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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18(전북)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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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 마이산

마이산(馬耳山)은 산 꼭대기의 두 산봉우리가 마치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다. 두 봉우리는 암마이봉(686.0m)과 숫마이봉(679.9m)으로 불린다. 산의 이곳저곳에는 탑 또는 돔 모양의 작은 봉우리들이 광대봉, 마두봉, 관암봉, 비룡대, 나옹암으로 불리며 10여 개가 줄지어 있다. 마이산의 중심부인 이곳은 독특한 지질자원이자 경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자연유산이다. 마이산의 지질구성은 백악기의 마이산 역암이며, 산이 전체적으로 탑처럼 우뚝 솟은 모양이 특징이다. 암석의 특징 상 부분적으로 비바람에 깎여나간 수많은 구멍(풍화혈, tafoni)이 나있어 암석학적 학술가치도 매우 크다. 암석의 작은 홈에 물이 들어가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구멍을 넓힌 것이다(빙정의 쐐기작용). 마이산에는 천연기념물 줄사철나무 군락과 은수사 청실배나무 등 다양한 식물상과 마이산탑(시도기념물) 등 다양한 문화유산이 어우러져 있다.
(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익산 왕궁리 오 층 석탑

마한시대의 도읍지로 알려진 익산 왕궁면에서 남쪽으로 2㎞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이다.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부가 파묻혀 있던 것을 1965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원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탑의 기단은 네 모서리에 8각으로 깎은 주춧돌을 기둥 삼아 놓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길고 큰 네모난 돌을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여러 층 쌓아 올려놓아 목조탑의 형식을 석탑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팔각기둥과 네모난 돌들 사이는 흙을 다져서 메웠는데 이 속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발굴 중에 기단 각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조각을 새긴 것이 드러났으며, 탑의 1층 지붕돌 가운데와 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1층부터 5층까지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에는 다시 면의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조각했다. 지붕돌은 얇고 밑은 반듯하나,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위로 치켜올려져 있으며,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다. 각 층 지붕돌의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다른 돌을 끼워놓았다. 5층 지붕돌 위에는 탑머리장식이 남아있다.

지붕돌이 얇고 넓어 빗물을 받는 낙수면이 평평한 점이나, 탑신부 1층의 지붕돌이 기단보다 넓은 점 등 백제석탑의 양식을 일부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언제 제작되었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으나 1965년 보수작업 때 기단의 구성양식과 기단 안에서 찾아낸 사리장치의 양식이 밝혀지면서 그 시기가 비교적 뚜렷이 밝혀졌다. 즉, 백제의 옛 영토 안에서 고려시대까지 유행하던 백제계 석탑양식에 신라탑의 형식이 일부 어우러진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이 석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유물들은 국보로 일괄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최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원의 발굴과정에서 지금의 석탑에 앞서 목탑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이 탑 밑부분에서 발견되어 다시금 주목을 끌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김제 금산사 석등/보물



김제 금산사 대장전 앞뜰에 놓여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그 밑에 아래받침돌, 가운데기둥, 윗받침돌로 3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어 놓았는데, 꼭대기의 머리장식까지 모두 온전히 남아 있다.

아래받침돌은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새겼고, 그 위의 세워진 가운데기둥은 위는 좁고 아래가 넓은 모양이다. 윗받침돌은 아래받침돌보다 크고 무거운데, 역시 둥근 평면 위에 여덟 장의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화사석은 네 면에 창을 만들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창 주위에는 구멍이 3개씩 뚫려있는데, 창문을 달기 위한 구멍이었던 듯하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작은 꽃조각으로 꾸며 놓았다.

전체적으로 단순함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데, 지붕돌의 꽃조각이나 석등 각 부분의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금산사 6층 석탑/보물

금산사 6층 석탑은 금산사 안의 북쪽에 송대(松臺)라고 불리는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는 탑이다. 바로 뒤에는 석종모양의 사리계단이 있는데, 이렇듯 사리계단 앞에 석탑을 세워놓은 것은 사리를 섬기던 당시 신앙의 한 모습이기도 하다.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탑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의 규모가 좁아져 있고, 각 기단의 윗면에 다른 돌을 끼워서 윗돌을 받치도록 하고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2층 이상에서 줄어드는 비율이 제법 부드럽고, 각 층의 몸돌에 새겨진 기둥조각이 넓은 편이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6번째 층은 다른 층처럼 몸돌의 각 귀퉁이에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 모양의 것이 덮여 있으나, 이것은 탑의 머리장식을 받치기 위한 노반(露盤)으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머리 장식은 온전히 유지되어 원형이 잘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도 기단이나 지붕돌의 모습 등에서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작품으로서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인 대적광전 앞의 왼쪽으로 옮겨 왔다.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밝은 회색의 화강암으로 만든 정사각형의 탑인데 비해, 이 탑은 흑백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에는 연꽃조각을 아래위로 장식하였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坐佛像)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밑면에는 받침을 두었는데, 그 중심에 용과 풀꽃무늬를 새겨놓았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남은 것이 없었으나, 훗날 보충한 화강암으로 만든 장식이 놓여 있다.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각 층의 줄어드는 정도가 온화하고 섬세하다.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김제 금산사 심원암 삼층석탑/보물



