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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19(강원)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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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거돈사 옛 절터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형태로, 기단을 이루는 밑돌·가운데돌·맨 윗돌이 각각 4매로 이루어진 특징이 보인다. 위층 기단은 남·북쪽에 무늬 없는 긴 돌만 세우고 동·서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돌을 끼워 맞춘 방식이다. 즉, 남·북쪽에서 보았을 때 동·서면에 세운 석재의 두께가 자연스럽게 기둥 모양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5단의 밑받침을 둔 지붕돌은 두꺼우면서 경사면의 네 모서리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처마는 직선을 이루는데 끝부분에서의 들림이 경쾌하여 통일신라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놓인 연꽃 모양의 보주(寶珠)는 최근에 얹어 놓은 것이다.

탑의 조성연대는 2단을 이루는 기단구조와 기둥 모양의 새김, 5단의 지붕돌 받침 등의 수법으로 보아 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절 터에 있는 민가 우물가에는 탑 옆에서 옮겨왔다는 배례석(拜禮石:탑 앞에 놓여 예불을 드릴 때 향을 피우던 곳)이 놓여 있다.

강릉 용연사 삼층석탑/강원도 유형문화유산자료

龍淵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로, 1650년 인조(仁祖) 때 도승(道僧) 옥잠(玉岑)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왕침대사(王葴大師)가 응봉산 동쪽 용연동 만월산(萬月山)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1950년 한국전쟁 때 全燒되었다가 한 女僧의 盡力으로 중건되었다. 『東國與地勝覽』과 『輿地圖書』등 朝鮮時代 문헌에는 기록이전혀 없어 정확한 창건연대와 내력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江陵邑誌인『增修臨瀛誌』寺刹條에 <龍淵寺在府北三十里二十間…有僧玉岑經始此寺云>이라고 하여 順治年間(1644년 경)에 승려 옥잠이 처음으로 이 절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 석탑은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원래는 2기의 雙塔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허물어져 주변에 흩어졌던 부재를 다시 모아 1기의 석탑으로 조립한 것이다.

강릉 등명사 오 층 석탑/강원도 유형문화유산

락가사(洛伽寺) 경내에 서 있는 5층 석탑이다.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푸른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이 절은 원래 등명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무늬와 함께 석재의 일부 모서리를 곡선으로 처리하여 부드러움을 주고 있다. 기단 위에는 오밀조밀한 5층의 탑신이 쌓여 있는데, 지붕돌의 밑면의 받침과 네 귀퉁이에서의 추켜올림이 장식적인 효과와 함께 정적인 탑신에 운동감을 불어넣어준다. 1층 몸돌에 도드라지게 새긴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 조각은 목탑에서 이곳에 직접 불상을 안치하던 수법이 퇴화된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이 남아있다.

기단부의 구성 및 조각수법, 지붕받침 수, 퇴화된 감실의 표현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폭이 좁고 아담하여 동시대의 다른 조형물과는 구별되는, 색다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삼화사 삼층석탑 (보물 제1277호))
삼화사에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비교적 높아 보이는 기단은 각 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의 맨 윗돌에는 별도의 탑신 괴임돌을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번갈아 쌓아 올렸는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규모가 서서히 줄어든다.
여러 군데에 금이 가 있고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대체로 잘 남아있고 균형이 잘 잡힌 단아한 모습이다. 기단의 구성이나 별도의 석재로 탑신괴임을 둔 점 등으로 미루어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4월 대웅전 앞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해체하여 복원하였는데, 이때 위층 기단 안에서 나무 궤짝이 발견되었다. 그 안에는 곱돌로 만든 소형탑 25기와 청동제 불대좌조각 2점, 철조각 6점, 문서를 기록한 종이 1매 등이 들어있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보물


신복사의 옛 터에 남아있는 탑이다. 신복사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즉 신라의 한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셨는데 곧 아이를 배어 낳게 되었다. 집안사람들이 아이를 내다 버렸으나, 아이의 주위로 빛이 맴돌아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 길렀는데, 그 이름을 범(梵)이라 하였다. 범이 출가하여 승려가 된 후 고향에 돌아와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기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탑은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모양의 조각을 하여 둘렀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 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 끝은 추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3단이다.

