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30(문경)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4.
반응형

문경 내화리 삼층석탑/보물

문경시의 깊은 산골짜기에 서 있는 규모가 작고 아담한 3층 석탑이다. 이 절터의 유래나 규모는 알 수 없으며, 발견 당시 3층 몸돌이 근처에 새로 지은 제실(帝室)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는 등 탑의 각 부분이 흩어져 있었다. 1960년 9월에 전부 수습하여 복원하였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만을 두어 특이한 형태이며,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있다. 기단은 남북면에만 모서리에 기둥을 새겨두었고, 동서면에는 남북면의 사잇돌을 밀어 넣어 맞추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구성하였으며,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의 모양을 본떠 새겨두었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 오르고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있는데, 노반을 아래의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짠 것이 특이하다.
기단 맨 윗돌 위의 괴임대가 생략되고, 기단이 1층으로 처리되는 등 시대적 특색을 보이는 석탑으로, 정치·사회적 혼란이 석탑의 양식에도 반영되었던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을 복원하면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형태의 사리를 담는 공간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두었을 사리장치는 일제강점기에 도둑맞았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보물

봉암사에 자리 잡고 있는 3층 석탑이다.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基壇部),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특이한 것은 지면과 맞닿아 있어야 할 탑의 받침돌 밑면에 또 하나의 받침이 있어 혹시 이것이 아래층 기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넓어 보인다.
또 하나의 특징은 머리장식 모두가 완전히 남아 있어서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되는 귀중한 유례라는 점이다.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의 탑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탑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적용되었다. 탑의 가장 윗부분에 놓이며 여러 개의 구성요소가 차례로 올려져 가장 장식적으로 마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문경 오층 석탑/보물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원래는 경상북도 문경에 있었던 것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 하자, 고(故) 전형필(全鎣弼) 선생이 이를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워놓은 것이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각 부분이 거의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간단한 무늬를 움푹 들어가게 새기고, 위층 기단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나씩 새겼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씩 교대로 쌓았는데, 5층의 지붕돌만은 다른 곳에서 옮겨 온 듯 어색하다. 각 층의 몸돌마다 모서리에 기둥을 새겼으며, 1층의 남쪽 면에는 자물쇠 모양의 조각을 하였는데, 조각 자체가 작고 얕아서 문의 표현을 단순화시킨 듯하다. 짧고 가파른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층까지는 4단이고, 5층부터는 3단으로 줄어들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네모난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하나의 돌에 새겨져 얹혀 있는데, 네 귀퉁이마다 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의 뚜렷한 안상조각, 지붕돌 받침이 4단, 3단 등으로 일정치 않은 점 등이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짐작하게 하며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이 느껴진다. 석탑 바로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어 그 격식을 갖추고 있다

문경 도천 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직지사 대웅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2기의 석탑으로, 원래 경북 문경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두 탑 모두 각 부분의 양식이 같아서 1단의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여러 장의 넓적한 돌로 짜인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의 밑면 받침으로 1·2층은 5단, 3층은 4단을 두었고,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거대한 모습의 머리장식은 1976년 탑을 옮겨 세울 때 새로 만들어 장식해 놓은 것이다.
탑신의 1층 몸돌 높이가 지나치게 높긴 하나,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기단이 1단이고, 지붕돌의 들린 정도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문경 도천 사지 삼층석탑

