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광은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뒤, 아직 그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희롱하여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 삼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은 버티며 수락하지 않았으나, 사양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혔다.
여광이 말하였다.
“도사의 지조라고 해봤자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집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密室)에 가둬 버렸다. 구마라집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지극하므로 마침내 그 절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光旣獲什未測其智量見年齒尚少乃凡人戲之强妻以龜茲王女什距而不受辭甚苦到光曰道士之操不踰先父何可固辭乃飮以醇酒同閉密室什被逼旣至遂虧其節
여광은 또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忍辱)의 마음을 품어 일찍이 안색이 달라지는 일조차 없었다. 여광은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졸들이 이미 휴식하자, 구마라집이 진언하였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狼狽)를 당할 것입니다.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다. 수심이 몇 길이나 되고,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그제야 그를 비밀스럽고 남다르게 여겼다.
或令騎牛及乘惡馬欲使墮落什常懷忍辱曾無異色光慚愧而止光還中路置軍於山下將士已休什曰不可在此必見狼狽宜徙軍隴上光不納至夜果大雨洪潦暴起水深數丈死者數千光始密而異之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진언하였다.
“이곳은 흉망(凶亡)한 땅이므로 모름지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運數)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마땅히 속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따랐다.
양주(凉州)에 이르러 부견이 요장(姚萇)에게 시해 당했다는 것을 들었다. 여광의 삼군(三軍)은 상복을 입고 양주성 남쪽에서 크게 곡하였다. 이리하여 여광은 관외(關外)에서 참칭(僭稱)하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칭하였다
什謂光曰此凶亡之地不宜淹留推運揆數應速言歸中路必有福地可居光從之至涼州聞符堅已爲姚萇所害光三軍縞素大臨城南於是竊號關外稱年太安
태안(太安) 원년(385) 정월, 고장(姑臧)에 큰바람이 불었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바람입니다. 반드시 간특한 반란(叛亂)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갑자기 양겸(梁謙)과 팽황(彭晃)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죽어 사라졌다.
太安元年正月姑臧大風什曰不祥之風當有姦叛然不勞自定也俄而梁謙彭晃相係而叛尋皆殄滅
여광의 용비(龍飛) 2년(396)에, 장액(張掖) 임송(臨松)의 노수호(盧水湖)에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사촌아우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모반하여, 건강 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서자(庶子)인 진주자사(秦州刺史)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纂)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였다.
“단업(段業) 등은 까마귀떼처럼 규율이 없고, 여찬에게는 위세와 명망이 있으므로,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길 것이다.”
여광이 구마라집에게 상의하니,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번 출행을 관찰해 보건대 아직 그 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至光龍飛二年張掖臨松盧水胡沮渠男成及從弟蒙遜反推建康太守段業爲主光遣庶子秦州刺史太原公纂率衆五萬討之時論謂業等烏合纂有威聲勢必全剋光以訪什什曰觀察此行未見其利
그러는 사이에 이미 여찬은 합리(合梨)에서 크게 패하였다. 갑자기 또 곽형(郭馨)이 난리를 일으켰다. 여찬은 대군(大軍)을 내버리고 몇몇 군사들만을 데리고 귀환하다가, 다시 곽형에게 패배 당하였다. 겨우 자신의 몸만 벗어날 수 있었다.
여광의 중서감(中書監) 장자(張資)는 문필(文筆)이 있고 온화하며 아담하였다. 여광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장자가 병이 들자, 여광은 널리 병을 낫게 할 훌륭한 의사를 구하였다. 외국의 도인 라차(羅叉)가 말하였다.
“장자(張資)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여광은 기뻐하여 그에게 매우 많은 금품을 하사하였다.
구마라집은 라차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라차의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갓 번거롭게 재물을 낭비할 뿐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旣而纂敗績於合梨俄又郭馨作亂纂委大軍輕還復爲馨所敗僅以身免光中書監張資文翰溫雅光甚器之資病光博營救療有外國道人羅叉云能差資疾光喜給賜甚重什知叉誑詐告資曰叉不能爲益徒煩費耳冥運雖隱可以事試也
구마라집은 오색실로 새끼를 만들어 매듭을 짓고 태워서 잿가루를 물 속에 던졌다.
“만약 재가 물에 떠올라도 도로 새끼 모양이라면 병은 나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재가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원래의 새끼 형태가 되었다. 이윽고 라차의 치료는 효험이 없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장자는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여광도 죽었다[卒].
여광의 아들 여소(呂紹)가 왕위를 이었다. 수일이 지나자 여광의 서자 여찬이 여소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연호를 함녕(咸寧)이라 일컬었다.
乃以五色系作繩結之燒爲灰末投水中灰若出水還成繩者病不可愈須臾灰聚浮出復繩本形旣而又治無效少日資亡頃之光又卒子紹襲位數日光庶子纂殺紹自立稱元咸寧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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