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경주남산 포석계 기암곡 제2사지 동삼층석탑
경주남산 포석계 기암곡 제2사지 동삼층석탑(慶州南山 鮑石溪 碁岩谷 第2寺址 東三層石塔) 석탑은 삼릉계(三陵溪)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약 1.3km를 이어져 내려와 포석계(鮑石溪) 본류와 합쳐지는 한 지류인 계곡 안에 절터가 있고 그 남쪽에 위치한다.
《東京雜記》에 “바둑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바둑판 모양으로 깎은 돌이다. 이곳은 옛날 신라 때 신선들이 모여서 바둑을 두면서 놀던 곳이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 골짜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장구터’라고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기암곡’이라 불리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불린다.
이 석탑은 원래 도괴되어 있던 것을 2003년 말부터 2004년 초반에 이르는 사이에 原材를 최대한 활용하고 散逸된 부재는 충실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新材로 복원한 부분은 하층기단 면석, 2층 탑신석, 3층 탑신석과 옥개석, 노반이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하층기단 주위에 장대석을 깔아서 塔區를 두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 석탑은 신재로 복원된 부분이 많은 약점이 있으나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경주남산 지암곡 제2사지 삼층석탑
동남산東南山지바위골 절터에 있는 이 삼층석탑은 무너져 있었는데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2000년과 그 이듬해에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하고 없어진 부재를 보충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기단은 단층(單層)으로 면석 받침과 면석은 각각 4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면석 각 면에는 2개의 모서리 기둥隅柱과 1개의 버팀기둥撐柱이 새겨져 있다. 기단 위에는 몸돌 받침이 있고, 1~3층 지붕돌 밑면 받침은 모두 4단이다. 높이는 3.77m으로, 9세기 후반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삼층석탑
석탑의 규모, 치석방법 등 별석 사용으로 인한 부재의 구성 방법, 석탑의 비례, 장엄구의 구성 등을 통해 살펴본 결과 통일신라 후기 9세기 후반 이후에 축조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경주 남산에 조영된 석탑 양식 및 시기를 추정하는데 중요한 사료이다. 1977년 복원된 석탑이나, 원형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어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
경주 남산 포석곡 제6사지 오층석탑은 백제계 석탑으로 추정되며, 신라의 왕경이였던 남산에 백제계 석탑이 세워졌다면 이는 매우 소중한 사례이다. 제작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즈음에 제작된 과도기적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석탑이 백제계가 확실하다면 왕궁에 인접하고 왕경이 훤이 내려다보이는 남산 능선에 세워진 탑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크고, 통일신라 시대 후반에 조성된 경주 남산 유일의 백제계 석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남산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이 삼층석탑은 경주 남산의 동록(東麓)사자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해발 310m의 완만한 능선 사면斜面에 있다. 이 석탑은 무너져서 1층의 탑신(塔身)받침을 제외한 나머지 탑재가 능선과 계곡에 흩어져 있었는데,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2000년에 발굴조사하고, 2003년 1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네모난 바위 윗면을 조금 다듬어 기단으로 삼았고, 그 위에 별개의 돌로 만든 몸돌 받침이 올려져 있다. 1~3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각 지붕돌 밑면 받침은 모두 4단이다. 이 석탑은 경주 남산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며, 9세기 후반에 건립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현재 높이는 3.88m로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석탑 중에는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 /보물
천룡사의 옛터에 무너져 있던 탑으로, 1990년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여 새로이 복원한 것이다. 1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인데, 1990년에 실시된 조사과정에서 기단이 1단임이 밝혀졌다.
탑신의 몸돌 아래에 새긴 괴임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는 점과, 지붕돌의 낙수면이 경쾌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단의 일부와 머리장식의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음이 안타깝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보물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창림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하여 경주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 가람에서 나타나는 층(공간)별 독립된 공간이 창림사에서 확인된 바 있으며 확장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 팔부신중을 조각한 석탑, 즉 삼층석탑이 조성 됐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탑의 조성시기는 창림사지에 있는 세 개의 석탑 중 하나의 석탑의 사리공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를 통해 신라 문성왕(855년 경)때로 추정하고 있다.
