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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

탑과 석등 이야기-29(구미,상주)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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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죽장리 오 층 석탑/국보

선산 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2㎞ 떨어진 죽장사터에 있는 석탑으로, 주변에 석재와 기와조각이 널려 있어 건물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닥돌에서 머리장식에 이르기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짜여 있으며, 전탑형의 오층탑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가 10m에 이른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 탑신(塔身)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리장식을 얹고 있는 거대한 모습이다. 탑신부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龕室)이 마련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지붕돌의 아래·윗면은 전탑(塼塔:벽돌로 쌓아 올린 탑)에서와 같이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인 2단의 기단을 형성하고 있지만, 기둥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은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안동과 의성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석탑(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 계열로 보이며, 웅장하고 세련된 통일신라 석탑의 우수한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구미 낙산리 삼층석탑/보물


선산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파되었을 때와 인연이 있는 곳으로 거대한 석탑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일대의 경작지에서 연꽃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를 비롯하여 많은 기와조각과 토기조각 등이 발견되어 이 부근이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탑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 가운데돌에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3개, 즉 한 면에 5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위층 기단 가운데돌에는 모서리기둥 2개와 가운데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남쪽에 불상을 모시기 위한 방이 설치되어 있고, 방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동그란 구멍이 남아 있다. 지붕돌은 아래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층단 모두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지고 머리장식을 받치던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이 탑의 아래층 기단에 가운데기둥을 3개나 새긴 것은 초기적인 양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몸돌과 지붕돌의 구성방법은 다소 시대가 떨어지는 면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양식은 구미 죽장리 오 층 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모전석탑 계열에 속하는 유형이다. 돌의 구성에서도 규율성을 잃지 않고,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를 짠 수법으로 보아 석탑의 건립시기는 8세기 경인 통일신라 전기로 추정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구미 도리사 석탑 (龜尾 桃李寺 石塔)
Stone Pagoda of Dorisa
구미 도리사 석탑
龜尾 桃李寺 石塔
보물 제470호

구미 도리사 석탑은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는 3.3m이다.
이 석탑은 몸돌과 지붕돌 윗부분의 층단 구성이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달라 독특한 모습이다. 탑의 기초인 기단은 동서남북 네 면에 길고 네모난 돌을 6~7장씩 병풍처럼 둘러 세워, 보통 석탑의 기단보다. 높게 만들었다. 기단의 남쪽 면 가운데에는 문짝을 새겼다.
기단 위에는 세 층의 몸돌과 지붕돌이 놓여 있다. 1층과 2층의 몸돌은 벽돌 모양의 작은 돌을 여러 층으로 쌓아 만들었고, 2층 몸돌 남쪽 면 가운데에는 두 짝의 문을 새긴 돌을 끼워 넣었다.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2층과 달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의 지붕돌 윗면은 계단 모양의 층단을 이룬다.
이러한 형태로 볼 때, 이 석탑은 벽돌로 쌓은 석탑인 전탑의 양식을 모방해 만든 모전 석탑(模塼 石塔)으로 보인다. 조각 양식과 돌을 다듬은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시대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 설명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질 당시 전설에 나오는 아도(阿度) 화상과 관련이 있는 절이다. 아도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자두 꽃이 만발하여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 한다. 정확하게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전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전) 구미 강락사지 삼층석탑 /보물

강락사라고 전해지는 옛 절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68년 경북 선산군 군청 앞뜰에 옮겨 복원하였고, 1980년 10월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을 탑신(塔身)을 세우고 머리장식을 얹은 구조이다.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면의 중앙에도 기둥 하나씩을 조각해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기 한 돌로 짜고,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떠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각 층 모두 5단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였고, 빗물을 받는 낙수면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1980년 탑을 옮겨 세울 때, 같은 시기의 석탑을 모방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지붕돌의 치켜 오른 정도나, 밑면의 받침수, 각 부의 세부적인 양식으로 보아 9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상주 무곡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이름을 알 수 없는 옛 절터에 무너
져 있던 것을, 1982년 6월 마을 주민들이 발견하여 산 아래로 옮겨 놓았다.

탑신(塔身)의 1·2층 몸돌이 없어지긴 하였으나, 그 외에는 완전한 3층 석탑으로 추정되는 부재를 갖추고 있었고, 1991년 탑을 복원하여 다시 세우면서 2층 기단(基壇)에 3층 탑신(塔身)이라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탑신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두툼한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남아 있던 부재들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상주 상오리 칠 층 석탑/보물

탑이 세워진 이곳은 장각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전하나 확실한 기록은 없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일반적인 모습으로, 흙을 다져 만든 단 주위에 돌로 테두리를 잡아 구역을 정한 후 그 위에 탑을 세웠다.

기단은 여러 장의 판도라로 이루어졌고, 탑신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일정 비율로 줄어들고 있다. 1층 몸돌은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동쪽 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도 있다. 2층 이상은 지붕돌과 몸돌을 하나의 돌로 구성한 특징이 보인다.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에서의 추켜올림이 뚜렷하며, 밑면의 받침은 5층까지는 5단을, 6·7층은 4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탑신의 경쾌함이 돋보이는 탑으로, 크기가 장중하고 전체적인 균형의 정제미가 뛰어나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보물


사벌국(沙伐國)의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곳의 서쪽에 있는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며 1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는데, 1층 몸돌은 유난히 넓고 커서 기단보다도 높다. 각 층의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처마가 반듯하며 네 귀퉁이의 위로 들린 정도가 강하여 탑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탑의 머리장식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전반적으로 비례가 불균형하고 기단부의 일부가 훼손되어 기이한 형태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기단 위에는 머리가 없는 1구의 석조여래좌상이 1층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나 이곳이 옛 절터임을 말해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갑장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갑장사 법당 앞마당에 서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갔으며, 밑면에는 층마다 3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한돌로 조각되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돌을 다듬은 솜씨가 세련되지 못하고,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북장사 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원래는 상주 인평동에 있던 탑으로, 우암산 정상 부근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용흥사로 옮겨 관리하였다가, 1998년 현재의 자리인 북장사 경내로 옮겨 북장사삼층석탑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이 복원하여 세웠다.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원래 기단 일부와 탑신의 3층 몸돌 1개, 지붕돌 3개만 남아 있었다. 아래·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으며, 밑면에 5단의 받침을 두었다.
남아있던 기단과 지붕돌 등 부재들의 양식상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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