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법광사지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법광사지 삼층석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이중 기단에 삼층 탑신을 올린 양식으로, 탑신 맨 아래 층의 받침이 굽형 괴임**** 형식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통일신라 석탑 양식이 발달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조탑경*****이 확인된 석탑들 중에서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을 조탑경으로 삼은 유일한 석탑이라는 점, 석탑을 만든 기록을 통해 탑을 세운 명확한 연대를 알 수 있어 10세기 석탑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 등에서 국가유산적 가치가 크다.
* 기단부(基壇部): 건축물의 터를 다듬은 후 바닥에서 한 층 높게 쌓은 부분.
** 탑신부(塔身部): 기단(基壇)과 상륜(相輪) 사이의 탑의 몸체 부분.
*** 상륜부(相輪部): 탑의 꼭대기에 있는 원기둥 모양의 장식 부분.
**** 굽형 괴임(굽型괴임): 탑신(塔身)의 아래를 받치는 납작한 굽 모양의 굄돌.
***** 조탑경(造塔經): 불탑을 세우는 근거로 삼아 탑 안에 넣는 경전. 원래 불탑이나 불상을 세울 때는 부처의 진신 사리를 넣어 두어야 하는데,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전도 부처의 몸과 마찬가지라고 보아 사리 대신 경전을 넣어도 불탑이나 불상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자료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포항 보경사 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보경사 경내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약간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일명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부르는데,『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는,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 현종 14년(1023) 3월에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보물
탑이 위치하고 있는 미탄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왕경 내에 형성된 도시가람으로 지리적 입지 상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사찰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왕경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고 문헌자료와 발굴된 유물로 확인이 되고 있는데 발굴조사과정을 통해 「味呑」명 기와가 수습됨으로써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탄사가 이곳임이 밝혀졌고, 추정 금당지 및 강당지를 비롯해 남문지 등 사역의 일단이 확인된 바 있다.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6.12m의 규모로, 총 35매의 부재로 구성되어 있다. 1980년 이전까지는 도괴로 인하여 기단부와 탑신부의 일부 부재가 소실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나 1980년에 남은 부재들을 모아 복원을 하였으며, 소실된 부재는 새로운 부재를 치석하여 조립하였다. 이때, 신라석탑 기초부의 형식 등이 파악되어 아직까지 신라석탑의 기초부를 논할 때 이를 근거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비록 파손 및 결손된 부재를 신재로 보강 및 보충하여 신재와 구재 간 이질감이 있지만, 이 탑은 신라 왕경 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탑이자 최초로 기초부 조사를 실시한 석탑이며 또한, 그 형태가 정연하고 적절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또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 변화되는 모습으로 과도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석탑이다. 이 석탑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9세기 혹은 10세기 초에는 앞 시대에 비하여 석탑의 크기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흐름과는 달리 비슷한 시기의 작품에 비해 드물게 규모가 큰 작품이어서 가치가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중기단으로 체감률의 비례가 적절하여 장중한 느낌이 드는 우수한 작품이다.
특히, 일반적인 석탑의 판축기법과 달리 잡석과 진흙을 다져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한 단이 완성될 때마다 굳히면서 쌓아나가는 기초부의 판축 축조방식이나 기단부 적심 내의 지진구 출토 등에 있어서 특이하고 학술적인 가치가 있는 새로운 자료를 지니고 있어서 한국석탑에 관한 연구에 실증적 자료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감산사지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경주에서 울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동편, 토함산 준령의 서편에 위치해 있는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聖德王) 18년(719)에 중아찬(重阿湌) 김지성(金志誠)이 세운 절이다. 무너져 있던 이 탑은 1965년에 다시 세웠으며 현재 높이는 약 3.3m이다.
기단은 2층으로 하였는데, 1층 기단은 4개의 돌로 구성되었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안 기둥을 각각 새겼다. 2층 기단의 각 면에도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각각 새겼으며 덮개돌은 2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1층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개의 돌로 하였고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에는 4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윗면은 낙수면으로 되어 있다. 현재 2층과 3층 몸돌은 없어지고 지붕돌만 남아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잘 보여 주며, 지붕돌의 추녀가 직선이고 전각(轉角)이 들려 있어 경쾌한 느낌을 주고 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숭복사터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두 탑 모두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서로 같은 규모와 양식을 하고 있어서, 아래·위층 기단에 기둥 모양을 새기고, 특히 위층 기단에는 기둥 조각 사이의 면마다 8부중신(八部衆神:불가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한다는 여덟 무리의 수호신)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에도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1층 몸돌 네 면에는 문(門)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현재 두 탑은 일부 석재가 파괴되거나 없어진 채 남아 있다. 동탑은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층 몸돌과 머리장식이 없어졌고, 서탑도 기단 일부가 파괴되고 탑신의 2·3층 몸돌과 3층 지붕돌,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기림사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현재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 있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놓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있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로 이루어진 머리장식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이 2개에서 1개로 줄어들고, 지붕돌받침이 4단인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오야리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이 탑은 경주에서 포항으로 향하는 경포산업도로의 동편 산 중턱에 있으며, 절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벽돌탑을 모방한 3층의 석탑으로 높이는 약 2.5m이다. 거대한 자연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윗면의 평평한 곳에 2개의 돌로 받침대를 놓고 몸돌을 올렸다. 1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남쪽면에는 높이 37cm, 폭 31cm 정도의 작은 불상을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감실의 아래 받침돌의 윗면과 이맛돌의 아랫면에 각각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돌로 된 문이 있었던 것 같다. 4개의 돌을 짜맞춘 1층 지붕돌은 아랫면에 1단, 윗면에 5단을 이루었다. 역시 4개의 돌을 짜맞춘 2층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으며 파손이 심한 2층과 3층 지붕돌은 1개의 돌로 1층 지붕돌과 비슷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3층 몸돌과 윗부분[相輪部]는 없어졌으며 3층 지붕돌 윗면에 지름 20cm, 깊이 10cm 정도의 찰주공이 있다.
