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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28(팔공산,성주,청도)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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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장연 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낙동강 지류로 흐르는 냇가의 낮은 구릉에 동·서로 두 탑이 세워져 있다. 거의 같은 양식을 보여 주는데, 서탑은 일찍이 무너졌던 것을 1979년 12월 원래의 자리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동탑은 현재 아래층 기단이 파묻혀 있어 1단의 기단처럼 보이지만 서탑과 동일하게 2단의 기단을 갖추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 외에도 가운데 부분에 2개씩의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1개의 기둥 모양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의 받침은 각 층 4단씩이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현재 동탑에는 남은 것이 없고, 서탑에만 머리 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대와 복발(覆鉢)이 남아 있는데, 복발은 훗날 보충한 것이다.
기단의 가운데기둥이 아래층에는 2개이던 것이 위층에서는 1개로 줄어들고, 탑신의 지붕돌 받침이 4단인 점 등으로 보아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동탑을 해체하여 보수하는 과정에서 1층 몸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군위 지보사 삼층석탑 /보물

지보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보물 682호)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아담한 모습이다.

기단은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구성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기단의 각 면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고, 기둥 사이에는 무늬를 새겼는데, 아래층에는 사자 모양의 동물상을, 위층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넣었다. 기단을 이루고 있는 돌들이 모두 높아서 다소 우뚝해 보인다. 기단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별도의 판돈을 삽입하여 윗돌을 괴도록 하였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새겨두어 부처님을 모시는 방(감실)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별도의 돌을 얹어 구성한 것으로, 밑면에 새겨둔 4단의 받침이 두꺼워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이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많이 깎여나가고 훼손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쉬움을 느끼게 하지만, 조각 수법이 화려하고 외양이 단정한 고려 전기의 우수한 작품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군위인각사삼층석탑석탑/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실제 사리가 없는 경우에는 상징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경전을 모신 곳이다.
인각사 극락전 앞에 있는 삼층 석탑은 2층 기단(基壇)*과 머리 장식부 일부가 남아 있는 석탑이다. 1층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원래의 모습으로 고쳐 세웠다.
땅바닥 위에 받침돌을 1단 놓고, 그 위에 기단 몸돌과 기단 덮개돌을 올렸다. 1층 기단 덮개돌은 두 장의 널판같이 뜬 돌로 만들었다. 2층 기단 몸돌은 4개의 뜬 돌을 세워 만들었다. 탑의 몸체에 사용된 돌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분되고 각각 다른 부재로 만들었다. 탑 몸돌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이 있다. 북면 2층의 기단 몸돌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의 모양이 달라 다른 용도의 석재를 재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몸돌이 층마다 차례로 줄어드는 비율에 맞춰 줄어들고, 밑면에는 각 4단의 계단식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여러 가지 장식물이 차례로 얹혀 있다. 보륜(寶輪)** 위에는 불꽃 모양의 장식물이 있는데 돌의 재질이 달라 원래의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군위삼존석굴모전석탑/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이 모전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조성한 특이한 형태로써 작자와 유래는 알 수 없다. 본래 3층이었으나, 탑신부에 자생한 소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탑도 같이 무너졌다고 한다. 1949년에 당시 창건주(홍태기)가 주선하여 군위군 우보면 신도들의 힘을 모아 현재 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탑의 전체 높이는 400cm, 기단의 높이는 45cm,?
기단의 한 변은 390cm, 이며 우주*와 탱주*는 약 16cm, 옥개석*에서 정상부까지는 약 165cm이다. 모서리 기둥과 각 면 3개의 안 기둥 및 기단 덮개들이 있으며, 1층 탑신부에는 약 20여 단의 일정하지 않은 직사각형 판석을 쌓았다. 1층 지붕돌의 승급은 3단이며 지붕돌 상면에도 다시 여러 단의 층급을 놓아 점차 체감되게 하였고 다시 그 상부 중앙에 노반* 및 보주*를 배치하였다.
* 우주(隅柱) : 기단석 면석 모서리에 있는 기둥 모양의 양각
* 탱주(撐柱) : 기단석의 면석 중심부에 양각한 기둥 모양
* 옥개석(屋蓋石) : 지붕돌
* 노반(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 보주(寶珠) : 탑의 상륜부에 구슬 형태의 부재
(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군위화본리 오층 석탑/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덕림사 절 내에 있는 화본리 오 층 석탑은 1층 받침돌 위에 5층의 몸돌로 구성되었다. 받침돌은 땅속에 묻혀 있어 맨 윗돌만 드러나 있어서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 탑의 몸돌은 독특하게 2층 지붕돌과 3층 몸돌을 붙여 한 돌로 만들어졌고, 나머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다. 탑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계단식 받침이 있다. 지붕돌의 네 모서리에는 작은 종을 걸기 위한 구멍이 2개씩 뚫려 있다. 5층 지붕돌 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꼭대기 장식 돌만 남았다.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양식상의 변화를 보이고 있어서 고려 시대 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대구 부인사 3층 석탑

