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아타अथ 요가~누샤싸남योगानुशासनम्(요가 아누샤싸남)
♤아타~지금. ♤아누샤싸남~가르침, 설명, 전수
💚 지금부터 요가योगा의 가르침을 시작하겠다.
그런데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니는 궁금증 ?
☆요가는 무엇일까? 잡히는 존재일까? 그냥 흘러가는 존재일까? 어째든 요가 가르침이 지금 시작된 거다. 선가에 이르기를 `현전직하`라 이르니 바로 지금 숨쉬고 내뱉는 이 순간에 이미 요가의 가르침은 끝났다. 왜냐 요가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끝없이 갈고 닦고 버리는 연습이다. 갈고 닦는 것도 버리기 위함이다.
대표적으로 불교에서는 탐ㆍ진ㆍ치를 갈고 닦아 버리니 戒ㆍ 定ㆍ慧로 거듭난다고 한다.
요가의 가르침도 매 한가지 일 터, 웅크린 동굴 속의 어둠의 제왕을 밝은 세상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인 만큼 지금 요가의 가르침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이다.
제2절
💚요가는 마음의 동요를 멈추게 하는 것이다.
♤찓따चित्त~개별적 의식, 무의식/찓뜨चित्~초월적 의식
♤위르띠वृति~동요하는, 소용돌이치는
♤니로와निरोव~멈춤, 중단, 그침
☆마음의 동요: 따마스(지루하거나 무기력한), 라자스(동요되거나 흔들림), 사뜨와(고요한)
☆마음의 동요.~감각과 의식 작용의 상호 관계에서 내ㆍ외부에서 개입된 요소들에 의해 인식 작용이 갈등요소(번뇌화)로 변하는 것.
☆ 예를 들어 보자.
👉 음식을 먹는다.(원초적 전제: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반복적 전제)
👉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는다. (중의적 전제)
1. 원초적 전제는 건물의 기초라고 한다면, 반복적 전제는 대들보가 되고. 중의적 전제는 섯가래가 된다. 맛있는 음식은 처음부터 알 수 있는게 아니 듯,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반복되는 감각의 인식이 필요하다. 업식으로 저장되어 간다고나 할까? 그러면 아내가 해 주는 음식을 먹는다. 좋은 음식일까? 싫은 음식일까? 맛이 있을까? 맛이 없을까? 또한 선택의 기준은 아내일까? 음식일까? 이는 감각처와 받아들이는 곳이 상호 작용하여 어떻게 나타날런지는 알 수가 없다.
2.쌓이고 쌓이고, 반응하고 또 반응하고. 그렇게 존재하는게 지금의 내가 가진 아뜨만인데, 아뜨만이 경계에 반응하면서 작용하고 동요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텐데 작용을 제어하고. 마음의 동요를 멈추게 함은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고 수행의 한 과정으로 여겨야 되는게 아닐지.
3.찓따는 마음을 총체이고, 기본적인 마음은 아함까라 혹은 자아,라고도 하며 그것을 "나"라고도 부릅니다. 분별이나, 판단을 하며 지성이라고도 일컫기도 합니다. 또한 외부적인 것에 감각적으로 끌리는 마음의 단계를 마나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 외부로 부터의 끌림에 자재로운 이는 이미 요가의 수행을 마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동요를 뛰어 넘어 자재한 해탈의 길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멈추지 않고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5. 상호 작용의 정화와 조율이야말로 요가의 참 공부라 할 만 합니다.
👉따다~तदा/ 그러면, 👉드라스투ㅎद्रष्टुः/인식 하는 자, 무엇인가 아는 자, 경험하는 자. 👉스와루~뻬स्वरूपे / 본성, ex)स्वरूपः मोक्षः। 자성으로 돌아 옴이 해탈이다. 👉아와스타남अवस्थानम्/머무르다,기거하다, 정립하다.
💚 그러면 인식의 주체(인식자)는 자성(본질)에 머무르게 된다.
1. 나는 언제나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감각들에 예민하게 또는 무디게 반응하는 인식에 놀라곤 합니다. 그런 인식 들, 좋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나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본성은 좋고 나쁜 것에 좌우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좋고 나쁨은 오랜 습관(까라, 업)에 의해 끄달릴 뿐입니다.
2. 자성을 찿아가는 길에서 방해물을 치우면 빠른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곳은 험한 산 길이 될 수도 있고, 잘 닦인 고속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성이란 고향에 가기를 소망한다면 단지 시간의 길고 짧음만이 문제가 될 뿐, 언제가는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감각과 인식의 오류를 걷어낸다면 말입니다.
👉위릇띠वृत्ति/변형, 유형 👉싸루쁘얌सारूप्यमितरत्र<सारूप्यम् इतरत्र>/동일화 👉이따라뜨라इतरत्र/다른 상태
❤ 참자아(본성, 자성)가 나타나지 않을 때에는 마음 작용의 여러 모습들을 자신이라 여긴다.
1. 오랜 시간 길 가에 흐트러진 돌 무더기를 길의 본질로 알고 다녔다. 걷다가 돌 부리에 바치어 발가락이 아파도 당연하게 생각하였다. 돌부리와 돌무더기는 내가 길을 가는데 장애였지만, 그 장애를 인식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2. 인식과 감각이 바뀌자 돌무더기를 걷어내고 돌부리를 치웠다. 비로소 길이 바르게 보이게 되었다.
3. 온갖 감각과 인식이 나의 자성을 왜곡시킨다. 왜곡되어 표현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인 줄 안다.
4. 오랜 습관들을 올바르게 걷어 내야 비로소 자성에 바로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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