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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25(전남)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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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대흥사만일암지 오 층 석탑/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만일암 오 층 석탑은 두륜산 정상부인 만일암지(挽日庵址)에 조성된 석탑이다. 만일암지는 현재 암자가 자리했던 것을 알게 해주는 터와 오 층 석탑이 남아 있으며 석등 부재와 연자 맷돌, 아물지, 석재 등이 흩어져 있다.
약 5.4m 높이의 이 탑은 무너졌거나 도굴된 흔적이 보이고 있으며, 상륜부는 남아있지 않고 석등의 상대석과 옥개석을 올려놓은 상태이다. 또한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1석씩인데 1층 탑신에만 2석이 포개져 있다. 탑의 형태 등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고려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탑에 대한 기록은 「만일암지」의 「만일암실적(挽日庵實蹟)」에 암자의 마당 가운데에 7층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처음에는 7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만일암은 두륜산 가련봉(加年峰) 아래에 있으며 대둔사의 여러 암자 중에 지세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고기(古記)에 의하면 그 창건이 가장 먼저이며 여기서 대둔사가 시작된 터’라고 「만일암실적」에서 말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해남대흥사북미륵암동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두륜산 정상 아래의 북미륵암에 있는 탑으로 3.6m 높이의 이 탑은 자연석 위에 인공적으로 손바닥 형태를 조성한 바위를 지대석으로 하고 있다. 3층 옥개석이 결실된 채 남아 있었으나 1995년 북암 요사채 중수와 함께 원형대로 복원되었다.

이 탑은 각 부분의 형식이 ‘북미륵암삼층석탑’(보물 제301호)과 흡사하여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흥사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3구의 금동불상이 1970년 바로 이 탑에서 발견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전형을 따랐지만 각 부재의 짜임 방식이나 간략화된 양식 등이 고려시대 석탑으로 이행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은 2중 기단 위의 3층의 옥개석을 지닌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북미륵암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가 마치 바다의 게와 같은 형국이라 게의 왼발과 오른발에 해당하는 곳에 석탑을 세우고 땅의 기운을 눌러 게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진도 금골산 오 층 석탑/보물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해월사(海月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절에 속했던 석탑으로, 지금 자리한 곳이 원래의 위치로 짐작된다.
1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은 4장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아 두껍고 밋밋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양식은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좁고 기형적으로 길고 높은 매우 특이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상당히 넓고 두꺼워 불안정한 느낌을 주며, 각 층 지붕돌의 모습에도 차이가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 또한 1·2·4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 5층은 3단으로 정형화된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모습이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에는 구슬 모양의 장식만 있을 뿐 다른 부재는 없다.
이 탑의 기단부와 1층 몸돌은 매우 길게 조성되어 은선리삼층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부여 정림사지 오 층 석탑을 모방한 백제 양식이 국토의 최남단 섬에까지 퍼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각 부분의 양식이 독특하고 불규칙적인 면이 많아 탑 양식에 지방색이 많이 드러나게 되는 고려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장흥 천관사 삼층석탑 /보물


천관사는 신라 진흥왕 때 통령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천관보살을 모셨다 하여 천관사라 하였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왜구의 칩입을 여러 차례 겪은 탓에 그 규모가 점차 축소되어 현재는 천관보살을 모셨던 법당만 남아있다. 법당에서 조금 떨어진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올려진 고려시대의 탑이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본떠 새겨두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쌓아 올렸으며, 층마다 몸돌의 모서리에 기둥 형태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게 4단씩이고, 윗면에 흐르는 경사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완만하며, 네 귀퉁이에서는 경쾌하게 치켜올라 세련된 느낌을 준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둥그런 복발(覆鉢)이 한돌에 새겨져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알맞아 안정감이 느껴지며 단아함을 풍긴다. 기단 각 면의 가운데기둥이 생략되고, 지붕돌의 받침이 얇아져 퇴화된 수법을 보여주는데, 이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시대가 바뀌면서 일부 양식이 지방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이 탑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장성 내계리 오 층 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천 방사터에 서 있는 석탑으로, 1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았다.
기단의 네 면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그 위의 맨 윗돌은 마치 탑신의 지붕돌과 그 모습이 비슷하여 시선을 모은다. 즉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약하게 들려 있으며, 경사가 급한 윗면의 네모서리가 굵게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의 다섯 몸돌에는 기단에서처럼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불안정한 비례를 보이고 있어, 고려말·조선초에 세운 탑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 /보물

