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절 순례/경북의 사찰

비슬산 유가사-113

by 돛을 달고 간 배 2006. 12. 10.
반응형

비슬산은 대구남방 10여km 밖에 있는 산이다. 비슬산의 산행기점은 산의 서남쪽에 있는 음동마을. 비슬산으로 가려면 구마고속도로와 나란히 뻗어있는 5번도로를 이용하여 유가면 유가사로 직접 가거나 대구시내에서 현풍행 버스를 탑승하여 현풍에서하차한 다음, 유가사행 버스를 타면 된다.(교통편 참조)
비슬산은 높이 1084m나 되는 산으로 대구분지를 형성하는 주요산이다. 정상은 암봉으로 되어 있으며 비슬산은 정상에서 서북방향으로 뻗어 낙동강으로 향하는 능선보다는 남동 및 남쪽으로 뻗어있는 능선이 더 높다. 따라서 산행코스도 정상에서 남동 및 남쪽 방향 능선을 따라 나 있다.
산행은 사효자굴에서 시작, 유가사를 거쳐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한 도성암으로 올라간 다음 능선으로 붙어 정상으로 간다. 정상에서는 북에서 남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의 모습이 장관이다. 정상에서는 남동쪽으로 솟아있는 988미터봉을 거쳐 1058미터봉인 조화봉까지 간다. 이 능선은 정상과 고도차이가 별로 없는 높은 고도에다 초원마저 드넓어 억새가 필무렵엔 볼만하다.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계절은 봄에 진달래가 필 때이다. 그 외의 계절은 가지가 유난히 강인한 고산의 진달래와 기타 잡목들 때문에 길을 벗어나 산록으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다. 강풍에 잘 자라지 못한 채 가지만 쇠줄처럼 강인한 진달래류와 잡목들이 무성하여 발걸음이 편하지 못한 것이다. 그외엔 대체로 평탄한 산길을 통해 시원한 능선 종주를 즐기게 되는데 조화봉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와 하산은 1034미터봉으로 가서 능선을 따라 내려다가가 유가사 아래쪽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음동 위쪽에있는 양동에 닿게된다. 혹은 조화봉에서 바로 자연휴양림과 소재사가 있는계곡으로 내려서서 양동으로 나와도 된다.
비슬산은 진달래꽃이 군락을 이루어 봄에는 정상부에서 조화봉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마치 분홍빛으로 염색을 한 듯 일제히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비슬산의 진달래는 지리산 바래봉처럼 주위에 큰 나무가 없어 진달래의 아름다움이 더욱 두드러진다.
위의 산행코스에 걸리는 시간은 대충 5시간정도이다.



1979년 중창된 유가사 대웅전은 맞배지붕에 다포계 양식의 공포를 지녔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외벽에는 산수도가 그려져 있다.

중앙의 불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위시해 좌우로 문수, 보현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목조로 조성했다. 후면에는 1996년에 봉안한 영산회상도가 있고 좌우로 칠성탱과 신중탱이 봉안돼 있다. 칠성탱은 1966년 우송(友松)스님이 그렸으며 신중탱은 조성연대를 알 수 없으나 칠성탱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화봉(華峰) 등 5명의 스님과 사미 2명이 참여해 조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영산회상도와 지장탱, 괘불 등이 대웅전에 있었으나 1993년 모두 도난 당했다. 그 중 괘불은 영험이 있어 인근 마을 주민들이 가뭄이나, 질병, 병란 등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봉안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대웅전의 전면의 낡은 석조 계단과 축대 앞에는 최근 세운 석등 2기와 함께 오래되어 보이는 석등 하대석과 괘불대가 자리하고 있다. 축대는 1968년에 개축됐다고 전한다.

대웅전 주련

世尊當入雪山中:세존이 설산 가운데 들어가셔서

一坐不知經六年:한 번 앉아 여섯 해 지남을 느끼지 못했네

因見明星云悟道:샛별 보고 도를 깨치셨으니

言詮消息遍三千:말씀하신 소식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도다

 




산이름과 절이름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수행의 흔적.....가고 옴이 있을까?



유가사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불상과 대좌가 모두 같은 석질의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얼굴 전면과 양 무릎을 시멘트로 보수하였으나 그 외의 부분은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인 육계가 높이 솟아 있다. 얼굴 모양은 갸름한 달걀형으로 목에 있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뚜렷하지 않다. 어깨는 각이 지고 힘이 들어가 있으며, 가슴은 양감있게 돌출되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싼 우견편단으로, 상반신은 그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크게 열었다. 손 모양은 항마촉지인을 결하였는데 왼손은 길상좌를 하고 있는 오른발 위에 올려 놓고 있으며 결가부좌한 다리에는 법의 주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형태면에서 석굴암 본존상과 같은 계열의 불상으로 볼 수 있으나, 불상의 어깨가 좁아지고 가슴의 탄력이 감소되는 등의 변화를 볼 수 있으며 대좌도 방형으로서 10세기 이후의 유행을 반영한 것으로 이 불상의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비슬산 천왕봉 아래 터를 잡은 유가사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배치법(山地伽藍配置法)을 채택하고 있는데, 산중턱 경사지에 터를 잡은 관계로 부지를 자연경사에 맞도록 3단으로 조성했다. 맨 윗단에는 대웅전, 나한전, 용화전, 산령각이 있고 2번째 단에는 요사와 3층석탑, 3번째 단에는 사천왕문, 시방문, 조사전 등으로 되어 있다.