석탑은 2중기단을 조성한 후 3개층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이다. 기단부의 구성은 상, 하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는 통돌에 하대면석과 지석으로 구분하여 치석하였고 면석에 각 돌마다 3개의 탱주를 두었다. 탱주의 개수는 석탑 변천의 가장 가시적인 지표로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로 석탑의 조성시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10개의 석재로 구성된 탑의 하층기단부의 구성은 비슷한 시기에 8개의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고식에 가깝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상부기단 면석에는 8부신중상을 양각하고 1구의 탱주를 두어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그 외 면석은 신재로 교체되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창림사 탑 팔부신중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예는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인용사지탑, 진전사탑 등과 인왕상이 조각된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원원사지탑 등과 조각수법을 비교해 볼 때도 기량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1976년 복원을 거치며 2, 3층 탑신과 상층 팔부신중상 중 4매, 기단석재 일부가 신재로 교체되고 상륜부가 없어 탑의 원형이 많은 부분 훼손된 상태이나, 창림사지는 신라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지발굴을 통하여 석탑의 위치도 확인된 바 있고 경주 남산에 보존되고 있는 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또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재를 중심으로 탑의 조성수법을 살펴보면 탑의 규모, 기단부의 구성과 상층기단부면석의 팔부신중상의 조각수법 등에서 신라석탑 조형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 남산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보물
서남산 용장리(용장사지 입구)에서 삼릉 쪽으로 약 600m 가량 가면 “앞비파마을”이 있다. 이 마을을 뒤로하고 남산 정상을 향하여 약 800m 떨어진 지점, 삼각산의 능선이 내려와 계곡과 만나는 곳에 비파골 제2사지가 있다. 이 절터 북쪽의 정상부에 자연 암반을 기단부로 삼은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위치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작은 산봉우리이기는 하지만 정상부에 석탑을 세움으로써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룸은 물론 멀리서도 쉽게 인식될 만치 돌올하게 솟아 있어서 종교적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은 늠비봉 오층석탑이나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서로 상통하는 특색이다.
그러나 이 석탑은 2층과 3층의 탑신석을 결실하여 新材로 복원하였다. 다만 자연 암반에 거칠게 半加工한 四角形 塊體 형태의 기단부를 형성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는 점이나,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높이 2m 남짓에 불과한 작은 탑이 왜소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보이게 하는 효과를 거두면서 단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인정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경주남산 국사곡 제4사지 삼층석탑
금오산 자락 아래 해발 약 230m 지점의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국사골 제4사지는 남산 동쪽 남산 순환도로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360m 정도 올라가다 북쪽으로 난 계곡을 건너 다시 소로를 따라 북쪽 산등성이를 향해 약 300m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대숲을 지난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고깔바위 아랫부분에 해당하며, 서남쪽으로는 南山 浮石이 건너다보인다.
절터에는 모두 7개의 축대가 불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5개소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삼층석탑은 이 절터의 가장 높은 지점에 서 있다. 지대석과 북서쪽 기단 면석만이 원위치를 지키고 있고 나머지 부재는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에서 2000년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2001년 말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국사골 제4사지 삼층석탑은 대체로 9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통일신라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그 주요한 근거로는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과 달리 단층기단을 채택하고 있는 점, 기단 면석 중앙의 탱주가 1개인 점, 기단 갑석 상부 중앙에 별석의 탑신받침을 마련한 점, 각 옥개석의 옥개받침이 일률적으로 4개인 점, 그리고 상륜부를 제외한 탑신부까지의 높이가 5m 남짓인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제작시기 추정의 근거임과 동시에 이 탑의 특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이 탑에는 일반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과 구별되는 특징이 한두 가지 더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지대석 주위로 탑구를 마련한 점, 기단 면석 중앙에 별석으로 제작한 탱주를 삽입한 점 등이 그것이다.
조형적·예술적으로 이 탑과 비슷한 수준의 작례가 아주 드문 편은 아니라는 사실, 6매를 제외한 탑구의 석재 대부분과 3개의 탱주석, 그리고 기단 갑석 위의 탑신받침 등이 원부재가 아닌 신재로 복원된 점 등을 감안하여도 그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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