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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27(대구,팔공산)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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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동화사 서쪽 언덕에 자리 잡은 비로암의 대적광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3층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의 각 층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기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층마다 4단이며, 처마는 곱게 뻗어 나가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각 기단 위에 괴임을 여러 개 둔다거나, 지붕돌 네 귀퉁이의 들린 정도가 크지 않은 점 등에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는 단정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1966년 부처님의 사리를 담는 기구 일부를 도둑맞았으나, 없어지지 않은 사리돌그릇에 통일신라 경문왕 3년(863)에 민애왕의 명복을 빌고자 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 삼층석탑/보물
동탑

서탑

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먼저 동쪽의 탑은 2단의 기단 대부분이 나중에 보수된 것이라서 돌을 다룬 수법과 끝맺음 처리 부분에서 조화를 잃어버리고 있다.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따로 새겨 쌓아 올렸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올려져 있다.

서탑은 위층 기단의 두 면에 가운데에만 기둥 모양을 새기고, 반대쪽 면의 기둥 사잇돌을 밀어 넣어 그 돌로 모서리기둥을 삼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뜬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돌만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부의 무게중심을 지탱하던 쇠꼬챙이가 솟아 있다. 1957년에 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그 속에서 조그만 탑 99개와 부처님의 사리를 담아두는 장치가 나왔다.

이 두 탑은 부분적으로 없어진 머리장식을 빼고는 조각의 양식이나 끝맺음 수법이 서로 비슷하고, 균형 또한 잘 이루어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기단과 탑신, 그리고 머리장식부의 세부적인 양식에서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보물

불굴사는 신라 신문왕 10년(690)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50여 채의 건물과 12 암자 등을 갖춘 큰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탑은 절 안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린 형식으로 신라석탑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넓고 긴 돌로 탑의 구역을 마련하고, 바닥돌은 사방으로 하나씩 4장의 돌을 붙여서 짰다. 아래층 기단의 맨 윗돌은 꽤 두꺼운 편이며, 돌의 가운데에 2단의 괴임돌을 두었다. 위층 기단의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을 새겼으며, 맨 윗돌은 얇지만 그 아래에 윗돌과 반듯하게 한 단을 붙여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들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짰는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4단씩으로 줄어들었고 추녀밑은 반듯하지만 마무리 부분에서 뚜렷하게 추켜올려져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 역시 완만한 경사를 보이다가 마무리 부분에서의 추켜올림이 상당히 크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있다.

돌의 마무리에서 정연함을 보이고 있어 탑 전체적으로 뚜렷한 비례가 돋보이는 탑이다. 그러나 탑의 규모가 작아진 점이나, 지붕돌의 추켜올림이 지나치게 큰 점, 각 부분의 밑에 새긴 괴임돌의 표현을 강조한 점 등에서 형식적인 면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시기의 탑으로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청도덕양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덕양마을 인근 산기슭에 넘어져 있던 탑으로, 1972년 마을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이 1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2층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몸돌을 덮고 있는 각층의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가벼운 느낌이 들며, 기단에서 기둥 모양의 조각을 모서리에만 두고 면의 가운데에는 두지 않은 점을 제외하면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 이 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영천 신월리 삼층석탑/보물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높이는 4.75m이다.
탑이 세워질 당시의 절의 이름이나 규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며, 최근 이 터에 법당을 짓고 신흥사(新興寺)라 이름 지어 탑을 보존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기와집 모양의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기단은 위아래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 각 면에는 8부 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다. 8부 중상이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으로 석탑에서는 주로 기단에 새기는데, 탑신에 모셔진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사용하였으며,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1층 몸돌에는 4면 모두 문짝 모양의 조각을 새기고 각각 그 안에 자물쇠와 문고리 모양의 조각을 표현해 놓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모두 4단으로 새겼고, 처마선은 수평을 이루나 두꺼워 보인다. 지붕돌 경사면의 네 귀퉁이는 이러한 두터운 지붕돌에 비해 아주 경쾌하게 위로 추켜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1층 몸돌이 큰 것에서 오는 불균형이 있고 각 4면에 모두 조각을 새겨 과장된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나, 당시의 수법만은 잃지 않은 아름다운 작품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영천 화남리 삼층석탑 /보물

옛 한광사의 불전 앞에 동서로 서 있던 쌍탑 중 하나로, 이 탑의 기단석 한 면을 열자 그 안에서 영천 화남리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되었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탑신의 몸돌에는 네 모서리에 각각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은 약한 곡선을 그리며 경쾌하게 표현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각 층의 지붕돌과 몸돌은 하나의 돌로 조각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영천정각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현재는 밭으로 사용되는 자그마한 터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부의 세 몸돌은 각 면마다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 놓았다. 아래층 기단에는 독특하게도 연꽃무늬를 새겨 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끝에서 아주 서서히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만 남아있다.

