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보물
춘양중학교 안에 동·서로 마주 서있는 2기의 탑으로 쌍탑형식을 띤다. 이곳은 신라의 옛 사찰인 남화사(南華寺)의 옛터로 알려져 있는데, 신라 문무왕 16년(675)에 원효대사가 여기서 서북쪽으로 6㎞ 정도 떨어진 곳에 현재의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이 절은 폐사되었다고 한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두 탑 모두 같은 양식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위층으로 갈수록 규모가 줄어들어 뚜렷한 체감률을 보인다. 각 층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서쪽 탑에만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있을 뿐이며, 동쪽 탑은 모두 없어졌다.
기단부가 땅 속에 파묻혀 있고 탑이 몹시 기울어져 있어 1962년 10월에 해체 ·복원하였는데, 이때 서탑에서는 사리함을 넣었던 공간이 발견되었고 동탑에서는 사리병과 함께 99개의 작은 토탑(土塔)이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비례와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서사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선방(禪房)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탑으로, 원래는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이 놓여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아래층 기단의 일부와 탑신의 2층 지붕돌 이상을 잃어버린 상태이다.위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으며, 탑신의 1층 몸돌을 괴는 곳에 얕은 받침을 새겨 놓았다. 2층 몸돌까지만 남아있는 탑신은 1층 몸돌만 따로 만들었고 1층 지붕돌과 2층 몸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몸돌의 모서리에는 기단에서와 같은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고,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새겼다. 2 층몸돌 위에 놓인 길쭉한 석재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탑신의 2층 몸돌이 1층에 비해 급격히 줄어들긴 하였으나 단정한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탑 안에서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만든 사리그릇이 발견되어 이 시기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 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 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56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부석사삼층석탑 /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부석사 삼층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탑이다. 두 개의 탑은 처음부터 함께 만든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원래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절터에 있었는데, 196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 옆에 있는 보물 제249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도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다만 지붕돌받침이 4단이고 바닥돌 크기가 작다는 점에서 무량수전 옆의 삼층석탑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졌다고 판단된다.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중앙에,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 장식을 하였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머리 장식부는 없어져서 새로 만들어 얹었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으면서 짜임새가 있어 통일 신라 후기의 석탑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초암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현재 기단의 맨윗돌 일부가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완했고, 갈라짐이 심한 위층 기단은 철사로 감아 더 이상의 파손을 막고 있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힘껏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가 왜소하여 안정감을 잃고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아래층 기단에 새긴 가운데기둥의 조각수가 하나로 줄어들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탑으로 보인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예천 개심사지 오 층 석탑/보물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현재는 논 한가운데에 서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면마다 둥근 테두리 선을 새기고 그 안에 머리는 짐승, 몸은 사람인 12 지신상(十二支神像)을 차례로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나눈 다음 그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다. 팔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을 새겨놓은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기단의 맨 윗돌은 그 윗면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한 특징이다. 사리나 법경을 봉안하는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문고리 모양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모두 4단씩의 받침을 깎아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탑 전체에 경쾌함을 실어 준다.
기단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세워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매우 온화하여 좋은 비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예천 동본리 삼층석탑/보물
탑의 전면에는 한천이 흐르고 있으며, 뒷면에는 흑응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탑과 불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였음이 분명하지만,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기단부(基壇部)는 위층 기단 아래가 파묻혀 있어서, 원래 기단이 2층인지 1층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현재는 윗면에 경사진 돌이 있고, 기단의 가운데돌을 그 위로 얹고 있다. 가운데돌은 4장의 널 돌로 짰는데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부처의 네 신을 뜻한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짜고, 각 층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5단, 3층이 4단인데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두드러지게 큰 점이 독특하다. 지붕돌 추녀의 밑은 반듯한데 마무리 부분에서 경쾌하게 추켜올려져 있으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한 돌로 되어 남아있지만, 훗날에 보충한 듯하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몸돌의 줄어드는 비율과 지붕돌의 크기 등에 짜임새가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기단의 가운데돌에 새긴 사천왕상의 조각수법도 형식화되지 않은 멋을 보여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이나 각 부분의 아래에 새긴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탑으로 짐작할 수 있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한천사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한천사의 대적광전 앞뜰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과 탑신부 몸돌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처마의 네 귀퉁이가 날카롭게 하늘로 들려있어 경쾌한 멋을 풍긴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탑이 조성된 시기는 대적광전 안에 모셔진 한천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667호)과 같은 시대인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된다. 1탑식 가람의 전형적인 예로서 시대 양식의 비교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보문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보문사 극락보전 오른쪽에 서 있는 3층 석탑으로, 고려 명종 15년(1185) 승려 지눌이 절을 새단장하면서 나한전의 본존불인 석가여래상을 증명하기 위해, 당시 경내의 운계암 뜰에 이 탑을 세웠다 한다.
