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 탑리리 오 층 석탑/국보
탑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국보 77호) 낮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전탑(塼塔) 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 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문화재 정보센터)
의성대곡사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대곡사의 대웅전 앞에 있는 다층석탑으로, 탑몸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이다. 대곡사는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지공선사와 나옹선사가 절을 지었으며 처음에는 대국사라 이름하였다가 다시 대곡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 탑은 전체 높이가 173㎝로서, 상륜부는 없어졌으나 화강암으로 된 기단부와 점판암으로 된 탑신부는 약간의 손상을 입은 상태로 남아 있다. 땅에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기단부의 바닥돌은 사각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함께 기단부를 형성하는 하대석이나 중대석, 연화대좌, 상대석이 차례로 놓여져 있다.
탑신부는 현재 12층이 남아 있는데 각층은 몸돌은 없고 지붕돌(옥개석)만 쌓여 있는 상태이다. 각층의 지붕돌은 위로 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는데 6층과 7층은 체감비율이 급격히 줄어 들어 그 사이 한층의 지붕돌이 없어진 것 같아 원래는 13층을 이루었으리라 짐작된다.
대곡사 다층석탑은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제518호)보다는 조금 늦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적어도 그 시기가 11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층의 몸돌이 남아 있지 않고 지붕돌도 약간의 손상을 입었지만 12층까지의 지붕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고려 초기의 청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 준다.
의성치선동석탑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선암사 뒷편에 서 있는 석탑으로, 일부만 남아 있는 기단부(基壇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얹고 있다.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특히 1층 몸돌 4면에는 연꽃받침 위에 앉은 부처의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인데, 3층 지붕돌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기단의 한 부분으로 보이는 돌 하나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고, 1층 몸돌의 불상 조각이 많이 닳아있어 화려하거나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신라 무열왕 때 세웠다고 전하나, 탑의 양식과 불상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인 9세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쌍호동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청호마을 동북쪽 산 기슭에 우뚝 서 있는 석탑으로, 자연암반을 바닥돌 삼아 1층 기단(基壇)을 올린 후,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 뜬 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2·3층은 3단씩의 받침을 새겼다. 특히 지붕돌은 밑면과 윗면의 경사가 비슷하여 단조로운 느낌을 준다.
1층 몸돌이 지나치게 길어 불안정해 보이고, 퇴화된 양식을 보여주는 지붕돌에 의해 전체적으로 둔탁해 보인다. 산 중턱에 자리잡은 점과 자연암반을 바닥돌로 삼은 점, 단순한 조각솜씨들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측된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보물
경상북도의 8경 중 하나인 보현산 줄기 빙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을 모방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16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의 가운뎃돌은 기둥과 면을 이루는 석재를 딴 돌로 하여 15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기단의 맨윗돌은 8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탑신을 받치기 위해 괴임을 높게 얹었다. 탑신부를 보면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딴 돌로 모서리기둥을 세우고 정면에 네모진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 공간은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다.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반 이상 줄었으며, 5개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이다. 지붕돌의 경사진 면은 각 5단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정상의 머리장식부분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로 추정된다. 의성탑리오층석탑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나 모전석탑으로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으로, 각 부분의 장식이 풍부하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나씩 새기고, 조각에 의해 나누어진 8곳에 비천상(飛天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에도 각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긴 후, 기둥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4천왕상(四天王像)을, 오른쪽에는 천부상(天部像)을 배치하였다. 사천왕과 천부상은 모두 부처의 법을 보호하고 지키는 신으로 이들을 이렇게 복합적으로 표현한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인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 가져온 변화인 듯 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으며, 1층 몸돌의 4면에보살상(菩薩像)을 돌아가며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으로 줄어 있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위로 젖혀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이를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만 거꾸로 놓여져 있는데, 이는 후대에 와서 흐트러진 것으로 보인다. 그 위로 얹혀있는 돌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원래 위층 기단 윗면의 네 귀퉁이 마다 암수 2마리씩 돌사자 네 마리가 있었으나 이 중 2마리(보물, 의성 관덕동 석사자)만 남아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렇듯 동물을 등장시키는 경우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이 가장 앞서고 이후 통일신라 후기까지 그 양식이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탑에 장식적인 화려함을 더하게 되는 본격적인 시기인 9세기 정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웅장한 기상은 덜하나, 많은 조각을 새겨 놓아 화려하고 아름답다.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일반적인 모습이며, 서로 규모와 구조가 같다. 기단의 네 모서리와 각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특히 가운데기둥은 두 개씩을 두었다.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고 있는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의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마련하였다. 동탑의 기단에 통일신라 경덕왕 17년(758)에 언적법사 3남매가 건립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으며, 이두문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특기할 만하다.
두 탑 모두 꼭대기의 머리장식만 없어졌을 뿐 전체적으로 온전하게 잘 남아있다. 두 탑의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각 부분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고, 위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두 개씩 새겨 놓고 있어 당시의 석탑양식이 잘 담겨져 있는 탑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
김천 서부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서부동 마을 뒤의 호두산 아래 골짜기에 남아 있는 탑의 일부분들이다. 주변에서 통일신라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조선 중기까지는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탑은 일반적인 3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탑신(塔身)의 1·2층 부재만 남아 있다. 남아 있는 1층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고, 두께도 얇으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원형을 알 수 없지만 지붕돌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골짜기는 임진왜란 당시 왜병의 진로였다는 설이 있어, 그 때 탑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감실에 여래좌상을 모신 동탑)
청암사수도암 동서삼층석탑 <보물 297호>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가 세웠다는 설이 전해온다. 앞 뜰이 좁아서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깝다.
동탑은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얕게 새겼다. 탑신부에서는 1층 몸돌이 위가 좁고 밑이 넓은 독특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각 면에는 4 각형의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두고 그 안에 여래좌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2·3층의 몸돌에는 각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받침은 4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의성석탑리방단형적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불규칙한 모양의 자연석을 쌓아 만든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탑에 대한 기록은 물론 주변에 관한 기록도 전하지 않는다.
탑은 건물터 만큼 넓게 낮은 단을 마련하여 그 위에 계단모양의 층단을 만들었다. 1, 2단에 걸쳐 네 면에 목탑에서처럼 감실(龕室)을 파서 불상을 모셔두었다. 현재 윗부분이 무너져 원래 몇층이었는지 알 수 없고, 기단과 탑신의 구분도 애매한 독특한 형식의 탑이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고운사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고운사 대웅전 남쪽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아래층 기단에는 희미한 안상(眼象) 무늬가 보이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줄어 들고 있으며,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약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크지 않고, 밑면에 1층은 4단, 2·3층은 3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뒤집혀진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등이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청암사다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기단은 아래·위층이 거의 비슷한 높이인데 보통 아래층 기단이 낮고 위층 기단이 높은 일반적인 탑들과는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면마다 불상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큰 편으로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일부가 놓여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도선국사가 세운 탑이다. 기단에 비해 탑신이 가늘어 가냘픈 감을 주며, 탑신의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커서 불안정해 보인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성주군 어느 논바닥에 있던 것을 청암사 주지였던 대운대사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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