부인사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부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한 사찰로 추정되며, 절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승려들만의 승시장(僧市場)이 섰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 탑은 금당터 주변에 쌍탑으로 건립된 2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으로, 1966년에 복원되었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그 받침돌만 남아있다. 기단은 각 면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윗면에 2단의 괴임을 새겨 윗돌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고, 지붕돌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가 흐르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치켜 올라갔다.
통일신라 후기 즈음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법장사삼층석탑/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법장사에 있는 3층 석탑으로, 기단부(基壇部)는 파괴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고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만이 차례대로 쌓여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면마다 양쪽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위층의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보인다. 일부가 손상되어 있는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듯 하나, 탑신의 1층 몸돌이 폭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불안정한 비례를 보이고, 지붕돌받침이 4단으로 줄어있는 등 전형 양식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탑이 있는 이곳은 원래 고산사(高山寺)가 자리잡고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찰은 모두 불에 타고 탑만이 무너진 채 방치되어 오다가 1961년 법장사를 새로이 지을 때 탑도 함께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동화사염불암청석탑 /대구광역시유형문화유산

동화사에 딸린 암자인 염불암 안마당에 서 있는 탑으로, 원래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청석탑이란 벼루를 만들던 점판암을 이용해 만든 탑인데, 이 탑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닥돌 이외에는 모두 이 재질의 돌이 쓰였다.

탑은 3단의 바닥돌 위에 쌓아 놓았는데, 세울 당시에는 기단(基壇)과 탑신부(塔身部)의 몸돌들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10개의 지붕돌만이 포개진 상태이다. 지붕돌은 파손이 심하여 곳곳에 작은 돌을 괴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안쓰럽다. 지붕돌은 밑면에 2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윗면에 느린 경사가 흐른다. 또한 두께가 얇고, 네 귀퉁이에서 곡선을 그리듯 한껏 들려 있어 경쾌한 멋을 이끌어낸다.

지붕돌의 비례는 그리 아름답지 않으나, 넓다란 바닥돌 위에 세워 놓은 작은 규모의 탑으로서 안정감이 느껴진다. 청석탑이 널리 유행하던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연사삼층석탑/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용연사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후대에 새로운 돌로 보수한 상태이며, 기단과 탑신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짧고 처마가 얇은데 비해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이 높직하다.
극락전의 장중한 규모에 비해 석탑의 높이가 2.6m로 너무 작아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조각양식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심원사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가야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원래 무너져 있던 것을, 1989년 새로이 복원해 놓은 것으로, 독특하게도 기단 아래의 땅 속에 사리장치(舍利裝置)를 마련해 두었다.

