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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 다가서기 저자-혜초 /역자-지안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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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慧超, 704~787)는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천축국(오늘날 인도)을 갔다와 여행기《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저자 혜초는
신라에서 태어나 성덕왕 18년(719년) 16세 때 당나라에유학을 갔다. 인도 출신의 밀교승 금강지를 만나 사사하고, 스승의 권유로 723년에 광주를 떠나 바닷길을 통해서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다. 약 4년 동안 인도와 서역의 여러 지역을 순례하고 727년 11월 구자를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당에 돌아온 혜초는 스승 금강지 밑에서 밀교를 연찬하다가 740년 스승을 도와서 '대교왕경'의 한역과 필수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스승 금강지가 입적하자 작업을 일시 중단하였다.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으로부터 대교왕경 강의를 받다가 774년 불공도 입적하자 그의 유언을 받들어 제자가 되어 관정도량 개설에 힘썼다. 780년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80여 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년간 밀교 연구와 전승에 매진하였다

역주/지안(志安)
통도사에서 벽안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받았다. 항일독립운동가이며, 한문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역경의 선각자였던 운허 스님의 강맥을 잇고 있다.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강주, 조계
종 고시위원, 조계종교육원 역경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35년간 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고 있다.
불교학당과 반야경전교실을 개설하여 재가불자를 위한 교육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통도사 반야암 주지로 있다.
저서로 [기신론 강의., "신심명 강의, "기초경전 해설, 금강경 이야기,조계종 표준 금강경 바로 읽기. 등과 역서로 "대반니원경", "대승기신론 강해", 등이 있다.


왕오천축국전의 내용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중국 남부의 광주에서 배를 타고 남지나해를 통해 인도 동부로 들어가 지금의 바이샬리(본문의 폐사리국)에서 나체 수행자를 본 것을 시작으로 천축에서 여행이 시작된다.
원래 천축이라는 말은 고대 중국 사람들이 인도
를 지칭한 말이었다. 인도를 동'서 .남 :북과 중앙으로 나누어 다섯 천축국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전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은 내용이 완전하지 않고 빠진 부분이 많은 결본으로 전
해졌기 때문에 누락된 앞부분과 뒷부분의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런 이유로 혜초의 순례도정기의 자초지종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해지는 내용대로 도정을 살펴보면 먼저 동천축에서 불교 성지들을 참배하고 중천축에서 남천축으로, 그리고 서천
축으로 갔다가 북천축으로 이동하는 순서로 다섯 천축국을 순례한다. 그런 다음 혜초는 서역으로 가 대식국( 아랍)의 페르시아까지 갔다가 중앙아시아의 몇몇 호국을 둘러보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구자국을 거쳐서 중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기간이 4년이 걸렸는데, 723년에서 727년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에 40여 개의 나라를 방문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하였다
최초의 인도 견문기인 법현의 "불국기" 는
399년부터 414년까지 약 15년 동안 서역을 지나 인도에서 범본 경전을 구해 중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기행문이며,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629년 8월에 장안을 출발한 현장이 645년 3월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오기까지 15년 8개월 동안의 인도 전역과 중앙아시아 일원을 순방하고 기록한 것으로 당 태종의 칙령에 의해 646년에 변기해했가 편찬한 것이다. 변기는 현장의 제자로 현장이 구술한 말을 받아
적어서 대당서역기가 이루어졌다. 또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견문록인데 671년부터 694년까지 23년 동안 보고 들은 내용이다. 이들 3대 여행기에 비해 혜초의 여행 기간은 매우 짧은 셈이다. 기록의 양도 가장 적고 견문의 내용도 매우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물론 방문한 나라에 따라 기술한 내용의 길고
짧을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문체의 스타일은 비슷하다. 먼저 출발지에서 목적지에 이르는 방향과 소요 시간을 밝히고, 다음으로 도성의 이름과 위치 등을 밝힌다. 도성의 규모라든가 통
치 방식에 대해 언급할 때도 있다. 기후와 지형, 특산물과 음식 복장과 풍습 그리고 언어와 종교를 기술하면서 마지막으로는 불교가 어느 정도 행해지는지를 꼭 기술하고 있다. 소승이나
대승이 행해진다거나 또는 대소승이 함께 행해진다는 등의 말을 하고 있다.
