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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전

구마라집 역경 여정-1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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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라집(鳩摩羅什) (출생, 344~사망 413)
산스끄리뜨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4대 역경가들 가운데 가장 정평이 나 있는 사람으로서, 불교의 종교사상과 철학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과 영향력에 크게 힘입었다.
또한 그의 의해서 번역된 불교 경전은 동북아 3개국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꾸마라지바는  카슈가르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수리아사마라고 하는 대승불교도에 의하여 불교의 중관학파로 개종했다. 인도에 유학하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례하여 여러 방면에 대해 잘 알았고, 특히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인도 전역에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 명성은 중국에까지 퍼졌고, 후진의 요흥은 그를 국사로 봉하고 소요원에 머물게 하며 승조, 승엄 등과 함께 역경에 전념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403년(후진5)부터 <중론>, <백론>, <반야경> 등 35부 348권에 달하는 방대한 경전을 번역했다.

그의 번역은 간결함과 수려한 문어체로 딱딱한 경전의 이해를 창조적으로 이끌어 많은 불도들을 매료시켰다.


鳩摩羅什一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 동수(童壽)라 하며 천축국(天竺國)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다.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나 명성(名聲)이 나라 안에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지조가 있었다. 곧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즈음에 사양하고 출가(出家)하여 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구자국(龜玆國) 왕은 그가 영화로움을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鳩摩羅什此云童壽天竺人也家世國相什祖父達多倜儻不群名重於國父鳩摩炎聰明有懿節將嗣相位乃辭避出家東度蔥嶺龜茲王聞其棄榮甚敬慕之自出郊迎請爲國師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다. 사려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눈을 거쳐 간 것은 능숙하게 하고, 한 번 들은 것은 듣자마자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관상법에 의하면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이든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鳩摩炎)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구마염을 핍박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王有妹年始二十識悟明敏過目必能一聞則誦且體有赤黶法生智子諸國娉之竝不肯行及見摩炎心欲當之乃逼以妻焉

얼마 후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신통한 깨달음과 빼어난 이해력이 평소의 배나 더하는 것을 자각(自覺)하였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은데다, 도를 깨달은 승려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왕실(王室)의 귀부인들과 덕행(德行)이 있는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공양을 베풀고 재(齋)를 청하여 법문(法門)을 들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갑자기 저절로 천축어(天竺語)에 능통하게 되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반드시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내니,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곳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어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슬기로운 자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리불(舍利佛)이 뱃속에 있을 때의 증험(證驗)을 설법하였다.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에 그녀는 곧 예전의 천축어를 도로 잊어버렸다.
旣而懷什什在胎時其母自覺神悟超解有倍常日聞雀梨大寺名德旣多又有得道之僧卽與王族貴女德行諸尼彌日設供請齋聽法什母忽自通天竺語難問之辭必窮淵致衆咸歎之有羅漢達摩瞿沙曰此必懷智子爲說舍利弗在胎之證及什生之後還忘前言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불경을 배웠다. 하루에 천 개의 게송(偈頌)을 암송(暗誦)하였다. 한 개의 게송(偈頌)이 32자(字)이니, 모두 3만 2천 글자인 셈이다. 비담(毘曇)을 암송한 뒤에, 스승이 그 뜻을 전수하였다. 즉시 통달하여 그윽한 이치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龜玆國)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재물로서 공양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이를 피하여 구마라집을 이끌고 떠났다.
什年七歲亦俱出家從師受經日誦千偈偈有三十二字凡三萬二千言誦『毘曇』旣過師授其義卽自通達無幽不暢時龜茲國人以其母王妹利養甚多乃攜什避之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다. 이름난 덕을 지닌[名德] 법사(法師)인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나니, 바로 계빈왕(罽賓王)의 사촌 아우이다.
깊고 순수하여 큰 기량(器量)이 있었다. 재주가 있고 총명한데다 아는 것이 넓어 당시의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 삼장(三藏)과 구부(九部)를 해박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손수 천 개의 게송(偈頌)을 쓰고, 낮부터 밤까지는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 이름이 여러 나라에 퍼져서 멀거나 가깝거나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什年九歲隨母渡辛頂河至罽賓遇名德法師槃頭達多卽罽賓王之從弟也淵粹有大量才明博識獨步當時三藏九部莫不該練從旦至中手寫千偈從中至暮亦誦千偈名播諸國遠近師之

