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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 Patrick Modiano
바스러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 모호함을 신비로운 언어로 탐색해온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1945년 불로뉴 비양쿠르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1968년 소설 "에투알 광장"으로 로제 니미에 상, 페네옹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외곽 순환도로"로 1972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슬픈 빌라"로 1976년 리브레리상을 1978년에는 "어 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프랑스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 을 수상했다. 2014년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를 출간하고 그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데뷔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들 의 찬사를 받았으며, 주요 작품으로 "청춘 시절"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 "팔월의 일요일들" "도라 브루더" "신원 미상 여자" " 작은 보석," "한밤의 사고" "혈통" "잃어버린 젊음의 카페에서" "지평" 등이 있다.
옮긴이 권수연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와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불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지평" "악의 숲" "언로운" "단테의 신곡 살인" "그렇지만, 이건 사랑이야기," 등이 있다.
차례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9
옮긴이의 말 현대의 기억과 망각에 대하여 165 파트릭 모디아노 연보 175
🌐🌐🌐그냥 군 소리 없이 들어갑니다.
🙏🙏🙏전화가 왔다. 별 내용이 없는 전화일 것이다. 전화는 사연이 있는 전화였다. 내가 어느 날 잃어버린 수첩을 주었다는, 난 벌써 잃어버린 수첩마저 망각의 시간속으로 보내어 버렸는데, 누가 나에게 깃발을 흔들고 있을까?
별일 아니려니 했다. 우리가 벌레에 쏘이곤 처음에는 퍽 가벼이 여기는 것처럼. 어쨌든 우리는 안심하고 싶어서 그렇게 자신을 조용히 달랜다. 장 다라간의 집 '집필실'로 전화가 걸려온 건 오후 네시쯤이었다. 다라간은 햇빛이 닿지 않는 구석에 놓인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그런데 울리는 소리를 못 들은 지 벌써 오래인 이 전화벨이 끊기지를 않았다. 왜 이렇게 질기지? 전화를 걸어놓고 끊는 걸 잊은 건 아닐까. 다라간은 결국 몸을 일으켜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쏟아지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장 다라간 씨와 통화하고 싶습니다만."
🙏🙏🙏 수첩을 돌려 받기 위하여 약속 장소로 간다. 어머니가 배우로 있던 극장, 아버지의 사무실은 어릴적 기억을 소환하기에 그지 없이 좋다.
다라간은 택시 기사에게 마들렌 성당 앞에서 세워달라고 했다. 앞선 날들 만큼 되지는 않아서 인도의 그늘진 곳으로 다니면 걸을 만했다. 다라간은 내리쬐는 볕속에서 텅 비고 적막한 아르카드가를 따라 걸었다. 이 부근에 발을 들이지 않은지 퍽 오래였다. 그의 어머니가 근처 극장에서 배우로 일했고, 아버지가 길 끝 왼편에 있는 오스만 대로 73번지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기억났다. 73이 라는 숫자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하지만 그 과거는 전부 시간 속에서 어슴푸레해졌다. 햇빛을 받으면 흩어지는 연무처럼.
🙏🙏🙏질 오톨리니와 샹탈 그리페가 찾아왔다. 잃어버린 수첩을 가지고서....그러면서 오랜전에 망각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기 토르스텔"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 물어본다. 자신이 쓴 소설"그 여름의 어둠"에서 서술한 인물이라 한다.
여자는 하늘색 종이 서류철을 침대 위 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큼직한 사진 한 장이 '그 여름의 어둠'과 타이핑한 서류 사이로 반쯤 삐져 나왔다. "뭡니까, 그 사진은?" "어떤 아이 사진인데, 자료에 들어 있었어요." 다라간은 '자료'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질은 경찰서에서 문제의 사건에 대한 정보를 얻었어요. 경마를 하는 어떤 경찰관이랑 안면을 텃거든요. 그 경찰관이 옛 문서들을 뒤졌어요. 이 사진 찾아 주었고요 .
🙏🙏🙏파리도 낯설고, 파리의 거리는 더욱 더 어색하기만 하다. 기 토르스텔이란 작자는 어떻게 기억회로에 꼭꼭 숨어 있는 작자인가?