이 탑은 구성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황오동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이 탑은 원래 효공왕릉(孝恭王陵) 부근인 경주시 동방동 장골 사자사(獅子寺) 터에 무너져 있던 것이다. 1936년 경주역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는 것을 기념하여 이곳에 다시 세웠다.
큼직한 2단 받침 위에 4개의 돌을 사용하여 기단을 올렸는데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위에 덮개돌을 올리고 바로 모서리기둥을 조각한 1층 몸돌을 놓았는데 몸돌 받침이 원래 없었는지 잃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층 지붕돌의 아랫면에는 4단의 층급받침을 나타내었다. 2층과 3층 몸돌은 1층에 비해 폭은 많이 줄지 않고 높이는 아주 낮아졌다. 또 2층과 3층 지붕돌은 1층과 모양은 비슷하고 규모만 작아졌다. 탑 전체 모습은 1층 몸돌이 다른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다 폭에 비하여 높이가 높은 편으로 탑이 훤칠하게 보인다. 옆에 고려시대의 4각형 연꽃으로 된 대좌가 4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옆면 4곳에는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2개씩 조각하였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에서 고려 석탑양식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남사리북삼층석탑/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이 탑은 1973년 경주경찰서 신청사를 준공할 때 기단부基壇部만 남겨두고 지붕돌 3개를 경찰서 정원으로 옮겨 보존해 오다가, 주민들의 꾸준한 요청에 의하여 1995년 원래의 위치인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명칭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단층인 기단은 원래의 돌과 같은 크기로 새로 만들어 4개의 돌을 짜 맞추었는데 모서리기둥과 안기둥을 조각하였다. 그 위에 3층으로 몸돌과 지붕돌을 올렸다. 지붕돌의 밑면에 새긴 5단의 받침은 비교적 뚜렷하다.
탑을 다시 세우고 남은 돌들은 지금도 탑 서쪽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원래의 모습을 보다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탑의 건립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보물
「경주 (전)염불사지 동ㆍ서 삼층석탑{慶州 (傳)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은 2003년과 2008년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를 거쳐, 8세기 초반에 창건되어 12세기에 폐사된 사찰로 추정된다. 이 사지에 위치한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기인 8세기 전반에 건립된 5.85m 높이의 삼층석탑이다. 두 탑은 모두 상, 하 2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대부분 사라지고 노반석(露盤石, 탑의 상륜부를 받치는 돌)만 남아 있다.
동탑은 1963년에 불국사역 광장으로 이전되었던 것을 2009년 사지 정비와 함께 원위치에 이전 복원되었으며, 탑지 발굴조사 결과 서탑과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초부를 추가로 조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서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을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동탑과 함께 원위치에 복원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동탑과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두 탑은 복원 과정에서 일부 새로운 부재들이 사용되었으나, 전체적인 조영 기법과 양식, 석탑 기초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등을 고려할 때, 8세기 전반에 건립되어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과 양식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고려할 때 국가지정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보물
동·서 쌍탑의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사적 경주 원원사지 안에 있다. 원원사(遠願寺)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밀교(密敎)를 계승한 안혜(安惠)ㆍ낭융(朗融) 등이 김유신ㆍ김의원ㆍ김술종 등과 뜻을 모아 호국의 사찰로 창건하였다고 한다.
동ㆍ서 삼층석탑(높이 약 7m)은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31년 가을(조선건축사론 중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론(건축잡지 1933.11월호. 藤島亥治郞)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양식으로 조성된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며, 하층기단 면석과 갑석 및 상층기단 면석은 각각 8매, 상층기단 갑석은 4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층기단의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 하층갑석의 상면에는 2단의 상층 기단 괴임이 있으며, 상층갑석 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의 머리는 짐승이나, 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며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고 있는 형상이다.
1층 탑신석 이상 3층 옥개석까지는 모두 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층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4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 괴임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과 앙화석이 남아 있다.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 표현형식, 옥개석의 돌다듬기 수법, 기단부와 탑신부에 구현된 양식, 석재의 조립방법 등으로 보아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에서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 등 석탑의 조각기술, 구조적 특징, 표현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 미술사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경주 마동 삼층석탑/보물
경주 석굴암 삼층석탑/보물
불국사 서북쪽 언덕의 밭 가운데에 서 있는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매, 위층 기단은 8매의 돌로 짜여져 있다. 각 층 모두 모서리에 하나씩, 가운데에 2개씩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3층을 이루는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와 아래면에는 방울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이 나타나 있지 않아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에 널리 유행하던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의 석탑 중의 하나로 보인다.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불국사와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자료 출처: 문화재 연구소, 문화유산포털)
석굴암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m지점 언덕에 서 있는 탑이다.
2층을 이루는 기단(基壇)은 원형과 8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며 그 위로 4각의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 올렸다. 기단의 모습은 매우 독특한 예인데 그 유래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 8각의 조화가 아름답고, 세부 수법의 경쾌함이 돋보이는 석탑으로, 8세기 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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