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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26(전남)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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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봉천리 오층석탑 /보물

오동사터에 서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기단은 아래층 기단이 너무 낮아 마치 바닥돌처럼 보인다. 위층 기단의 남쪽 면에는 승려의 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흥미롭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쌓았는데, 1층 몸돌만은 4장의 판판한 돌을 사방으로 세워 구성하였다. 각 층의 몸돌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본 뜬 조각이 보이며,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은 눈에 띄게 작아져 있다. 지붕돌은 전체적으로 두터워 보이며, 밑면의 받침을 3층까지는 5단을 유지하다가 4·5층은 4단으로 줄어들어 일정하지 않다.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위로 치켜 올려져 있어 시원스럽다.

절을 창건할 당시에 함께 세워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위층 기단에서의 독특한 조각이 돋보이고, 전체적으로 좋은 상태로 남아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보성 우천리 삼층석탑 /보물

벌교와 보성간의 국도변인 우천리 마을 앞 논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이 곳은 절터로 추정되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징광사에 딸린 부속 절이 있던 곳이라 하기도 한다.
탑은 기단(基壇)의 일부분이 땅 속에 묻혀 있고, 바닥은 시멘트로 발라져 밑부분의 정확한 모습을 알 수 없다. 드러난 기단부에는 기둥을 본뜬 조각이 새겨져 있다. 탑신(塔身)은 3층을 이루고 있으며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아주 얇게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놓은 것이 보인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고, 처마 밑은 수평을 이루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 있다.
1970년에 해체하여 복원한 것으로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의 비례가 잘 맞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 /보물

담양읍에서 순창 가는 길을 따라 1㎞쯤 가다 보면 넓은 평지가 전개되는데 절터의 흔적은 없고 들 가운데에 이 석탑만이 서있다.

탑은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은 다른 탑에 비하여 높이가 매우 낮아 특이하고, 기단 맨윗돌의 너비가 1층 지붕돌의 너비보다 좁은 것 또한 특이한 양식이다. 탑신은 알맞게 체감되어 안정된 느낌이며, 2층 이상부터는 몸돌을 받치는 두툼한 괴임을 새겨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은 두껍고 처마는 경사졌으며 네 귀퉁이는 가볍게 들려있다. 또한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음직한 구멍이 있어 초창기의 장식적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백제의 옛 땅 안에 위치하고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담양 개선사지 석등 /보물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나주송제리오층석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2층 기단(基壇)을 쌓고 그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기단은 아무런 조각 장식이 없는 단조로운 모습이다. 홀쭉하고 높아 안정감이 없어 보이는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돌로 쌓아 올렸다. 1층 몸돌은 지나치게 크고, 2층은 급격히 낮아졌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에서 4층까지는 3단, 5층은 2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며, 네 귀퉁이는 높이 치켜 올라갔다.
간결하면서 단정한 이 탑은 지붕돌받침이 4∼2단으로 일정하지 않고, 처마의 네 귀퉁이가 많이 올라간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이 탑은 절 안의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露柱)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탑을 받치는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은 2단으로, 아래층 기단은 무늬없는 석재로 구성된 소박한 모습이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인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다.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다. 탑신(塔身)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둘렀으며,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을 조각하였다. 몸돌 위에는 1장의 판돌이 있는데, 밑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고 윗면에는 반구형의 돌이 솟아 있다.
위층 기단을 네 마리의 사자를 이용하여 만든 것은 이곳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이나, 조각수법은 이에 못미처 이보다 훨씬 뒤인 9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광양성황리삼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이 석탑은 2층 기단(基壇)을 쌓아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 ·위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의 돌로 쌓아 올렸으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고, 윗면에는 급한 경사가 흐른다. 3층 지붕돌 위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차례로 얹혀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고려 후기에 만든 것으로 짐작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고흥상림리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풍양면사무소 정원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인근 야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원래는 기단부(基壇部) 전체와 탑신(塔身)의 세 지붕돌만 남아 있었으나, 1990년 몸돌과 머리장식을 새로이 만들어 복원해 놓아, 1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 한쪽 면에는 탑을 세울 당시 함께 새겨둔 기록이 남아 있어 탑을 만든 시기를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기단 윗면의 탑신을 괴어두는 부분에는 연꽃무늬가 있는데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새로 만든 탑신의 세 몸돌은 각각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 떠 새겼다. 매우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가운데에서 직선을 그리다 양끝에서 살짝 들려 있다. 특히 처마 아래로는 물 흐름을 끊는 홈을 파두어 이끼가 끼는 것을 막고자 하였는데 보기드문 기법이다.

기단에 새긴 기록을 통해 고려 현종 12년(1021)에 세웠음을 알 수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전라남도 고흥군 풍양면 상림리에 있던 삼층석탑을 2017년 고흥분청문화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보물

금곡사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나, 기단과 탑신의 여러 군데가 갈라지거나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에 두터운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마다 판돌을 끼워 두었는데 그 중 한 면에는 판돌이 없이 작은 돌들로 채워져 있다. 이렇게 모서리기둥을 본떠 새기지 않고, 직접 세운 것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에서도 볼 수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각 면마다 감실(龕室)을 팠는데, 목탑에서의 감실은 불상을 모셔두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으나, 석탑에서는 이처럼 형식적인 조각만 하게 된다. 두툼한 지붕돌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밑면에는 6단씩의 받침을 두어 장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백제양식이 보이는 고려시대의 탑으로 기단에서 3층 탑신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규모를 줄여 안정된 비례를 보이는 점이나, 각 부분에 짜임새가 있는 점에서 이 탑의 우수함을 엿볼 수 있다. (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보물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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