대체로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연꽃무늬,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그 전형을 벗어나고 있어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칠곡 정도사지 오층 석탑 /보물

원래 경상북도 칠곡군 정도사터에 있었던 5층 석탑으로, 1924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으로 다시 옮겨 세워 놓았다.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3구씩 조각하였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면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겼고 각 기단의 맨 윗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었으며, 윗돌 윗면에 1단의 괴임을 두었는데 특별한 예에 속한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들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의 정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이 새겨져 있고, 2층 이상은 그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너비가 좁고 두꺼우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줄었고 추녀 밑으로 낙수홈이 새겨져 있다. 5층 지붕돌은 없어지고 몸돌 위에 머리장식받침인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체감률이 적고 지붕돌이 좁아 두꺼운 느낌을 주지만, 석탑 표면에 손상이 없고 안상의 조각 또한 깨끗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위층 기단에 탑 이름이 새겨져 있고, 끝에 ‘태평십일년’의 연호 및 연대가 있다. 또 옮길 당시에 탑 내에서 록유사리병·동합 2개 등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특히 함께 발견된 기록문서에는 탑의 인연·시납, 공사의 사실 등을 기재하였고, 글 문투에 이두식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탑 자체의 연구와 아울러 이두 연구에도 좋은 자료이다. ‘태평십일년’은 고려 현종 22년(1031)에 해당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칠곡 기성리 삼층석탑/보물

법성사(法聖寺)터로만 알려진 곳에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은 8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위층 기단에는 둥글고 넓은 장식의 안상(眼象)을 각 면이 다 채워질 만큼 큼직하게 새겨 놓았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마다 모서리기둥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이 5단씩이고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추켜올려져 있으며, 탑 상부의 머리장식 부분은 노반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기단이 2단으로 이루어진 점과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5단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에 안상을 새겨 두었다는 점이 특이하며, 1971년 도굴자들에 의해 윗부분이 부서져 있던 것을 복원하였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대견사지 삼층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비슬산 중턱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이다.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절내의 여러 석재들과 더불어 쓰러져 있던 것을, 1988년에 겨우 복원한 것이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그 위로 기단과 탑신을 올려놓았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둔 것 외에는 거의 꾸밈을 하지 않아 소박하다.

만들어진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하는 9세기 통일신라시대로 추측된다. 오랜 세월 무너져 있었으면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산세를 다스리고 있는 듯한 위엄이 우러난다.



북지장사삼층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북지장사의 대웅전 동쪽에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이다. 북지장사는 고려 명종 22년(1192)에 보조국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그 이후의 역사는 전하고 있지 않다.

탑은 2층 기단(基壇)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이 거의 같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윗면에 약한 경사가 흐르고, 밑면의 받침이 4단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다.

땅속에 묻혀 있거나 주변에 흩어졌던 것을, 1981년 새로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은해사중암암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은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내 암자인 중암암에 위치하고 있다. 암벽 아래에 암석 틈에 붙어서 불당이 있어서 암자 이름이 중암암(돌구멍절)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불당지 한켠에는 불당 창건 때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어골문(魚骨文) 기와 조각이 쌓여 있다.

이 석탑은 높이가 약 3m로, 석탑의 양식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되어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2층 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지대석은 규격을 달리하고 있으나 잘 다듬은 4개의 장대석을 정사각형으로 결합시켜 깔았다. 기단은 2층으로 상·하기단의 각 면석에는 각 면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모두 정육면체로서 층위가 올라갈수록 높이가 낮아지는 것 외에는 동일한 양식이다. 옥개석은 모두 낙수면의 경사가 심하고 우동과 전각(轉角)의 반전이 심한 편인데, 옥개받침은 4단에서 3단으로 줄어들었다. 보륜석은 노반 위에 얹혀 있는데 반구 모양이며, 가운데에는 찰주공(擦柱孔)이 노반에 이어서 관통하고 있다.
탑의 양식은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약화되었고,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심해지고 전각의 반전도 많아진 편이다. 또한 전체 규모가 작아져 장식성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의 조성시기는 이곳 암자의 창건시기와 같이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손상을 입지 않았고 보존이 깨끗하여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은해사거조암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은해사에 딸린 암자인 거조암 영산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위층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갔고, 밑면에 계단모양의 받침을 새겨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천공덕동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동덕사라는 절에 있던 3층 석탑으로, 절이 없어진 후 서씨 문중 소유인 송계정사에 옮겨졌다가 1973년 동네 입구로, 1974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두툼하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두툼하게 조각된 지붕돌 솜씨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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