이는 멀리서 보아도 완연 창백해지면서 백지장보다 더 얇고 희게 바래어, 펄력,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춘복이는 조금도 눈빛을 늦추지 않고, 제 핏줄의 끝 끝에까지 강실이가 빨려들어 차 오르도록 숨을 들이켠다.흡월(吸月)하듯이,
아아, 무엇 하러 달은 저리 밝은가.
💥💥그토록 염원하는 걸 이룰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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