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문화재를 살펴보면서 의아스러운 생각을 가진 것은 전통 사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타지역에 비하여 문화재급 석탑이 너무도 적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 이유가 숭유억불정책에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탑들도 대개는 폐사지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시골 촌놈것을 그냥 빼앗아 왔다고나 할까? 외국으로 수탈당한 문화재는 환수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도 우리 안에서는 지극히 상반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좀처럼 이해되질 않는다.
(글, 이미지 출처 문화유산포털)
보협인석탑 (寶篋印石塔)/국보
보협인탑이란 『보협인다라니경』을 그 안에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종래에 볼 수 없던 특이한 모습인데, 중국 오월(吳越)이라는 나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오월국의 마지막 왕인 충의왕 전홍숙(錢弘淑)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8만 4천기의 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고사를 본떠 금, 동, 철 등의 재료로 소탑 8만 4천기를 만들고 그 속에 일일이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하였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탑을 보협인탑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이 석조 보협인탑이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래는 천안시 북면 대평리 탑골계곡의 절터에 무너져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절터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와 주춧돌의 일부,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나, 이 곳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복원된 탑의 현재 모습은 5개의 돌만 남아 있어 완전한 형태는 아니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형식과는 전혀 달라서 기단(基壇)과 탑신(塔身)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완전한 형태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뚜껑을 덮은 듯한 네모난 상자 모양의 돌 2개를 포개어 놓은 후, 그 위로 귀를 세운 머리장식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불상(佛像)이 새겨진 육면체 위에 4각형의 받침돌을 놓고, 다시 그 위에 육면체가 놓이는데 4면에 부처님의 전생설화가 새겨있다. 이 탑몸돌 윗면 중앙에는 『보협인다라니경』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사리구멍이 남아있다. 당나귀 귀처럼 솟은 맨 윗돌에는 그 안에 석가의 일대기가 상하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전면에 조각이 가득한 이 탑은 중국 보협인탑의 영향을 받은 듯 하고 외형도 거의 비슷하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여지며,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보협인석탑으로서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탑은 2018년에 실시된 인문학적 조사와 3D촬영 등 과학적 조사 결과(국고보조사업)를 바탕으로 기단면석(제1석), 기단갑석(제2석), 옥개석 받침석(제4석) 등 일부 부재가 구조적으로 가장 안전한 방향으로 배치되었다. 또한 기존에 부재 간 고임재로 사용되었던 동전을 티타늄판으로 교체하여 안정성을 높였으며, 하단에는 받침석을 새로 제작‧설치하였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국보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開城 南溪院址 七層石塔)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開國寺)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개성 남계원 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제외한 탑신부(塔身部)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워져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사현사의 옛터에 있던 탑으로, 시가지 확장을 하면서 1970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탑은 자연석이 기단(基壇)을 대신하여 5층의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있다. 1층 몸돌에는 아무 장식이 없고, 2층 이상은 기둥모양을 새겨 한 면을 둘로 나누고 그곳에 문짝으로 보이는 네모난 액자형을 표시하였다. 각 층의 몸돌은 전체적으로 위가 좁고 아래는 넓어 목조건축을 모방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지붕돌은 넓고 얇은 편이나 육중해 보이고,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수평으로 펼쳐지다가 양끝으로 치켜오르면서 더욱 두꺼워졌다.
현재 기단부가 결실되어 안정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전체적으로 중후하면서 경쾌함과 안정성을 겸하고 있다. 세워진 연대에 대해서는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의 비문에 의하여 이 절이 고려 정종 12년(1045)에 창건된 것임을 알 수 있어서, 이 탑도 절을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낙성대삼층석탑 (유형문화자산 )
서울시 관악구 낙성대동 218-9번지 강감찬 생가 터에 위치하고 있던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1973~74년 낙성대공원을 조성하면서 생가 터에 있던 석탑을 낙성대공원내 안국사 경내로 옮겨왔다. 석탑의 조성연대는 13세기로 추정되며 자재는 화강암, 탑의 높이는 4.48m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삼층석탑 (三層石塔)
2층 기단(基壇)을 쌓아 그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의 탑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탑신은 각 층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가지런히 새겼다. 1층의 몸돌은 큰 편이고 2층에서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 몸돌은 2층과 비슷한 크기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며, 네 귀퉁이는 약간 위로 들려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이 2층과 3층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지붕돌받침이 3단인 점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약사사 삼층석탑
이 탑은 원래 약사사 석불 입상이 모셔져 있던 금당 바로 앞에 서 있던 삼층석탑으로 약사사의 역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화산 중턱에 있는 이 탑은 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투박한듯하면서도 날렵하다.