하물며 청춘 시절의 여름날에도, 올 여름 들어서 만큼 인생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름은 모든 것이 유예되는 계절이고, 그래서 형이상학적인' 계절이라고 그를 가르친 철학 교수 모리스 카뱅은 일찍이 말했다. '카뱅 '이라는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토르스텔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영 깜깜하다니,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직 해가 다 넘어가기 전이었고, 산뜻한 미풍이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그 시간 오스만 대로는 한산했다. 다라간은 지난 오십 년 동안 이곳을 자주 지나쳤고, 유년 시절에도 어머니에게 이끌려 저 위쪽으로 조금 떨어진 프랭탕 백화점에 갈 때면 이곳을 거쳐서 갔다. 하지만 오늘 저녁에는 이 도시가 낯설었다. 그는 여태 이 도시에 그를 묶어놓았을 닻줄이란 닻줄은 다 진즉 풀어버렸다. 그게 아니라면 이 도시가 그를 내쳐 버렸다.
🙏🙏🙏다라간은 생각한다. 또 기억해 본다.
샹탈 그리페가 주고 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그의 소설 "여름의 어둠"을 읽어 본다.
소설, 여름의 어둠을 쓰기 시작한 건 가을이었다
어느 일요일 트랑블레를 찾은 그 가을. 그 일요일 저녁 그레지보당 단지에 있던 방에서 책의 첫 쪽을 쓴 것을 기억한다. 몇 시간 전 토르스텔의 자동차가 마른 강변로를 달리고 뱅센 숲을 가로지를 때 그는 가을이- 연무가, 젖은 땅의 냄새가. 낙엽이 흩뿌려진 골목길이_ 정말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이제 그에게 '트랑 블레'라는 말은 영원히 그해 가을과 불가분할 것이었다. 그가 옛 소설에 써먹은 토르스텔이라는 이름 또한 그렇다. 다만 그 소리의 울림 때문에 따온 이름. 토르스텔 하면 생각나는 건 이게 다다. 더 깊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말할 수 있는 건 이것 뿐이다. 질 오톨리니는 아마 실망할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남자에게 무슨 설명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스트랑은 누구인가? 나에게 줄기차게 이끌려 나오는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자료를 읽어갈수록, 다라간에게 그것은 한 해에 진행되지 않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조사가 뒤섞인 창고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해가 1952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콜레트 로랑의 살인 사건을 다룬 1951년의 메모들과 마지막 두 쪽에 담긴 메모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이음줄 하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건 '콜레트 로랑'이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여자'가 사는 '생뢰라포레 소재의 집'을 드나들었다는 것. 이 집은 경찰 감시하에 있었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언급된 이름 중에는 토르스텔. 그의 어머니, 뷔냥, 페랭 드 라라가 있었다. 다른 두 이름도 그에게 생소하지 않았다. 로제 뱅상, 그리고 특히나 생뢰라포레에 있는 살았다는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여자'
🙏🙏🙏아스트랑이 그를 두고 사라진? 같이 이탈리아로 가자고 증명사진을 찍고 위조 여권까지 마련한 뒤 사라진 아스트랑의 편지를 본다. 아스트랑! 그 이름이 머리를 울리며 나타난다.
그쪽 앞으로 왔나 보네요. 장 다라간." 여자는 그의 이름이 푸른 잉크로 적혀 있는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그 집에서 편지를 받은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기억에 없는 글씨였는데, 글씨가 아주 커서 봉투 겉면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장 다라간, 그레지보당 단지 8번지. 파리. 몇 구인지는 쓸 자리가 없었다. 뒷면 에도 이름과 주소가 있었다. A. 아스트랑, 알프레드드오당크가 18번지. 파리. 얼마 동안은 그 이름을 보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을 감추고 머리글자 'A '만 썼기 때문일까? 나중에, 그는 어떤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이 편지를 뜯어보기를 주저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파리가 뇌이와 르발루아를 만나는 시 경계까지 걸었다. 이삼년 더 지난 뒤 외곽 순환도로를 낸다며 저층 차고들과 집들을 허물어버린 그 구역으로. 아스트랑. 그게 누구인지, 어떻게 보자마자 알아채지 못할 수 있었을까?
🙏🙏🙏다라간은 이제 출간도 하고 제법 이름이 알려진 청년 작가가 되었다.
