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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남의 사찰

사명대사와 표충사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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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표충사는 재약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원래 이곳에는 신라 무열왕 1년(654)에 원효대사가 지은 죽림사가 있었는데, 통일신라 흥덕왕 4년(829)에 왕의 셋째 아들이 병으로 고생할 때 이곳의 영정약수를 먹고 병이 나았다고 해서 영정사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숙종 41년(1715)에 다시 지었고, 헌종 5년(1839)에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에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표충사라 하였다.

사명대사( 1544년 10월 17일 ~1610년  음력 8월 26일1, (양력 10월 12일))는 조선 중기의  고승, 승장()이다. 속성은 임, 속명은 규  출자는 이환 호는 송운,당호는 사명당(별호는 종봉 ) 본관은 풍천이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 이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고, 존경의 뜻을 담아 사명대사 라고 부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대광전 (密陽 表忠寺 大光殿)


대광전은 표충사 경내에 있는 절로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며,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이다.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 간격은 공포 간격을 배려하여 같게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목조석가삼불좌상 (密陽 表忠寺 木造釋迦三佛坐像)

표충사 대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이 불상은 석가모니를 주존으로 좌협시 약사여래, 우협시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세여래 존상이다. 준엄한 모습과 당당한 체구에 표현기법이 뛰어난 작품으로 조성 시기는 18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규모가 큰 대작에 속하는 작품이다.

국보
표충사 청동 은입사 향완
(表忠寺 靑銅 銀入絲 香垸)
Bronze Incense Burner with Silver-inlaid Design of Pyochungsa Temple


향완이란 절에서 의식을 행하거나 불단에 올려놓고 향을 피우는데 사용된 공양구이다. 특히 이처럼 완형(盌形)의 몸체에 나팔처럼 벌어진 자리와 원반형 받침을 지닌 형태를 향완이라 불렀다. 경상남도 밀양 표충사에 있는 청동 향완은 높이 27.5㎝, 입지름 26.1㎝의 크기이다. 향완에 무늬를 새기고 그 틈에 은실을 박아서 장식한 은입사(銀入絲) 기술이 매우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작품이다.

향완의 형태는 주둥이 부분에 넓은 전이 달린 몸체와 바깥으로 벌어진 나팔모양의 받침을 갖춘 모습이,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전과 몸체가 닿는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고 받침 둘레의 가장자리에 얕은 턱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었다. 높이나 너비의 비율도 거의 1:1을 이룸으로써 균형잡힌 비례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 윗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6개의 원 안에 ‘범자(梵字)’를 은입사하였으며, 그 사이사이에 구름무늬를 장식하였다. 몸체에도 역시 굵고 가는 여러 선으로 원 안에 굵게 은입사한 ‘범자(梵字)'가 4곳에 배치되어 있다. 받침에는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였는데, 굵고 가는 선을 이용하여 능숙하게 표현된 용의 모습에서 고려시대 뛰어난 은입사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넓은 전의 안쪽 면에는 57자의 은입사로 된 명문을 새겼는데, 내용으로 미루어 고려 명종 7년(1177)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국내에 남아있는 향완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려 향완 연구에 귀중한 편년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원래 이 향완이 있었던 곳이 현재의 표충사가 아닌 창녕 용흥사였음을 알 수 있지만 언제, 어떻게 해서 표충사에 전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보물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密陽 表忠寺 三層石塔)
Three-story Stone Pagoda of Pyochungsa Temple, Miryang


표충사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3층석탑이다. 탑 앞에는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 있으나 이 곳은 탑과 석등이 놓였던 원래의 위치가 아닌 듯하다.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인데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두번째로 크게 확장시켜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다고 전한다. 조선 헌종 5년(1839)에는 그때까지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긴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기단(基壇)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석등 (密陽 表忠寺 石燈)

