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은이 김산아
2013년 "문학의오늘"로 등단했다. 주요 발표 작품으로 "삐삐 의 상자" "모래 케이크" 등이 있으며, 앤솔러지 "우리는 행복 할 수 있을까" "숨어버린 사람들" "마스크 마스크"에 참여했 다. 2021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소설가 모임 '반 상회'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들어가며
김산아 소설집은 정신을 해석학적을 분석하고, 사회의 착시현상을 바로 돌려 통찰을 요하는 성격의 작품들이다. 동성애, 폭력, 결혼, 가족, 노동, 자본.불평등, 세상을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실감나게 표현되고 있다.
작품 소개
🌐 바람 예보
초속 십이 미터의 강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강풍 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밤사이 바람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일기예보를 보던 남편이 한숨을 쉬었다.목을 한껏 젓 허고 영명이는 소파 끝에 걸친 채였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미끄러져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늘 그렇게 앉았다. 누웠다고도 앉았다고도 할 수 없는 불편한 자세. 나는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고 그의 옆에 앉았다.
💥💥나는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마트의 야간 근무로 푸석해진 거친 손바닥이 맞닿아 터덜터덜한 느낌을 전해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우리 가게를 문 닫게 한 외국계 업체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폭풍 주의보: 초속 십사미터 이상
❗️강풍 특보: 초속 십팔미터 이상
실실 웃음이 나왔다. 물건을 담던 젊은 손님이 나를 쳐다보았다.나는 손님에게도 뜻없이 웃음을 흘렸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기계 처럼 손을 움직여 순식간에 계산을 끝낼 수 있었다. 펄쩍 뛰어서 계산대 위로 올라설 수도 있었다.
💥💥바람이 거셀질수록 나는 점점 더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수 없다. 바람의 중심으로 나를 이끈다
🌐 삐삐의 상자(중독된 습관의 악순환)
카메라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부엌으로 달려갔다.
칼을 집어 들었다. 베란다로 달려갔다. 상자 속의 삐삐를 꺼내 들었다. 녀석을 가랑이 사이에 끼워 깔고 앉았다. 삐삐가 몸부림쳤다. 삐삐의 머리를 잡아 목을 길게 뺀 뒤 칼을 높이 쳐들었다. 배 속에서 아기가 툭툭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게임. 아내는 공포 영화 매니아.
아내는 공포 영화를 시간 허락하면 줄곧 즐긴다. 그러든 날 현실과 꿈이 뒤죽 박죽으로 섞이게 된다.
배속의 아이를 자꾸만 꿈틀대고 있다. 나는 태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엄마다. 아이는 계속 꿈틀거린다.
🌐 머문 자리(속물적 인간)
떨어진 비닐봉지 안엔 토막 난 생닭이 서로 들러붙어 얼음덩어리가 되어 담겨 있었다. 이사 온 뒤 닭을 냉동실에 넣은 기억이 없으니 적어도 일 년은 넘었을 거였다. 냉동실을 헤집어 빈 자리를 만들고 다시 깊숙이 박아 넣었다. 뒤늦게 고통이 퍼지며 발가락이 심장처럼 펄떡였다. 재활용품을 내어놓기 전 하려던 일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둘이 살면 얼마 만큼 필수 생필품이 필요할까?
냉장고가 신선 식품 저장이 아닌 물품 창고로 변한다.
우리집에서는 이 주에 한 번씩 냉장고 파 먹기를 한다. 그러면 며칠간은 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다.
그러고도 재희네 아파트는 다른 곳보다 더, 계속, 가격이 올랐다. 흥분이 가라앉고 일상으로 돌아간 남편은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재희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폭등과 폭락의 세상에 무덤덤한 인간들은 바보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지난 아침에 보았던 것과 크기가 비슷한 검은 봉지를 벌렸다. 닭이었다. 재희는 비닐도 벗기지 않은 채 쓰레기 봉투에넣었다. 아까워 쌓아둔 음식 재료도 모두 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생활을 놓지 않을 거란 거.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란 건 명확했다. 쓰레기봉투를 내다 버리고 핸드폰에 은행 앱을 띄우고 잔액으로 쓰인 긴 숫자를 바라보았다. 이체계좌에 신철의 계좌번호를 써넣었다. 금액란에 이백만 원을 썼다 지웠다. 백만 원을 쓰고 오래 바라보다 지웠다. 오십만 원을 쓰고 이체 버튼을 클릭했다.
💥💥신철은 예전에 같은 일을 했던 동료다.
신철이 암 투병 중이라 도움을 주려고 생각 중이다.
🌐 포클레인
세혁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누웠다. 시원은 근육 없이 가늘면서 빈틈없이 단단해 보이는 그의 다리와 그 아래 눌려 구겨진 이불을 보았다. 마른몸 어디에 그런 무게가 들어 있는지, 어젯밤 짓누르는 세혁의 다리에서 빠져나오려 여러 번 몸을 뒤척였다. 욕망이든 좌절이든 그 무엇이든 발산되지 못한 존재가 차곡히 쌓여 저 다리에 석화되어 있는지도.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당겨 그의 몸을 덮었다. 걸음마다 카펫 위로 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세혁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무덤덤한 사람이지만 가만 있다가도, 한꺼번에 쌓여 있던 모든 걸 쏟아내어 시원이 마음의 상처를 받곤 한다.