반룡사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탑은 고려 시대에 유행한 다층석탑으로 3단의 화강암 기단위에 1층의 탑신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점판암으로 만든 옥개석이 다층으로 남아 있으며, 높이는 2.4m이다. 원래 반룡사 경내에 있었으나 현재는 고령읍내 대가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우리나라 석탑은 대부분이 화강석으로 조성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점판암제(粘板岩制) 소형 석탑이 출현한다. 점판암제의 경우는 육각, 팔각 등 다양한 다층석탑이 나타난다. 반룡사의 석탑도 점판암을 연마하여 조성한 소탑이다. 형태는 2단으로 된 방형의 화강석 기단에 다시 사각형의 점판암으로 된 2층의 연화대(蓮花臺)를 두고, 그 위에 옥신을 잃은 옥개석만을 쌓아 올렸다. 점판암의 2층 기단 둘레에는 단판(單瓣), 중판(重辦)의 양각 연화문(蓮花文)을 조각했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받침을 양각했고 옥개 윗면의 경사는 완만한 낙수면을 이루는 등 미려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 이 탑이 있던 반룡사에는 다층석탑 외에 조선시대의 부도 몇기와 비신(碑身)이 없는 귀부일좌(龜趺一座)가 있다.
반룡사는 쌍림면 용리 미숭산(美崇山) 기슭에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이 절에 내린 방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일본 원정에 참가하기 위해 경상도에 온 원나라 군인들이 절에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밝히고 있다.
해인사(海印寺) 원당암(願堂庵) 다층석탑(多層石塔)과 금산사(金山寺) 육각다층석탑(六角多層石塔) 등이 이 유형에 속한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동방사지칠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동방사터에 남아 있는 7층 석탑으로, 원래는 9층이었다고 전한다. 절터는 성주읍내에서 왜관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약 1㎞ 떨어진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이 석탑만 남아 있다.
기단(基壇)의 네 면과 탑신(塔身)의 각 몸돌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문(門)모양을 깊게 새겼다. 1 ·2 ·3층 지붕돌 네 귀퉁이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조각양식이 엿보인다.
탑이 자리하고 있는 성주지역의 지형은 소가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이 때문에 냇물이 성주읍을 돌아 동쪽으로 빠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성주땅의 기운이 냇물과 함께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성주따의 기운을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일명 ‘지기탑(地氣塔)’이라 부르기도 한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선본암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갓바위 부처’로 유명한 관봉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과 선본사 사이의 산 능선상에 자리한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아래·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탑신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가지런히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올라갔다.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멋을 지닌 탑으로, 지붕돌 받침이 5단이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간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성주보월동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무너져 땅 속에 파묻힌 것을 1979년에 복원해 놓은 석탑으로, 바닥돌 위로 2층의 기단(基壇)을 높직하게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본 떠 새겼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은 모서리에만 기둥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의 경사는 비교적 느리게 흐르고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희미하게 위로 들려 있다.
전체적인 양식이나 조각기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법주사오층석탑/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법주사 영산전 앞에 있는 오층 석탑은 고려 시대의 석탑이다.
오층 석탑은 원래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었을 것이나, 현재는 위층 기단과 4층 몸돌, 그리고 지붕돌이 없는 상태이다.
탑의 몸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이상의 몸돌은 크기가 거의 줄지 않았다. 1층과 2, 3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고, 특히 1층 남쪽 몸돌면에는 문 모양을 새기고 안에 자물쇠를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또 모서리기둥과 문틀 옆에는 숙종 17년(1690)에 보광명전(지금의 영산전)을 손질하여 고칠 때 새긴 글씨가 남아 있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깊이 파였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가 우아한 곡선을 그린다. 그러나 5층만은 몸돌에 기둥 모양을 새기지 않았고, 지붕돌의 곡선도 밋밋하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얹어 놓았다.
법주사 오층 석탑은 고려 시대에 세운 탑으로, 일부 석재를 잃어버려 본래의 모습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석탑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
* 기단: 건축물의 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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