땅 위에 커다란 자연석 암반을 두어 바닥돌을 삼고 그 위에 2층 기단(基壇)과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독특한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위로 들려 있다.
형식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기둥조각 수가 줄고, 지붕돌 받침수가 4단으로 줄어드는 점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예천 간방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이 석탑은 이중(二重) 기단 위에 3층의 몸돌을 올려 세웠다. 기단부의 구성, 지붕돌의 조성수법으로 신라 하대의 양식을 보여 주는 매우 세련된 탑으로서, 이 지방의 신라 석탑을 대표할 만한 것이다.
이 마을에서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 큰절과 3기의 탑이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문헌이 없다. 다만 이 석탑이 서 있는 주변에는 석탑의 부재와 기와조각을 볼 수 있고 이 밖에 순금불상, 청동불상 등이 발견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현존 탑 이 외에도 석탑이 더 있었던 절터임을 짐작할 수 있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청송이촌리 오 층 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기단부는 아래층 기단이 땅 속에 묻혀 위층 기단의 일부만 남아있다. 탑신의 몸돌은 1층이 상당히 높다가 2층부터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나치게 두터워 보이는 지붕돌은 낙수면에 급한 경사가 흐르고 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15세기경 이 지역 원주 이 씨의 권세와 부가 융성할 때 여러 걸인이 찾아와 피해가 많자 큰스님에게 그 방법을 여쭈었다. 이촌리 고개에 탑을 세우면 손님과 걸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스님의 말을 듣고 이 탑을 세웠는데, 그 후 과연 손님과 걸인이 오지 않게 되었으나, 원주 이 씨의 권세와 부귀도 모두 몰락하게 되었다 한다.
원래 청송군 진보면 이촌리 서북쪽 고개에 있던 것을 1942년 이촌리 64-1번지(당시)로 옮겨오면서 5층으로 건립하였다고 하나, 1972년의 실태조사보고서에는 전고 2.53m, 기단 폭 1.51m의 단층기단 오층탑이며 2층 이상의 탑신은 결실되고 옥개석만 적취(積聚)되어 있다고 한다. 2007년 교통편의 등 지역주민의 이건의견에 따라 이촌리 64-1번지에서 송생리 784-137번지로 2번째 이건 되었다. 이후 2013년 청송민속박물관 전정(청송읍 송생리 784-143)으로 3번째 이건 되었으나 청송민속박물관이 폐관됨에 따라 문화유산의 보존·관리를 위해 주왕산관광단지 옛 편지전시관 내 중정으로 4번째 이건 되었다.
영양 산해리 오 층 모전석탑/국보
경북 영양군 입암면 산해리 강가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이 마을을 ‘봉감(鳳甘)’이라고 부르기도 하여 ‘봉감탑’이라 이름 붙여졌었다. 석탑 주변의 논밭에 기와조각과 청자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어, 이 일대가 절터였음을 알 수 있다.
탑은 벽돌 모양으로 돌을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흙과 돌을 섞어 낮게 바닥을 깔고, 10여 개의 길고 큰 돌을 짜서 쌓았다. 그 위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 모두 벽돌 모양의 돌로 쌓았다.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두었는데, 감실 양쪽에 둔 2개의 화강암 기둥과 이맛돌의 섬세한 조각이 장식적인 효과를 더해주고 있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독특하게도 중간정도의 높이마다 돌을 돌출되게 내밀어 띠를 이루고 있다. 지붕돌은 전탑의 양식에 따라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으며, 처마의 너비는 좁아져 있다.