꼭대기에는 드물게 머리장식이 온전히 남아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앞쪽에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두 손을 받치듯이 들고 있는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이 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강원도 내의 평창 월정사 팔각 구 층 석탑(국보)과 비슷하여 이 지방의 특색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 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자주 보이는 모습 중 하나이다. 또한 아래층 기단에 안상이 새겨진 것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3단으로 되어있는 점도 고려 전기의 석탑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흥법사 터라고 전하는 밭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흥법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지던 거대한 사찰로, 원래 탑 외에도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 등이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반출되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층 기단의 윗면은 경사져 있고,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하였다.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시고 있는 탑신은 기단에 비해 너무 작은 모습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놓았으며, 1층 몸돌에는 네모난 문비가 새겨져 있고 문비 안에는 마멸이 심한 문고리 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은 두꺼워 보이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가에서 살짝 위로 들려있어 고려시대 석탑임을 잘 드러낸다. 탑의 머리 부분에는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만 남아 있으나 그 마저도 많이 손상되어 있는 상태이다.

기단과 탑신의 불균형이 눈에 띄며, 돌의 구성이나 조각수법이 소박한 점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춘천 칠 층 석탑/보물

춘천 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탑이다. 조선 인조 때 이곳의 현감이었던 유정립이 인조반정으로 파직당하고 낙향하여 이 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하여, 충원사 내에 속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국전쟁 때 심한 손상을 입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데다 기단의 일부가 지하에 파묻혀 있었는데, 지난 2000년에 시행된 전면적인 보수공사로 기단부의 제 모습을 찾게 되었다. 이 석탑은 아랫부분을 발굴 조사한 결과 2층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놓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위층 기단도 탑몸돌에 비하여 제법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맨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널판돌을 놓아 1층 탑몸돌을 괴고 있다. 7층에 이르는 탑신(塔身)은 위로 올라가면서 그 크기가 적당히 줄고 있는데, 기단이 넓은 것에 비해 몸돌이 작아 주목되지만 7층이나 되는 높이가 비례의 불균형을 보충하여 오히려 안정감을 준다. 느린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3층까지가 6단이고 4층 이상은 5단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 고려 중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진 상태여서 아쉬움을 주고 있고,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거의 파손된 상태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울진 구산리 삼층석탑 /보물



경북 울진군 구산리에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각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약한 경사가 있으며, 네 모서리의 선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길고 네모난 윤곽이 새겨져 있으나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얇으며 수평을 이루는 처마선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이 잘 나타나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일부 조각 등이 생략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횡성신대리삼층석탑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

봉복사 절입구의 산기슭 밭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 이웃 주민들에 의하면 원래 이 터가 봉복사의 자리였다고 전해들었다 하는데, 이로 보아 이 밭 일대가 고려시대의 옛 절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기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에만 기둥모양을 조각해 놓았는데, 탑신부의 각층 몸돌 역시 그러하다. 지붕돌은 모두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경사가 완만한 낙수면은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도 거의 없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큼직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기단부분과 지붕돌의 모습들로 보아 이 탑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 보물

물걸리 절터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다. 절터에 남아있는 많은 유물들로 보아 이전에는 이곳이 상당히 큰 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세운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2층은 5단이나, 3층은 4단으로 줄어들었다. 경사면은 평평하고 얇으며, 모서리선이 뚜렷하여 끄트머리에서의 들림도 날카롭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는 노반(露盤)만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탑이나, 기단 각 면의 가운데기둥이 하나로 줄어든 것이라든지, 3층에서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 아래층과의 조화를 이뤄내지 못한 점 등으로 보아 시대가 조금 떨어지는 9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보물