이 석탑은 일층 기단과 삼층 탑신으로 구성된 독특한 형식이다. 석탑의 받침부(基壇部)에는 사각형 지대석 위에 큼직한 사각형 기단과 판석으로 된 갑석이 놓여 있다. 다소 육중한 기단 위에는 갓기둥(隅柱)이 있는 1층 탑신과 큼직하고 가파른 지붕돌(屋蓋石)이 놓여 있고, 다시 2•3층 탑신과 지붕돌이 올려 있다. 탑의 몸체부(塔身部)는 투박한 받침부에 비해서 날렵한 모양이다.
이 석탑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희귀한 석탑의 예로 그 가치가 크다.
금동탑(국보)
이 금동탑은 의장이 화려하고 정교한 면에서 법당 내에 모셔둔 사리탑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동탑은 대개 높이가 20∼30㎝ 정도이고, 50㎝가 넘는 것이 극히 드문데, 이 탑은 현재 높이만도 155㎝로 규모가 큰 편이다. 더구나 현재 남아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원래는 7층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고,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원래 높이는 지금보다도 더 높았을 듯하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꾸민 탑으로, 석탑의 일반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각 면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근 테를 두른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탑신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5층의 탑신에는 모두 불상을 새겼지만 조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지붕의 모서리마다 풍탁(風鐸)을 달았으나 일부는 결실되고 현재는 몇 군데에만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표면의 금칠은 거의 벗겨져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된 작품으로, 넓게 짜여진 기단에 비해 탑신은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각 부분에 꾸밈이 많은 점이나, 탑에 매달린 장식들이 많은 점 등에서 공예탑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목조 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형의 금속공예품이면서 세부표현이 정교한 점에서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이 금동탑은 의장이 화려하고 정교한 면에서 법당 내에 모셔둔 사리탑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동탑은 대개 높이가 20∼30㎝ 정도이고, 50㎝가 넘는 것이 극히 드문데, 이 탑은 현재 높이만도 155㎝로 규모가 큰 편이다. 더구나 현재 남아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원래는 7층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고,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원래 높이는 지금보다도 더 높았을 듯하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꾸민 탑으로, 석탑의 일반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각 면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근 테를 두른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탑신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5층의 탑신에는 모두 불상을 새겼지만 조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지붕의 모서리마다 풍탁(風鐸)을 달았으나 일부는 결실되고 현재는 몇 군데에만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표면의 금칠은 거의 벗겨져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된 작품으로, 넓게 짜여진 기단에 비해 탑신은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각 부분에 꾸밈이 많은 점이나, 탑에 매달린 장식들이 많은 점 등에서 공예탑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목조 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형의 금속공예품이면서 세부표현이 정교한 점에서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고달사터에 쓰러져 있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높이는 2.43m이며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에 경기도 기전매장문화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다.
직사각형의 바닥돌 4면에 둥글넓적한 모양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아래받침돌 대신 2마리의 사자를 앉혀 놓았다. 사자는 좌우에서 앞발을 내밀고 웅크리고 있으며, 등 위로 구름이 솟아올라있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돋을새김하였고, 윗받침돌에는 연꽃을 새겼다. 그 위에 놓인 화사석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서있는 자세가 대부분인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특징적이며,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인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原州 令傳寺址 普濟尊者塔, 보물)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의 사리탑으로, 모두 2기이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세워졌는데, 보통 승려의 사리탑과는 달리 석탑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제존자(1320∼1376)는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화상으로, 신륵사에 그의 사리탑이 남아 있으나 제자들에 의해 영전사에도 따로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위·아래층 모두 모서리에 기둥조각을 새겼고, 위층 기단 윗면에는 탑신을 받치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웠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이다. 2기 가운데 1기의 1층 지붕돌은 양식상 차이가 있어 원래 이 탑에 속하였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탑의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은 2기 모두 완전하게 남아있지는 않다.
