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江華 長井里 五層)보물
이 탑은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으며, 가람을 배치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은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보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석탑이다. 수종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1459)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며, 이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모이는 양수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에 옮겨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나 북한지역 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과 같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층,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1493)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구(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구)와 인목대비(정의대왕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보살상들, 숭정원년(1628)에 화원[조각승] 성인(性仁)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대좌바닥에 명문음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형태는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이 올려져 있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額)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眼象)을 표현하였다.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연판(蓮瓣)에는 고려중기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隅柱)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은 목조 건축을 석재로 옮긴 모습을 잘 나타낸다. 정상부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려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출토된 사리장엄과 명문을 볼 때, 건립연대는 늦어도 1493년에 건립된 이래 1628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 발원의 석탑임도 확인된다. 또 양식을 보면 기단부는 불상대좌의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며, 상륜부는 팔작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 조선시대 유일의 팔각오층석탑으로서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하남 동사지 5층석탑/삼층석탑/보물
하남 동사지 5층석탑/삼층석탑/보물
1.오층석탑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있는 5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檀)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는데, 남쪽 면이 부서져 있어 그 안쪽으로 커다란 기둥돌이 들여다 보인다. 이 탑의 특징은 탑신부에서 드러난다. 첫층 몸돌이 2단인데, 아랫단을 4개의 네모난 돌로 두고, 그 위에 1장의 돌을 얹어놓았다. 이러한 예는 (전)광주 성거사지 오층석탑(보물)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이다. 지붕돌을 구성하는 돌 역시 1∼3층은 4장, 4층은 2장, 5층은 1장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5단, 2∼4층은 4단, 5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러한 구성은 탑신부가 위로 갈수록 강하게 체감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지붕돌 아래는 수평을 이루어 반듯하며, 경사는 완만하면서도 네 귀퉁이 선이 뚜렷하게 치켜올려져 있어 경쾌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이 남아 있다.
구조상 불규칙적인 면이 많지만, 각 부분의 끝맺음마다 규칙성이 느껴지고, 탑신의 비례도 조화로운 우수한 작품이다. 지붕돌 모서리의 치켜올려진 정도나 기단을 2단으로 구성한 점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양식의 전형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지붕돌 받침수가 3∼4단으로 줄어든 점이나, 기단의 가운데에 새긴 기둥의 수가 줄어든 것 등으로 미루어 고려 전기인 1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2.삼층석탑
경기도 광주 춘궁동에 있는 3층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檀)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의 바닥돌과 아래층 기단의 가운데돌은 한돌로 짜여졌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땅속에 파묻혀 있고, 아래층 기단 맨윗돌 일부가 깨지고 없어졌다. 윗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아래면이 반듯하고 윗면도 완만한 경사를 보이지만, 지붕돌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뚜렷해 경쾌한 느낌이다.
이 탑은 1층 탑신과 2·3층 탑신의 크기가 줄어드는 비율이 따라 지붕돌도 작아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매우 안정된 느낌을 주고 있다. 탑의 세부적인 양식도 신라 후기 석탑의 전형적인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중기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1966년 보수공사를 실시할 때 탑 안에서 곱돌로 만든 소탑(小塔)들이 발견되었다.
의정부회룡사오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높이 3.3m로, 1950년 한국 전쟁 기간에 폭격을 맞아 상륜부와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일부가 파괴된 것을 1979년 원형을 근거로 하여 복원하였다. 기단부는 석재 1매를 가공하여 3단으로 나누어 하층 기단 측면에 방광 4개와 안쪽에 안상을 새기고, 윗면에 면마다 5개와 가장자리에 각각 1개씩의 복연 총 24개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은 상·하대석과 같은 높이로 가장자리가 둥글게 처리된 우주와 탱주 2개를 새겨 3면으로 구획하고 있다. 상대 기단석 역시 하대 기단석과 동일하게 2단으로 처리하였는데, 하대석과 반대로 위에 3개의 방광 내에 안상문을, 아래에 24개의 앙련(仰蓮)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유형의 기단은 ‘청원사 칠층석탑’ 등 조선 초에 유행하는 양식으로 수미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부의 각 모서리를 둥근 우주로 처리하여 목조건축의 기둥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1층 탑신은 각 면을 2개의 탱주로 구획했다. 1층 옥개석 층급은 2단으로 목조건축의 주두(柱頭)까지 모각하였다. 2층 탑신석은 훼손되어 새로 만들어 넣었다. 기단부의 안상, 연판문 장식, 옥개석과 탑신부의 짜임새 등에서 1493년에 제작된 ‘수종사 팔각 오층 석탑(八角五層石塔)’과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묘적사 팔각 다층 석탑’과 유사성이 발견된다. 이로 미루어 보나 이 석탑은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 /보물
원래 창리지역 과수원 안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그 느낌이 독특하다.
아래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윗돌에는 엎드린 연꽃 모양의 조각을 둘러 놓았는데,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독특한 수법으로 돌을 올려놓고 있다. 즉 1층의 몸돌만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고, 이후 지붕돌부터는 윗층의 몸돌과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모자 형태의 돌 3개를 얹어놓은 듯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며, 추녀는 매우 두껍고 귀퉁이 끝의 들림도 희미하다.