그때였다. 그러게요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답했다. 쿠이의 목소리였다. 시원은 놀라 본능적으로 세혁의 기색부터 살폈다. 그는 잠들어 있었다. 쿠이가 여기에
있을 리 없었다. 몇 개월째 만나지 않았다. 그만하자 고 언어로 확인한 적은 없지만 이미 끝난 관계였다.
💥💥무덤덤한 사이에서 오는 남편과의 무료한 일상이 나의 가슴을 활짝 열게 하고 일탈을 경험하게 한다.
둘은 여러 개의 분화구를 지나 산책로를 벗어났다. 언덕을내려가 사람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을 바위 뒤에 멈췄다. 남자가 시원의 목덜미를 쥐고 입을 맞췄다. 남자에게서 유황 냄새가 진하게 났다. 시원은 그 냄새를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남자가 시원의 땋은 머리를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 오늘도 캠핑
그는 도시에서 드러낼 수 없었던 수컷성을 이
곳에서 맘껏 뿜어내려는 것 같았다. 당장 화답하지 않으면 수컷성은 실망할 게 분명했다. 나는 최대한 크게 미소 지었다. 아마 나의 미소는 '우리 가족을 위해 좋은 장소를 고른 당신이 자랑스러워요' 하는 메시지로 전달될 거였다. 그가 밝게 웃으며 어깨를 활짝 폈다.
💥💥자산의 획득이 여유로와 욕망을 키우는 이들은 그에 걸맞는 인격까지 필요로 한다. 캠핑을 시작하면서 캠핑 용품을 지속적으로 사 날랐다. 캠핑 장소가 마땅치 않아 돌아 보던 중 더 곱스런 장비의 캠핑가족에게 무시를 당한다.
🌐 공존
네가 기억하는 것들 앞에서 나는 주눅이 들었다
매표소 옆 플랭카드가 파랗다 못해 검어 보일 정도로 짙은 색이었고, 골바람이 세서 펄럭이다 넘어질까 걱정되더라는 기억은 네게 쓸모도 의미도 없었다. 너는 지루해했고
종국에는 관두자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하찮고 초라해진 기억을 간직할 공간을 찾지 못해 네 옆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너(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나는 아무것도 똑바로 답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공존하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 모래 케이크(포용. 사랑의 시작)
한 눈으로 고개까지 깊게 주억였다. 그 뒤부터 윤서와 꽃은 급격히 친해졌다. 윤서는 꼬박꼬박 서연이를 꽃이라 불렀다. 꽃도 윤서의 말에 정성스럽게 대답했다. 자유시간 마다 둘은 놀이를 했다. 놀이에서 언제나 꽃은 꽃이었고 윤서는 꽃을 키우는 사람, 꽃과 노는 강아지. 꽃 옆을 달리는기차였다.
💥어린이집에 빨리 오고 늦게 가는 아이. 자신을 꽃이라고. 생각하는 아이가 말없이 혼자 노는 것을 바라보던 윤서가 다가 왔다...나는 "환"의 커밍아웃을 받아 들이지 못했던가.
🌐다섯 뼘에서 멈춘 이야기
기억은 늘 내가 모르는 곳에 숨어 있다 불쑥 일상을 침범 해 들어왔다. 침착하려 애쓰며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새 수연 씨는 등을 보이며 돌아 앉아 있었다. 들러붙은 티셔츠 위로 마른 등이 도드라졌다. 그 자세로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남자를 살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모습이 두들겨 맞고 몸을 사리면서도 주인 눈치를 보는 강아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옥상을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집안을 향해 소리쳤다. 저 왔어요. 남자가 방으로 들어간 뒤 나는 수연 씨에게 물었다.저, 사람이죠? 수연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을까.
💥💥병원에 입원 해 있는 엄마가 부재 중 전화에 찍혀 있다. 딸에게 수다 겸 하소연을 하려는 것일 터.
나는 오늘 무속 신문 인터뷰를 28세 여성 김 수연을 찾아가야 한다. 그녀를 만났지만, 만나지 않은 것 보다 못한 결과를 낳았다. 정말 혼돈의 하루였다.
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바삭한 과자를 꾹꾹 눌러 씹었다.가슴에서 몽둥이 같은 것이 불뚝불뚝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아무리 악착같이 버터도 결국은 놓아버리게 되는 순간이 있는 걸까. 몽둥이 같은 것을 삼키며 과자를 또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퍼졌다. 눈이 아팠지만 더 크게 떴다. 없던 일인 듯 기억 않고 살고 싶었다. 중간중간 끊긴 기억을 더덤으며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장면을 혼동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세 뼘만 제면 키 재기가 끝날 거라고 아이는 안심한다.하지만 키 재기는 다섯 뼘에서 멈춰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나가며
많은 허물이 있어 그것을 들춰내면 상처를 받는다.
상처 받은 자아는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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