원래 두촌면 괘석리에 있던 탑으로, 현재의 자리인 홍천 군청 안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서 있던 원래의 위치는 일대가 절터였을 것이나, 지금은 밭으로 변하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4마리의 돌사자가 있어 4사자탑(四獅子塔)이라 부르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안에 꽃무늬조각이 장식되어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위층 기단에는 각 모서리에 돌사자 1마리씩을 두어 넓적한 윗돌을 받치게 하였는데, 이 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중앙의 바닥과 천장에는 연꽃받침대가 놓여 있어, 원래는 이곳에 불상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새겼고, 가파른 경사면 탓인지 얇고 밋밋하다. 네 귀퉁이는 살짝 젖혀져 뾰족하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곳곳에 파손된 부분이 있고, 닳은 흔적이 보이나 대체로 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기단에서 보이는 안상 조각수법과 돌사자, 연꽃받침 및 지붕돌의 3단 받침 등에서 고려시대의 양식을 물씬 풍기고 있다. 각 재료의 구성이 통일신라의 방법을 많이 따르고 있지만 고려시대 중기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화천 계성리 석등 보물



계성리 마을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이다. 이 마을에는 계성사(啓星寺)의 옛터가 있으며, 절터에는 쓰러진 석탑의 일부와 종모양의 부도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석등은 일제 때 절터에서 약 200m밑으로 강제로 옮겨진 것으로 정확한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에는 8각, 고려시대에는 4각인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 독특하게 6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래받침돌은 거의 묻혀 있어 윗부분만 보이며, 가운데받침돌은 원통형의 기둥에 띠를 두른 것으로, 띠를 이루는 부분에 각종 무늬를 새겨 놓았다. 원통형의 기둥은 고려시대 석등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나, 그 모양이 전라도 지방에서 유행했던 장고 모양을 닮아 있어 흥미롭다. 화사석은 특히 주목되는 부분으로, 6개의 돌을 세워 6각을 이루게 하였다. 각각의 돌은 좌우를 반타원형으로 깎아낸 것으로, 옆돌과 맞추어져 6개의 타원형 창이 만들어 졌다. 지붕돌은 각 귀퉁이선이 뚜렷하고 추녀 위로는 꽃조각이 작게 돌출되어 있어 멋스럽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는데, 지나치게 커서 아래를 누르고 있는 듯 하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현재까지 알려진 6각형 석등은 북한지역에 2기를 포함하여 모두 4기가 남아 있는데, 이 석등도 그 중의 하나이다. 높은 기둥 위에 놓여 있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균형감이 흐르고 있으며, 건립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보물

도피안사 법당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 4각의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8각 모양의 돌로 높게 2단을 쌓았다. 아래층 기단의 8면에는 안상(眼象)이 조각되어 있다. 이 기단의 맨 윗돌에는 윗층 기단을 괴기 위한 높직한 8각의 괴임돌이 놓여져 있는데, 이곳에는 연꽃무늬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윗층 기단은 매우 높으나 각 면에 꾸밈이 없다. 다만, 기단의 맨윗돌 아랫면에 다소 두툼한 느낌의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둘러 놓았다. 탑신과 닿는 곳에는 높은 3단의 받침을 두어 1층 몸돌을 괴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기단의 꾸밈새는 석탑의 기법이라기보다는 불상의 기단 기법으로 보이며, 덮개돌 윗면의 높은 괴임형식은 9세기 통일신라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수법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에 각각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겼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 2·3층은 3단인데, 조각이 얕아서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나,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 아름다운 모습이다.

기단의 꾸밈새에서 보이는 특이한 양식,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탑을 만든 시기는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통일신라 경문왕 5년(865) 절을 건립할 당시 불상과 함께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인제 한계사지 북 삼층석탑/보물



한계사터는 한계령 중턱의 장수대에 위치하고 있다. 앞으로는 한계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한용운이 편찬한 책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약 17세기 말까지는 절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절터에는 건물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고, 3층 석탑 2기와 불상, 석등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다.

쌍탑으로 보기도 하는 두 삼층석탑 중에서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 것이 이 탑이다.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금당터 앞의 인제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보물)과 비슷한 모습이나, 아래층 기단의 밑돌과 가운데돌이 다른 돌로 되어 있고, 탑신의 지붕돌 받침수가 1·2·3층 모두 4단인 점이 다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보이는 탑으로, 9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강원도 지역에서는 비교적 오래된 탑이다. 원래 무너져 있던 것을 1984년에 복원하였는데,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만 새로이 보완하였을 뿐 보존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인제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보물

한계사터는 한계령 중턱의 장수대에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는 한계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데, 한용운이 지은 책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약 17세기 말까지는 절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이 절터에는 건물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삼층석탑 2기와 불상, 석등 등 많은 석조물이 있다.