직지사 비로전 앞에 세워져 있는 3층 석탑이다. 1974년 대웅전 앞 3층석탑 2기(보물 문경 도천 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와 함께 경상북도 문경 웅창마을 북방 금강가의 옛 도천사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바닥돌은 넓적하게 짜여 있으며, 그 위로 여러 장의 석재를 조성한 2단의 높직한 괴임을 두어 기단을 받치고 있다. 기단은 몇 개의 널 돌로 구성되었으며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뚜렷한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지붕돌은 얇고 평평한 편으로 밑면의 받침을 5단씩 두었고, 날카롭게 들린 네 귀퉁이로 인해 경쾌함이 느껴진다.
탑신의 1층 몸돌이 2·3층에 비해 매우 높으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적절한 세련된 모습으로, 9세기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문경갈평리 오 층 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갈평출장소 내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게 빼앗겼던 것을 이웃주민들이 다시 찾아 이곳에 옮겨 세웠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1층으로 두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4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의 두꺼운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시)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나, 5층을 이루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세련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문경 윤필암 삼층이형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문경 대승사 윤필암 삼층이형석탑은 옥개석에 층급받침이 없이 복화반의 문양을 띠고 있는 것은 이 탑이 유일하다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이러한 양식은 흔치 않은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옥개석 네 면의 귀퉁이에 풍경을 달 수 있도록 작은 홈을 만들어 화려하게 보이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특히 풍경을 단 흔적이 옥개석 네 귀퉁이에 각각 2곳씩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윗면에도 구멍이 있어 각각 세 곳의 구멍을 뚫은 형태이다. 기단부는 자연 암반을 이용하였으며, 상층기단의 크기가 초청과 이층의 옥개석보다 작아 균형감이 낮아 보인다. 표면부는 오랜 세월의 풍화로 인해 세부적인 문양의 형태는 확인하기 어렵다. 상층기단부에도 네 귀퉁이마다 부드럽게 곡선을 만들었고, 문양을 통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부각하려 노력한 것 같다. 탑의 각 부재별로 제각각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어느 시기엔가 도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청 옥신석과 옥개석 사이에는 10cm 내외 크기의 자갈로 괴어져 있으며 삼층 옥개석은 옥신석과의 균형이 잘 맞지 않는 것도 이탑의 특징이다. 따라서 윤필암 삼층이형석탑은 전체적으로 일반 석탑 양식을 벗어난 다양하고 독창적인 석탑의 변화양상을 가늠할 좋은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경 윤필암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문경 대승시 윤필암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복련 장식, 기단부 상층 기단면석에 3개 연속의 탱주 모각, 1층 탑신석 남면에 조각된 문비 등이 특징이고, 이를 현존 탑과 비교하면, 건립 시기는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추후 마당에 묻힌 기단부를 노출시켜 확인하면 보다 정확한 기단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2층 탑신석이 멸실된 상태이나 잔존 1층 옥개석 상면의 탑신받침 규격을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3층 석탑으로 추정된다.
윤필암 삼층석탑은 특이한 기단구조와 문양, 상층기단부 면석 탱주의 3단 구성, 상대갑석 윗부분의 옥신석 받침 등에서 다른 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 국가유산으로 보존 가치가 충분하다. 윤필암 삼층석탑을 시도문화유산자료로 지정하여 하층기단부분의 확인, 삼층이상 부분의 동일 암석을 이용한 복원을 통하여 탑의 원형을 재현해 보존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윤필암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확립된 양식에 고려시대 석탑의 창작성 및 예술적 특성이 가미된 3층 석탑으로 제작당시 석탑의 양식과 구조를 밝힐 자료로 인정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문경 김룡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김룡사 삼층석탑은 김룡사 경재 응진전의 북동쪽 상부의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석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709년에 지덕(地德)비보를 위해 석불입상(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과 함께 조성된 비보사탑(裨補寺塔)이다. 비보사탑은 대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조선후기에 풍수적 지덕 비보를 위해 김룡사처럼 탑과 불상을 동 시기에 함께 조성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 탑의 전체 높이는 2.85cm로, 단층 기단부와 3층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석 남면에는 삼층석탑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방형의 틀을 파서 불상을 새겼다. 2층 탑신부 이상은 탑신석 체감이 적으나, 옥개석 체감은 매우 큰 편으로 일정한 체감률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너비가 좁은편이서 세장한 느낌이 든다.
김룡사와 관련된 자료 중 <김룡사사적>에 의하면 1709년 삼층석탑과 석불 등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김룡사 삼층석탑은 양식적으로는 그 가치가 미미하지만, 조선후기 석탑의 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절대적 편년의 기준을 제시한 점에서 비보사찰의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