용암사는 기암괴석이 많아 남쪽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구정봉 아래 있다. 300평에 가까운 부지에 수많은 기와조각들과 주춧돌이 남아 있어 건물이 있던 자리임을 알게 한다. 1955년 ‘용암사’라고 쓰인 기와가 출토되어『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용암사’ 임을 알게 되었으나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중심 건물터 남동쪽에 있는 이 탑은 일명 ‘탑봉’이라 불리는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었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둘레에 구역을 조성한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두었다. 기단의 윗면에는 높직한 괴임 2단을 별도의 돌로 끼워 두었는데, 이 가운데 1매가 없어져 1966년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이 보충해 놓았다. 탑신의 1층 몸돌은 2매의 돌로 구성하였고, 2·3층 몸돌은 각각 1매로 하였으며,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1·2층은 2매로, 3층은 1매로 구성하였으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 역시 1층은 5단, 2층은 4단, 3층은 3단을 두어 한 단씩 줄어들고 있다. 윗면 모서리는 석탑에서는 흔치 않게 두툼하게 표현하였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1966년 무너진 석탑을 다시 세울 때, 아래층 기단에서 백자사리호 1점, 금동보살좌상 1점, 청자대접 1점, 사리 32와, 철편 11점 등이 발견되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보물


이 흥사(利興寺)의 옛터에 남아있는 3층 석탑이다. 이 흥사의 창건시기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인 18세기경까지 그 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다른 돌로 조성되었으며, 지붕돌은 두텁고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다.
1995년 탑을 해체, 보수할 때 땅 속에 묻혀있던 아래층 기단이 지상으로 드러나면서 본래의 모습을 찾게 되었다. 고려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에 새겨진 가운데기둥의 수가 아래층에 2개, 위층에 1개로 되어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안읍리삼층석탑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탑으로, 탑이 속했던 절의 구체적인 역사는 전하고 있지 않다. 탑은 1층 기단(基壇) 위에 탑신부(塔身部)를 세우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조각을 가지런히 새겨 넣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 한돌로 이루어졌으며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알맞게 줄고 있어 안정감을 준다. 두꺼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이는 파손된 석재가 놓여있다.
기단이 1층인 점과 가운데기둥조각이 생략된 점, 두꺼운 지붕돌, 4단의 지붕돌받침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순천 금둔 사지 삼층석탑



낙안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약 2km 떨어진 금전산의 무너진 절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금전산에 금둔사가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 절터를 금둔사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는 조그마한 암자가 지어져 금둔사의 명맥을 잇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과 8부 중상(八部衆像)을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고, 특히 1층 몸돌의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을, 양 옆면에는 불상을 향하여 다과를 공양하는 공양상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씩이고, 처마는 평평하며, 낙수면은 완만하게 경사지다가 네 귀퉁이에서 힘차게 치켜올려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양식을 갖추고 있어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1층 몸돌에 공양상이 새겨져 있는 점은 특이한 예이며, 각 부의 비례도 좋고 조각수법이 세련된 석탑이다. 탑의 뒤편에는 석불입상(石佛立像)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연관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순천 동화사 삼층석탑/보물



동화사의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밑부분인 기단(基壇)이 땅속에 거의 파묻힌 채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땅 위로 드러난 기단의 맨 윗돌은 4장의 돌로 짜여 있으며 경사져 있다. 탑신은 모두 지붕돌과 몸돌이 각각 한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모두 3단씩이나, 높이의 차가 심해서 형식화된 느낌을 준다. 또한, 지붕돌 네 귀퉁이의 옆면을 급하게 깎아 지붕돌 전체가 무거워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寶蓋:지붕모양의 장식) 등이 거의 온전히 남아있다.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각 부분의 표현이 약해지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도 3단으로 줄어드는 등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탑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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