구마라집은 계빈국에 이르러 곧 그를 스승의 예로써 존숭하였다. 그에게서 『잡장(雜藏)』ㆍ『중아함경(中阿含經)』ㆍ『장아함경(長阿含經)』 4백만 글자를 배웠다.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매양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을 칭찬하자, 마침내 명성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즉시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外道)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놓고 서로 공격하여 힐난(詰難)하게 하였다.
논쟁이 처음 벌어질 때에, 외도(外道)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아 말투가 자못 불손(不遜)하였다. 구마라집이 틈을 타 기세를 꺾었다. 외도들이 기가 죽어 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고기 한 쌍(雙), 멥쌀과 밀가루 각각 세 말[斗], 소(酥) 여섯 되를 주었다. 이것은 외국(外國)에서는 상등(上等) 공양에 해당한다.
구마라집이 머물던 사찰의 주지(住持)도 이에 비구 다섯 명과 사미(沙彌) 열 명을 보냈다. 비로 쓸고 물 뿌리는 일을 맡겨, 구마라집의 제자같이 하게 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什至卽崇以師禮從受『雜藏』『中長二含』凡四百萬言達多每稱什神俊遂聲徹於王王卽請入宮集外道論師共相攻難言氣始交外道輕其年幼言頗不遜什乘隙而挫之外道折伏愧惋無言王益敬異日給鵝腊一雙粳米麪各三斗酥六升此外國之上供也所住寺僧乃差大僧五人沙彌十人營視掃灑有若弟子其見尊崇如此


나이 열두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龜玆國)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나라에서 높은 벼슬로 그를 초빙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月氏國)의 북쪽 산(山)에 이르렀다. 그 산에는 한 나한(羅漢)이 있었다.
나한은 구마라집을 보자 남달리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항상 이 사미(沙彌)를 지켜 보호해야만 한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굴다(優婆掘多)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율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재주가 밝고 슬기가 찌르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이다.”
至年十二其母攜還龜茲諸國皆聘以重爵什竝不顧時什母將什至月氏北山有一羅漢見而異之謂其母曰常當守護此沙彌若至三十五不破戒者當大興佛法度無數人與優波掘多無異若戒不全無能爲也正可才明儁詣法師而已


구마라집이 나아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頂戴]. 마음속으로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거워졌다.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곧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어린 제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깃들었을 따름입니다.”
什進到沙勒國頂戴佛鉢心自念言鉢形甚大何其輕耶卽重不可勝失聲下之母問其故答云兒心有分別故鉢有輕重耳

마침내 사륵국에 일년 간 머물렀다. 그 해 겨울 아비담(阿毘曇)을 암송하였다. 「십문품(十門品)」과 「수지품(修智品)」 등 여러 품(品)에 대해 묻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두루 그 절묘함을 통달하였다. 또 『육족론(六足論)』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해서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사륵국에 희견(喜見)이라는 삼장(三藏) 사문이 있었다. 그는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미(沙彌)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는 이 사미를 청하여 최초로 설법의 문을 열도록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온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마라집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둘째, 구자국(龜玆國) 왕은 필시 ‘구마라집이 우리나라 출신(出身)인데, 저들이 구마라집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우호(友好)를 교환할 것입니다.”
왕은 곧 그것을 허락하였다. 즉시 큰 모임을 베풀었다. 구마라집을 청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 『전법륜경(轉法輪經)』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과연 구자국 왕은 지위가 높은 사신을 파견하여 두터운 우호에 보답하였다.
遂停沙勒一年其冬誦『阿毘曇』於『十門』『脩智』諸品無所諮受而備達其妙又於『六足』諸問無所滯礙沙勒國有三藏沙門名喜見謂其王曰此沙彌不可輕王宜請令初開法門凡有二益一國內沙門恥其不逮必見勉强二龜茲王必謂什出我國而彼尊之是尊我也必來交好王許焉卽設大會請什升座說『轉法輪經』龜茲王果遣重使酬其親好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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