금산사 심원암에서 볼 때 북쪽 산꼭대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탑이다.『금산사사적』에 의하면, 금산사는 600년대 창건되었는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이 절을 창건하여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탑신의 몸돌에는 네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각 몸돌을 덮고 있는 3개의 지붕돌은 넓적하며, 낙수면의 경사를 급하게 처리하였고, 처마의 양끝에서의 들림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담겨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다.

깊은 산중에 있었던 탓인지 탑의 모습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는 아름다운 석탑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백장암은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菩薩像)과 신장상(神將像)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을, 3층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 만은 삼존상(三尊像)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1.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보물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 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 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추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선운사육층석탑 (禪雲寺六層石塔)/전북 유형문화유산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기단(基壇)을 1층으로 마련하여 전체의 무게를 버티게 하고 그 위로 6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았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처마는 양끝에서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한 멋이 흐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대체로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몸돌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지붕돌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비례감이 조금 떨어진다. 옛 백제지역의 탑으로서, 지붕돌 등에서 백제탑 양식이 보이고 있어 지방적인 특색이 잘 담긴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정읍 천곡사지 칠층석탑 / 보물


7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수평으로 전개된 추녀에 얕은 낙수홈이 모각되고 받침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었다. 연화문은 모두 앙련으로 추녀부의 측면부터 탑신에 맞닿은 안쪽 면까지 가득히 조각한 까닭에 자연스레 그 문양이 세장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1변에 4판씩 모두 16판의 앙련이 조식되었는데, 판 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이러한 연화문장식은 전각부에 미세한 반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옥개석의 폭이 좁아지는 느낌을 주어 전체적으로는 석탑이 더욱 세장하면서도 고준해보이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처럼 옥개석의 하면에 연화문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남원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은 아니다. 상륜부재는 모두 없어지고 7층옥개석 위에 노반석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옥개석의 양식이 특이하여 이형석탑(異形石塔)으로 분류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결구가 매우 간략화 되고, 연화문의 조각 또한 치졸함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안정감이 결여된 세장 · 고준함 등으로 보아 고려 중엽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보물

정읍 은선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基壇)은 낮은 1단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과 같은 양식이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이 여러 장의 돌로 이루어졌다. 1층의 몸돌은 대단히 높아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각 면 모서리에는 희미하게 기둥모양을 본떠 새겨놓았다. 2층 몸돌은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었으며, 남쪽면에 2매의 문짝이 달려 있는데, 이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설치한 것으로 짐작된다. 보통은 벽면에 본떠 새기기만 하는데 이렇듯 양측에 문짝을 단 유래는 매우 희귀하다. 3층 몸돌은 더욱 줄어들고 다른 꾸밈은 없다. 지붕돌은 평평한 돌을 얹어 간결하게 구성하였다. 꼭대기에는 또 하나의 평평한 돌이 놓여 있으나 이것이 탑의 머리장식의 일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추측된다. 기단과 지붕돌에서 백제 석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옛 백제 땅에서는 백제양식의 석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층 몸돌이 지나치게 높아진 데다가 기단·몸돌이 모두 너비가 좁아서, 높을 뿐 아니라 안정감도 줄어들어 우수작이라 볼 수는 없지만, 일부 특이한 양식을 지녔고 백제양식의 탑이 전파된 경로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군산 발산리 오층석탑 /보물



원래는 완주(完州)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였으나 지금은 탑신의 한 층이 없어지고 4층까지만 남아있다.

아래·위 기단 모두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기단 위로 4층의 탑신에는 각 층의 몸돌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추녀 끝이 약간 들려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어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탑 머리 부분에는 머리 장식이 일부 남아 있으나 훗날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으며, 고려탑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군산 발산리 석등 /보물


원래는 완주지역에 세워져 있던 석등으로, 일제강점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불을 켜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이를 받쳐주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의 가운데기둥은 사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깍은 모습으로, 표면에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의 모습을 새겼는데,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리를 둥글게 깍아 8각을 이루게 하였으며, 각 면에는 4개의 창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번갈아 두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으로, 화사석에 새겨 놓아 등불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붕돌은 8각으로 각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곡선을 그리는 처마는 여덟 귀퉁이에서 치켜올림이 시원하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된 머리장식 받침대를 마련해 놓았으나, 머리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화사석의 사천왕상과 지붕돌의 양식 등을 통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듯 하지만, 받침부분의 기둥이 4각으로 변하고 화사석 역시 4각을 닮은 8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8각에서 4각으로 변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석등을 만든 시기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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