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39. 안서에 도착하다.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3. 28.
반응형


안서에 도착하다.

개원(開元) 15년 11월 상순 안서(安西) 에 도착하였다.
이때 이곳의 절도사는 조군(趙君)이었다. 또한 안서에는 중국인 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이 두 곳 있다. 이곳은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으며, 고기는 먹지 않는다. 대운사(大雲寺) 주지 수행(秀行) 스님은 강설에 능한데, 전에는 장안의 칠보대사(七寶臺寺)에 살던 스님이었다. 대운사의 유나(維那)인 의초(義超) 스님은 율장에 해박한데, 왕년에는 장안의 장엄사(莊嚴寺)에 있던 스님이었다.
또 명운 (明惲)이라는 대운사 상좌(上座)는 큰 수행을 갖춘 분으로 역시 장안의 스님이었다. 이 스님들은 대
단기 훌륭한 주지로서, 도심(道心)이 매우 깊으며, 공
덕을 숭상하는 이들이다. 용흥사 (龍興寺) 주지 법해(法海 ) 스님은 중국인으로 안서에서 태어났지만 학식과 인품이 중국 본토인과 다르지 않다.
우전에도 용흥사(龍興寺)라는 중국 절이 하나 있다.
00이라고 하는 중국 스님이 그 절의 주지다. 대단히
훌륭한 주지로 허베이(河北) 기주(冀州) 출신이다. 소륵(카슈가르)에도 또한 중국 절인 대운사(大雲寺)가 있다.
여기도 중국 스님 한 명이 주지로 있다.
그는 민주 출신이다.

원문 혜초


譯 지안
개원(開元) 당 15년 11 월 상순은 727년 12월 18일~27일 사이에 해당한다 안서에는 당나라가 설치한 안서도호부의 치소(治所)가 있던 곳을 말한다. 일종의 관청 이름 같은 것으로 고유한 지명이 아니다. 혜초가 이곳에 왔을 때의 치소는 구자국(쿠차)이었다. 그러니까 안서는 곧 구자를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 고증을 거처 밝혀 놓은 학자들의 설에 의하면 안서도호부는 대도호부로서 대도호는 종 2품이고 부대도호는 종 3품의 벼슬자리라고 하였다.

당시 안서대도호 겸 적서절도사(磧西節度使)는 친왕인 연왕(延王) 회(洄, 두섬杜暹)였다. 그러나 대도호인 친왕은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그 대신 부대도호가 대도호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혜초가 절도사라고 한 조군(趙君)은 부대도호로 본명이 조이정이다.
대운사는 수(隋) 나라 문제가 지은 절로 알려져 있다. 원래는 광명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당나라 측천무후( 則天武后 ) 때 대운경 (大雲經)을 헌상받은 무후가 장안과 낙양을 비롯한
각처에 대운경사를 짓게 해 전국에 여러 개의 대운사가 있었는데 현종 때에 와서 개원사(開元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칠보대사(七寶臺寺)는 본래 장안에 있던 광택사(光宅寺)였다. 이 광택사를 짓게 된 유래는 한 망기가(望氣家,구름을 보고 운세를 점치는 점술가)가 장안에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곳이 있어 거기
에 땅을 팠더니 땅속에서 석함이 나오고 그 안에 부처님 사리가 나왔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짓고 광택사라고 불렀는데 후에 측천무후가 이 절에 칠보대를 안치하고 절 이름을 칠보대사로 바꾸었다는 절이다.
장엄사에도 수나라 문제가 황후를 위해 지은 선정사(禪定寺)가 있었는데 당 고조 때(618)에 장엄사로 개명하였다. 절이 워낙 훌륭해 천하에 장엄사보다 더 좋은 절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 절들에 관한 기록은 장안지(長安志)에 기록되어 있다
용흥사도 대운사와 마찬가지로 칙령에 의해 각처에 지
어진 절로 신룡 원년(705년)에 중흥사관(中興寺觀)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3년 뒤에 용흥사로 개명되었다.
유나(維那)는 도유나(都維那)라고도 하는데 절의 대중의 기강을 세우는 책임자로 수행을 지도하는 사람이며, 상좌(上座는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스님을 호칭하는 말이다. 승차(僧次,스님들이 않는 자리 순서)에 있어서 상위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범어 스타비라(sthavin)를 번역한 말로 대중을 통솔하는 역할을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