아스트랑은 가옥에서 출소 후 아마도 옛 사연들은 잊고 싶었을 거다. 다라간은 잠시 회상에 잠긴다.
작년에, 생뢰라포레에 때 알고 지낸 사람을 만났어요 그녀는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곤 격정 섞인 시선을 던졌다.
누구?
'자크 페랭 드 라라라는 사람이요.
누군지 모르겠는데......
생뢰라포레에 살 때는 사람들을 하
도 많이 만나서."
그러면 보브 뷔냥 하면, 뭐 생각나는 게 있어요?'
아니. 전혀.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다라간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요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 꼬맹이가?
나를 취조하고 싶은 거야?
🙏🙏🙏부스트라트 박사가 말한다. 그의 진료실에서 보면 맞은편 집이 잘 보인다고.
다라간은 젊은 여자는 아니스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는 다라간 자신이다.
아니스탕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질문한 적은 없었다. 아스트랑은 다라간에게 거의 부모 역할을 하였다.
웬 젊은 여자랑 아이도 살고 있었어요. 여자는 나이로 봐서 아이 엄마는 아니였고... 나는 아이의 큰누이일 거라고 봤지 어쩌면 그 로제 뱅상이리는 남자의 딸이있을 수도 있고 로제 뱅상의 딸?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든 적은 없다. 로제 뱅상과 아니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 다라간은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다. 그가 곧잘 하는 생각인데, 아이들은 의문을 품는 법이 없다
🙏🙏🙏아스트랑은 왜 사라졌을까? 같이 생활하던 그를 슬그머니 혼자 떠난 이유가 그것. 경찰이 그를 감시하고, 살인 사건에 연류된 그런 이유였은까.
심지어 생뢰라포레의 집도 로제 뱅상 명의라고 명기돼 있었 다. 그보다 휠씬 오래된 한 보고서의 사본도 있었는데. 사법경찰 청 풍기단속과 수사정보팀이 노트르담드로레트 가 46번지 호텔 에 거주중인 아니 아스트랑이라는 여자에 관해 작성한 보고서 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에투알 클레베르"에서 유명함." 하지만 그모든 게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오톨리니가?-문 서고의 자료를 허겁지겁 복사하느라 어떤 말들은 빠뜨리고 어떤 문장들은 서로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데도 무턱대고 잇대놓은 것처럼.
🙏🙏🙏아스트랑은 그가 학교에 다닐 때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주소를 꼭 메달아 주었다.
별안간 계절도 해도 서로 뒤섞여버렸다. 다라간은 라페리에르 가까지 걷기로 했 다. 그때와 똑같은 경로를 따라 똑바로, 계속 똑바로. 경사진 길 을 따라 내려가다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 었다. 퐁텐 가를 다 내려가면 밤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며 7월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아니는 쪽지에 주소만 덜렁 쓴 것이 아니라 이런 말도 덧붙여 썼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그 큼 직한 글씨는 구식 필체여서 생뢰라포레의 학교에서는 이미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 때 이탈리아로 간다고 하던 그 때.
위조여권을 그의 손에 잡혀 주던 그 때, 아스트랑의 눈가로 흘러내리던 눈물을 보았던 그 때. 이미 사라질 생각을 하던 그 때를 생각했다.
다라간은 사진 속 제 모습을 일아보았다. 즉석 사진 부스에서 너무 강한 불빛에 매번 눈을 깜박여가며 찍은 사진. 다라간은 여권 첫 쪽에 적힌 이름과 생일을 읽었는데, 성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니의 것으로 돼 있었다. 아스트랑. 로제 뱅상이 근엄 한 목소리로 "함께 가는 사람"과 같은 성을 써야 하는 거라고 말 했고, 설명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아오는 길에, 아니와 다라간은 대로 교통섬 위로 걸었다. 물랭루주를 지나서는 왼편으로 난 좁다란 길을 따라갔다. 길이 끝나는 곳에 정비소가 보였다.~~~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어떤 문장의 끄트머리만 알아들을 수 있 었다. .--네가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그 방에서 잠을 깬 그는 길 저편에서 이편으로 건너오는 데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 다는 걸 깨달았다.
🌐🌐🌐 아무런 생각 없이 물러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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