1단 기단의 모습과 돌을 다듬은 솜씨, 감실의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균형과 정연한 축조방식을 갖추고 있으며, 장중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양 화천리 삼층석탑/보물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한 면에 3구씩 도드라지게 새겨 놓았는데, 손에는 각각 무기를 들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조각으로 나뉜 8곳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조성된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조각을 새겼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사천왕상(四天王像) 1구씩을 뚜렷이 드러나도록 조각했는데, 악귀를 밟고 있는 모습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으로 얇고, 평평한 모습이며 처마밑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무너지기 직전에 있었던 탑을 1974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1층과 3층의 몸돌이 많이 손상되어 보는 이들이 안타깝다. 기단부에서 탑신에 이르기까지 표면에 많은 조각들이 있어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 석탑으로, 9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양 현리 삼층석탑 /보물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12 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한 면에 3구씩 새겼다. 위층 기단은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고, 기둥으로 나누어진 각 면마다 8부 중상(八部衆像)을 조각해 두었다. 8부 중상은 통일신라 중기 이후 석탑에 등장하는데, 단순히 탑의 장식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탑신의 1층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 밑면에는 물을 뺄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고,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이 탑은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양 현리 오 층 모전석탑/보물
「영양 현리 오 층 모전석탑」은 통일신라 말이나 고려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경북지역에 집중된 모전석탑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경북지역 전탑과 모전석탑은 초층탑신의 1면에만 감 실을 마련하는 것이 특징인데 감실 좌우 문설주에 당초문을 조각하여 예술성을 높인 점은 이 석탑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모습이다. 또한 벽돌모양으로 석재를 다듬을 경우 각진 위치에 자리하는 모서리 돌들을 둥글게 처리하여 탑의 조형에 부드러움을 주고자 한 의지를 느낄 수 있는 점도 특이한 사례이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용화동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용화동 입구의 밭 가운데 자리하고 석탑으로, 2층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1층과 2층은 4단, 3층은 3단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다. 기단의 맨윗돌 일부분이 깨지고,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없어졌지만 다른 부재들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각 부재들의 비례와 균형이 잘 맞아 안정감이 느껴지는 탑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양 삼지동 모전석탑 /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절벽을 이룬 산 중턱의 튀어나온 바윗돌 위에 서 있는 석탑으로, 벽돌 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전 석탑이다.
탑은 큰 바위를 기단(基壇) 삼아 그 위로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며, 원래 3층탑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2층까지만 남아있다. 탑신의 1층 몸돌 앞면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안에서 신라 금동불상 4구가 나왔다고 하나 현재 전하고 있지 않다. 지붕돌은 아래·윗면이 모두 층단을 이루고 있다.
연대암 부근에 있었던 영혈사에 세워 두었던 탑으로 추정된다. 영혈사는 신라 삼국통일 이전에 창건된 사찰로 이 탑 또한 그 당시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1998년 석탑 해체 보수 시 석재 사리함과 사리 1 과가 출토되었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양신구동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아래층 기단은 밑부분이 땅 속에 묻혀있어 자세한 구조를 알 수 없고, 탑신은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3층에는 머리장식의 네모난 받침돌이 몸돌 대신 끼워져 있고, 각 층의 지붕돌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소박한 모습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999년 석탑을 잘 보존하기 위해 해체 복원하였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울진 구산리 삼층석탑 /보물
경북 울진군 구산리에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네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각 기단의 맨 윗돌은 윗면에 약한 경사가 있으며, 네 모서리의 선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고,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길고 네모난 윤곽이 새겨져 있으나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얇으며 수평을 이루는 처마선은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양식이 잘 나타나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일부 조각 등이 생략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9세기 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 /보물
유금사 법당 뒷마당에 서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위층 기단은 네 귀퉁이와 각 면의 중앙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윗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층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추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둥근돌을 차례로 얹어 놓았는데, 훗날 보충해 놓은 것이어서 탑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각 층의 크기가 줄어드는 정도가 적당하며, 적당히 큰 기단부에 의해 안정감이 느껴진다. 각 기단의 면 가운데에 기둥이 하나씩 새겨져 있는 것과 지붕돌 밑면의 받침이 4단인 것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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