쌍탑으로 보기도 하는 두 삼층석탑 가운데 금당터 앞에 서있는 것이 이 탑으로 받침대 역할을 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두고,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동그란 안상(眼象)이 얕게 조각되어 있고, 윗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중앙에 기둥을 본떠 새겼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1·2층은 5단이지만, 3층은 4단으로 줄어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끝부분에 이르러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남아 있는 머리장식이 없었으나, 최근에 복원하여 얹어놓았다.

통일신라 양식의 일반형 석탑으로, 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낡은 산장 옆에 옮겨져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를 찾아 복원한 것으로, 파손되었던 부분을 복원하면서 너무 모나게 다듬어, 원래의 석재들과 잘 맞지 않는다. 서북쪽 언덕 위의 북삼층석탑과 비교하여 기단에 새긴 조각의 모양이나 지붕돌받침수가 서로 달라 석탑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 보물



강원도 양양의 오색약수터에서 약 2㎞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곳은 성국사(城國寺)터라 전해지는데 근거는 확실하지 않다. 3층석탑 외에 또다른 부재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넓지 않은 사찰이었다고 추정된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두고 있는 형태이다. 기단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에는 네 모서리에 빗물이 흐르는 홈을 표시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1층 몸돌에는 사리를 두던 네모진 공간이 있다. 지붕돌은 윗부분에서 경사를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려 있어 탑 전체에 경쾌한 느낌을 더해준다.

완전히 쓰러져 있던 것을 1971년에 복원한 탑으로, 정연하게 구성된 2단의 기단과 지붕돌의 얇은 낙수면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양양 선림원지 석등 보물

선림원터 안의 서쪽 언덕 위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등이다. 선림원은 신라의 옛 절로, 이 곳에서 출토된 신라범종을 통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했던 순응법사(順應法師)에 의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지금은 이 터가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여러 유물들이 남아있고 각종 기와와 토기조각들이 아직까지도 발견되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아래받침돌의 귀꽃조각은 앙증맞게 돌출되어 아름답고, 그 위로 가운데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은 모양이며 그 장식이 화려하다. 즉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러 모두 3개의 마디를 이루게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빛이 새어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무늬를 새긴 매우 드문 모습을 취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경사진 면은 가파르지 않고 부드러운데, 귀꽃조각과의 어우러짐이 자연스럽다. 꼭대기에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 남아 있다.

지붕돌이 일부 탈락되긴 하였으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양식과 장식적으로 흐른 조각 등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담양 개선사지 석등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같은 절터내의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경북 울진군 구산리에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각 기단의 맨윗돌은 윗면에 약한 경사가 있으며, 네 모서리의 선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길고 네모난 윤곽이 새겨져 있으나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얇으며 수평을 이루는 처마선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이 잘 나타나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일부 조각 등이 생략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1948년에 명문(銘文)이 있는 신라 범종이 발견되어 주목되었던 선림원터에는 석탑을 비롯하여 석등·홍각선사탑비·석조부도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들 석조유물들은 대부분 쓰러져 있었으나 모두 복원되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법당터 남쪽의 원래 위치에 복원되었다.

여러 장의 돌로 탑의 토대를 만들고, 아래층 기단을 올려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다. 위층 기단 역시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기둥을 새겼는데, 한 면을 둘로 나눈 뒤 8부중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높은 편이며, 2층 몸돌은 반으로 체감되고 각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넓은 편이고, 지붕의 경사가 급하게 내려 오다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 있다.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있고, 철제찰주를 꽂았던 구멍이 있으며 그 위에는 보주(寶柱: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모양의 돌이 있으나 원형이 아닌 듯하다.

외형상 정제된 비례를 보여주지만 8부중상의 조각은 섬약하고 석재의 구성도 규율성을 잃고 있다. 신라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으나 기단부의 짜임이나 각 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성연대는 9세기경 신라 후기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된다.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전 기단부에서 소탑(小塔) 60여 기와 동탁(銅鐸) 1개가 발견된 일이 있다. 탑 앞에는 안상(眼象)을 새긴 배례석(拜禮石)이 남아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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