각 부분의 재료가 두툼하여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며, 아래기단의 안상이나 3단의 지붕돌 밑면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각수법도 엉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각 하나의 돌로 쌓는 등 간략한 모습들도 여기저기 보이고 있어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안양증초사지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원래 당간지주에서 동북쪽으로 약 60m 떨어진 지점의 사역 중심공간으로 추정되는 곳에 무너져 있었는데, 1960년 유유산업이 들어서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기단은 단층으로 지대석은 판석형 석재를 여러 매 결구하여 마련하였다. 그 위에 각형 2단의 별석(別石) 받침을 높게 두었는데, 고려 시대 석탑에서 채용된 수법을 보인다. 면석(面石)은 4매의 석재를 결구하였고, 우주(隅柱)는 좁고 낮게 모각(模刻)하였다. 갑석(甲石)은 2매의 석재를 결구하였는데, 하부에 갑석 높이보다 낮은 부연을 마련하고, 상면에도 낮게 탑신받침을 두었다. 단층기단이면서 면석이나 갑석 부연 등에서 간략화의 경향을 보이며, 전체적으로 고려 시대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성행한 석탑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탑신석은 1층만 남아있는데, 기단부나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의 너비에 비하여 좁게 치석했고, 양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2층까지 남아있는데 전체적으로 비례가 우수하다. 옥개받침은 1층과 2층은 4단이고, 3층은 규모가 축소되면서 3단으로 치석하였다. 처마부는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전각부가 파손됐지만 반전(反轉)을 확인할 수 있다. 낙수면(落水面)은 수평으로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탑신석 규모가 옥개석과 기단에 비해 소형이며, 옥개석 낙수면의 형식화 등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여주 하리 삼층석탑/보물
원래는 하리지역의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창리의 3층석탑과 함께 현재의 터로 옮긴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은 모습이다.
기단은 4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그 윗돌 중앙에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2단의 테두리 조각을 둘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각 면 모서리마다 얕은 기둥 형태의 조각이 나타나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귀에서 위로 약하게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의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 전기보다는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을 옮겨 세울 당시, 1층 몸돌에서 독특한 모습의 사리홈이 발견되어 흥미를 끌고 있다. 즉, 몸돌 윗면의 중앙에 높이 3㎝의 얇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2개의 구멍이 파여있는데, 이와 닿게 되는 지붕돌의 밑면에도 이를 배려한 듯 홈이 깊게 파여져 있다. 이는 몸돌의 윗면에만 깊은 홈을 두어 사리를 담아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국보)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화성 용주사 삼층석탑
용주사 주변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장전(地藏殿) 뒤쪽 마당을 거쳐 효행박물관 전면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했다. 전체 높이는 4.5m이며,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오층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우고 상륜부를 설치했다. 기단은 지대석 위에 대형의 사각형 하대석을 놓고 중대석과 상대석을 결구했다. 하대석 각 면에는 안상(眼象) 문양을 3구씩 조각했다. 면석 한 면에는 위패(位牌) 형태 문양을 조각했다. 기단 갑석은 상면에 완만한 낙수면을 표현했고, 중앙부에는 1단의 낮은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을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탑신마다 우주를 새겨 놓았다. 초층 탑신석에는 전ㆍ후면에 문비(門扉)를 새겨 놓았으며, 5층 탑신은 나중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중 1∼3층의 옥개받침은 4단, 4층은 3단으로 조성하였으나, 5층은 목조건축의 서까래와 귀포의 결구(結構)를 양각해 놓은 모습이다.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하며 네 귀퉁이는 선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고,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5층 옥개석과 한 돌로 구성하였는데, 둥근 평면의 노반 위에 복발과 보주를 아래서부터 차례로 조각했다. 탑신석과 옥개석의 양식, 치석 수법, 체감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시흥문원리삼층석탑/경기도 문화유산자료
현재 보광사 경내에 건립되어 있다. 석탑의 명칭은 과거의 보광사 주소지가 시흥군 과천면 문원리였던 데서 명명된 것이다.
이 석탑은 단층 기단과 3층 탑신을 갖추고, 시멘트로 된 1단의 기단 위에 놓여 있다. 기단 하대석에는 각 면 2구씩 장방형의 액(額)을 형성한 후 내부에 안상(眼象)을 조각했다. 기단 중대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를 모각했다. 중대 면석은 흡사 탑신석과 가깝게 치석(治石)되어, 다른 석탑의 탑신석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갑석(甲石)은 하면에 부연을 생략해 편평하지만, 상면에는 3단의 받침이 있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과 옥개석(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는데, 3층 탑신과 2·3층 옥개석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강하였다. 각 층의 탑신석에는 양 우주를 얕게 모각했고, 초층 탑신의 1면에는 이중으로 음각된 문비(門扉) 내에 자물쇠가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의 아래에는 얕게 조성된 3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부에 이르러 급하게 반전(反轉)되었다. 옥개석 위의 합각선(合角線)은 둔중하여 전체적으로 평박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그 위에 각형 1단의 받침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3층 옥개석의 위에는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기단의 형태와 옥개석 양식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제작된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신창리삼층석탑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신창리 삼층 석탑’은 봉국사(奉國寺)로 추정되는 절터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1991년에 복원한 고려 후기의 석탑이다. 약 2.18m 높이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형식으로, 하층기단은 일부 부재(部材)만 남아 있는데, 면석 모서리와 중앙부에 측면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모각했다.
상층기단은 넓은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고 탱주 없이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했다. 갑석은 네 모서리에 합각선을 표현했고, 완만하게 낙수면을 형성하였다.
탑신에는 우주를 조각했는데, 석탑 복원공사 당시 탑신의 1층 몸돌의 윗면에서 사리를 봉안했던 원형 사리공(舍利孔)이 발견되었다.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은 밑면에 통일 신라 석탑과 달리 층급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어 옥개석 두께가 얇아지고 낙수면(落水面)의 경사가 완만하다. 처마선을 따라 전각(轉角) 부에는 매우 낮게 반전(反轉)을 표현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려 시대는 석탑 건립이 증가하면서 단층 기단이 유행했는데, 신창리삼층석탑이 이중 기단으로 건립된 점은 경기도 지역 고려 석탑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기단부 석재의 치석 기법과 옥개석 표현의 위축 등을 통해 고려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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