고려 우왕 14년(1388)에 세운 것으로, 승려의 묘탑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이며, 더욱이 거의 같은 양식으로 2기를 건립하였다는 점도 특이한 예이다. 탑을 지금의 자리로 옮길 당시에 각각의 탑에서 사리를 두는 장치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한 탑에서는 죽은사람에 관해 새긴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이 탑을 세우게 된 과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훌륭하고 균형을 이루고 있다.
문경 오층석탑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는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것이나,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 하자, 고(故) 전형필(全鎣弼)선생이 이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놓은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 놓은 모습으로, 각 부분이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간단한 무늬를 움푹 들어가게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나씩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 교대로 쌓았는데, 5층의 지붕돌만은 다른 곳에서 옮겨 온 듯 어색하다. 각 층의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1층의 남쪽 면에는 자물쇠 모양의 조각을 하였는데, 조각 자체가 작고 얕아서 문의 표현을 단순화시킨 듯 하다. 짧고 가파른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층까지는 4단이고, 5층부터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하나의 돌에 새겨져 얹혀 있는데, 네 귀퉁이마다 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의 뚜렷한 안상조각,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 등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짐작하게 하며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이 느껴진다. 석탑 바로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어 그 격식을 갖추고 있다.
창경궁 팔각칠층석탑 /보물
창경궁 안의 연못 옆에 건립되어 있는 탑으로, 8각 평면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석탑이다.
기단부(基壇部)는 3단의 바닥돌 위로 높직한 1단의 기단이 올려진 모습인데, 각 면마다 조각으로 가득차 있다. 바닥돌은 4각으로 밑단을 두고 그 위로 2단의 8각 바닥돌을 두었는데, 8각의 각 면마다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다. 기단과 닿는 곳에는 1단의 연꽃받침을 놓았으며, 기단은 각 면마다 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기단의 맨윗돌 역시 연꽃무늬와 안상을 장식하였고, 그 위로 높직한 연꽃괴임돌과 2단의 낮은 괴임대를 두어 1층 탑신(塔身)을 받치도록 하였다. 7층에 이르는 탑신의 1층 몸돌은 높고 볼록한 모습이다. 2층부터 낮아지며 지붕돌은 목조건축의 지붕처럼 기왓골이 표시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후대에 보충한 듯한 머리장식이 올려져 있다.
1층 몸돌에는 탑을 세운 때가 새겨져 있어,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이 탑을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취사 오층석탑/서울특별시 문화유산자료
이 탑은 영취사의 대웅전 계단 아래쪽 마당에 위치한 오층석탑으로 원래는 요사체 앞쪽에 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여러 장의 돌을 높게 쌓아올려 대석을 만든 후 그 위에 2층의 기단과 5층의 탑신을 세웠는데, 기단 아래 부분은 후대에 탑을 세우면서 쌓은 것으로 원래의 탑과는 무관하다.
기단은 2층으로, 하층기단은 넓고 높은 편인데 여러 장의 장대석을 이어 결구하였으나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으며, 사이 사이에 잡석을 끼워 지탱하고 있다. 상층기단은 하층 기단에 비하여 높이가 약간 낮은 편이며, 5층의 탑신을 받기에는 폭이 다소 좁아 보인다. 2층의 기단 위에는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차례로 놓여있는데, 맨 윗층의 옥개석 부분과 상륜부분은 새로 만들어 보완한 것이다. 1층 탑신은 2층 이상의 탑신에 비하여 높고 가장자리에 희미하나마 우주(隅柱)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탑신 한 면에 감실(龕室)이 하나 뚫려있다. 옥개석은 두툼하며 아래에는 얕게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고 낙수면은 완만하며 전각(轉角) 부분이 약간 위로 치켜 올라가 있어 두꺼운 옥개석에도 불구하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2층 이상은 탑신이 낮으며 체감률도 완만하여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륜부(相輪部)는 모두 없어졌고 후대에 만든 연봉형 석재가 하나 놓여있다.
이 탑은 높고 넓은 기단부와 쌓아올리듯이 탑신을 올린 구성법, 소략화된 층급의 표현 등으로 볼 때 고려말~조선 전반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조성시기가 늦고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서울지역에 별로 많지 않은 석탑 가운데 하나이며, 석탑의 부재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자료출처: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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