이런 점을 살펴보면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은 여행을 계속하면서 그때그때 보고 들은 것을 간명하게 요약 기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분한 시간을 갖고 전후 사정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곳의 느낌과 정험을 직접 그대로 기술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혜초는 사이사이에 오언으로 된 시를 5편이나 싣고 있다. 먼 타국에서 느끼는 쓸쓸함을 매우 서정적으로 읊은 시도 있다.
"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한 펠리오가 평가한 것처럼 '불국기'와 같은 문학적 가치도 없고, '대당서역기'처럼 정밀한 서술도 없지만 순례자 혜초의 피부에 와 닿은 현실 감각은 무척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혜초는 오늘날로
말하면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 러시아 등 여섯 나라의 땅을 밟은 셈이다.
한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원래 3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절략한 것이 지금 남아 전하는 것이라 할 때 이 절략된 것을 두고 원본의 가치를 제대로 논할 수 없는 점도 있다.
원본을 혜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필사한 것이라면 그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펠리오가 처음 왕오천축국전 을 발견했을 때는 제목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이 앞뒤가 잘려나간 두루마리에 한 줄에 30자 정도 되는 230줄 총 6,000여 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이었다. 내용을 읽어 보고 인도 등지를 여행한 어느 구도승의 기
행문임을 알게 되었다. 펠리오는 또 당나라 때 혜림이 지은 일체경음의 제100권에 있는 혜초전에 나오는 낱말과 돈황발견 필사본에 같은 말이 많고 뜻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음을 알고, 이 필사본이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라고 확신하여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돈황발견 필사본, 제목도 없고 저자의 이름도 명시되지 않은 것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인 1909년에 청나라 학자 나진옥이 그의 돈황석실유서  제1책 속에 돈황발견 필사본을 영인해 넣어 교록찰기를 붙여 설명하면서 이것이 일체경음의 에 나오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간추려 쓴 절략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돈황발견 필사본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연구가 여러 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11년 일본의 후지다는 나진옥의 영인본을
바탕으로 '왕오천축국전' 주석서를 펴냈다. 혜초왕오천축국전전석이라는 이름의 책은 법현의 불국기,현장의 대당서역기,송운의 송운행기, 의정의'남해기귀내전' 등 인도 견문을 수록한 책들과 신당서 ,구당서 판등 역사서를 참고하여 왕오천축국전을 주석했다. 이때까지도 혜초의 국적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혜초를 중국 스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5년에 다카쿠스준지로에 의해 신라 스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1938년에는 독일의 동양학자 푹스(v Fuchs)가 "왕오천축국전"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최초의 번역서가 나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3년에 육당(제) 최남선( )이 삼
국유사(디씨했 부록에 [왕오천축국전 원문을 싣고 해제를 붙여 책을 낸 적이 있다. 그 후 1961년에 통문관에서 발행한 양한승의 번역본이 니온 이래 70년대에 이석호(1970년 역), 이영무(1972년 역), 김규성( 1973년 역)의 번역이 나왔고 80년대에 동국역경원에서 발행한 한글 대장경 184권에 번역이 실렸고 한정섭 ( 1986년 역)의 역본이 나왔으며, 90년대에 김찬순(1990년 역)의 역본과 가산문화원에서 정병삼예씨 199년 역)이 번역한 역본이 나왔다. 최근에는 2004년 정수일교수의 역본이 나왔는데 일본 사람들의 역본 등 종래의 여러 주소를 참고하여 매우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의 원본은 아직도 프랑스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지안, 역 왕오천축국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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