표충사 경내에 삼층석탑(보물 제467호)과 함께 서 있는 석등으로, 원래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길쭉한 기둥 위에 받침돌,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 지붕돌을 차례대로 올린 일반적인 형태로, 각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윗받침돌은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고,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두었다. 지붕돌은 모서리 부분의 파손이 심하며 꼭대기에는 간략한 구조의 머리장식을 올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등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나, 조각수법과 규모로 볼 때 시대가 조금 뒤떨어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출토 유물 일괄 (密陽 表忠寺 三層石塔 出土 遺物 一括)
Artifacts Excavated from the Three-story Stone Pagoda of Pyochungsa Temple, Miryang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출토 유물 일괄은 1995년 실시된 삼층석탑의 해체보수 과정에서 기단 적심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들 유물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 이르는 20구의 금동불상과 탑에 봉안된 여러 공양물, 석탑의 보수를 알려주는 조선 초기의 <개수기비>(1491년)를 포함하고 있다. 불상 중에는 머리와 대좌 등이 파손되어 완전하지 못한 것도 있으나 출토지가 분명한 곳에서 시기를 달리 하는 많은 불상이 일괄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석탑 내에 사리장엄구 이외 불상을 봉납한 사례는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형식과 양식, 그리고 시대별 층위를 가진 불상이 다량으로 봉납된 사례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드문 경우이다. 또한 이는 통일신라 9세기 대에 건립된 석탑이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실증적 자료이기도 하다.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불상 및 청동탑편, 개수탑기비(改修塔記碑), 상평통보 등은 금동불상 연구와 석탑의 공양의식, 중수사례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밀양 표충사 팔상전 (密陽 表忠寺 八相殿)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석조석가여래좌상
(密陽 表忠寺 石造釋迦如來坐像)

표충사 팔상전 주존으로 모셔진 이 불상은 호분으로 도색된 상태의 석조여래좌상이다. 부분적인 훼손상태는 호분도색으로 후보 하였고 나발, 육계, 승각기의 표현기법과 의습 처리 등 전체적인 균형이 뛰어난 작품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密陽 表忠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본 작품은 현재 박물관 입구 정면에 있는 단독 유리 진열장내에 8각 목조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다. 도금 후 오래서인지 가슴 위의 도금은 전체적으로 아주 미세한 갈라짐이 생겨 있고, 발목아래의 군의, 무릎 등에도 도금이 박락되어 있는 것이 군데군데 확인된다. 또한 오른쪽 발목에서 아래로 목재의 균열이 있다. 오른쪽 손의 검지, 중지, 무명지와 왼쪽 손의 무명지는 파손되어 접합·수리되었다. 손목을 끼우는 안쪽으로 한지를 씌어 손목이 헐거워 빠지는 것을 방지하였으며, 보관을 씌운 후 헐거운 빈 공간에도 한지를 가늘게 말아 고정해 세세한부분까지 정성을 기울였음이 엿보인다.

불상의 복장공은 뒷면 등 가운데에 가로 11cm, 세로 12cm 정도의 복장공이 확인되었으며, 불상저부좌대 가운데에도 원형의 복장공이 마련되어 있었다. 불상밑면좌대의 가장 자리는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며 철심으로 고정되었으며, 원형 복장공도 철심으로 고정되어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목조지장상및석조시왕상 (密陽 表忠寺 木造地藏像 및 石造十王像)


지장보살상은 목조도금, 명부 시왕등의 권속상은 석조 채색으로 조성연대는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묘법연화경의 말미에 戊午라는 간지로 미루어 1858년으로 추정되며, 23구의 동시 조성된 작품이다.

고영정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영정사)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 · 사명대사(四溟大師) · 기허당(騎虛堂) 등 3대사의 충렬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설립되었으며, 1839년(헌종 5)에 무안면 고나리 삼강동에서 현재의 위치인 표충사(表忠寺)의 경내로 이건하고, ‘표충(表忠)’이라 사액되어 표충서원으로 개편되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사명대사 관련 교지
(密陽 表忠寺 四溟大師 關聯 敎旨)

이 문서는 사명대사의 조부모와 부모등 사명대사의 일가에 임금의 명을 담아 내린 교지이다.

이 교지들 가운데 4장은 선조 35년(1602) 10월 30일에 사명대사 일가에 벼슬을 내린 증직교지이고, 나머지 한 장은 선조 40년(1607) 6월 8일에 내려진 교지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분충서 난록 목판 (密陽 表忠寺 松雲大師 奮忠序 難錄 木板)


사원의 배치를 옛날 체제대로 하여 영정사 관음전 자리에 사우를 신축하고 사명대사 원불을 대웅전 대들보 위에 봉안하여 예제문 3칸과 자하문 3칸, 명연루 3칸, 정문(正門)을 짓고 의중당 좌우(左右)를 동·서 재실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명부전(冥府殿) 자리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였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밀양 표충비 (密陽 表忠碑)

무안지서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현재는 돌담이 둘러진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리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특이하게도 비몸은 까만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비문에는 표충사(表忠寺)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내용, 정유재란 이후 선조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 3천여명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조선 영조 18년(1742)에 세운 비로, 이의현이 비문을 짓고,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앞면 윗쪽에 새겨 놓은 비의 명칭은 유척기의 글씨이다.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 ’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사명대사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금까지 전해진 결과라 하여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국가유산 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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