가람배치를 상세히 살펴보면 먼저 ‘비슬산유가사’라는 일주문을 지나 곧장 오르면 유가사를 만나게 되는데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유가사 사천왕문이 나온다. 천왕문을 지나면 현재 불사를 거의 완료한 웅장한 규모의 시방루(十方樓)가 나온다. 시방루의 오른쪽에는 범종루가 있고 시방루 아래 계단을 오르면 곧 삼층석탑을 앞에 두고 대웅전이 정면에 보인다.

대웅전의 왼쪽에 나한전과 용화전이 나란히 있고 나한전 뒤쪽으로 산령각이 있다. 용화전 우측 옆으로는 염화실이 있고 대웅전의 좌 우측에는 동산실(東山室), 안심당(安心堂)이라는 편액이 걸린 요사가 있으며 대웅전 우측 뒤에는 백화당(白華堂)이라는 승방이 마련되어 있다. 조사당은 시방루 오른쪽 편 조금 떨어진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 외에 산내암자인 수도암으로 가는 길목과 수도암 아래쪽에 부도전이 마련되어 있다.

유가사는 가람배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웅전→ 나한전→ 용화전→ 산령각으로 옮아가는 동선이 치밀한 건축적 계산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한다. 먼저 건물들의 규모가 순서대로 작아지도록 점감적인 순열을 취하고 있다. 3×3칸 (대웅전) > 3×2칸 (나한전) > 1×1칸 (용화전) > 1×0.5칸 (산신각)의 순서다. 멀리 있는 전각일수록 작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시각이지만, 유가사의 4동 전각들은 급격하게 줄어드는 규모들을 배열함으로써 투시도적 점감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나한전- 용화전 - 산신각이 서로 삼각형의 꼭지점에 놓여, 지그재그형으로 배열됨으로써 전각들 간의 입체적인 운동감이 강화된다. 진입축을 따라 대웅전-나한전의 틈새로 진입하면 곧바로 나한전의 전면을 타고 용화전으로 시선과 동선이 흐르게 되며, 용화전 앞에 서면 저만치 작은 산신각이 산을 등지고 점과 같이 위치한다. 웅대한 산 앞의 작은 산신각은 마치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이 보여, 인공에서 자연으로 사라져가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4개의 전각들은 모두 서로가 다른 방향으로 앉아, 한 건물에서 다른 건물을 볼 때 모퉁이 부분을 바라보게 된다. 평면적인 배치도로는 일견 무질서하게 배열된 것 같지만, 실제 동선 상에서는 모든 건물이 가장 입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져, 작은 건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초라하지 않고 극히 역동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한 가람배치 구조라 할 것이다.






대한민국에는 수많은‘천년고찰’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오랜 세월을 이어오면서 사찰이 가지는 고유한 정신적 물적 자산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잘 보존함과 동시에 확대재생산하는 지혜로써 미래를 지향하는 사찰로 거듭나는 사찰이 있는가 하면, 자의든 타의든 오랜 세월동안 전쟁, 화재, 정책적 억압 등으로 피폐해져 명맥만 이어져 내려오는 사찰도 매우 많이 있다.

이와 달리 부침 많은 천년 세월이었지만 이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오염되지 않은 자연 속에서 그들만의 유산을 지켜내며 올곧게 전승되어온 사찰도 많다. 비슬산 유가사는 그러한 사찰 중에 하나다.

사찰이 많이 자리해 있어 불교집안에서는 성지로 꼽히는 비슬산은 참꽃과 자연휴양림, 그리고 본사인 동화사 보다 많은 고승들의 부도를 간직한 부도밭, 영남에서도 유서 깊은 선원이 있는 산내암자, 곳곳에 남아 있는 옛 유가사의 흔적들 등은 유가사가 대찰 못지 않은 오랜 전통을 지켜온 곳임을 알려준다.

달성 현풍지역의 대표사찰인 유가사는 신라 혜공왕대 또는 827년(흥덕왕 2년)에 창건됐다고 알려졌다. 전성기에는 속한 암자가 99암자, 3천 여명의 스님들이 수도한 도량이었을 만큼 사세가 매우 컸다고 한다. 어쩌면 그만한 사세에 비해 현재의 유가사가 조금 초라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쩌랴 그것이 유가사 만의 과거가 아닌 우리 불교의 역사가 대부분 그러한 것을 ….

현재 유가사는 남아있는 크고 작은 전각들을 수호하며 과거의 향훈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가람을 재정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남아있는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앞으로 남길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에도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

[관람포인트]

1.유가사에서 서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자리한 수도암의 100여m 아래에 옛 고승등들의 사리를 모셔놓은 유가사 부도전이 있다. 모두 15기의 부도가 모여 있는데 비록 말끔하게 정비해 놓진 않았지만 한 줄로 주욱 정렬해 놓은 이 부도전에서 유가사의 옛 역사를 조금이나 읽을 수 있다.

2.또한 유가사는 인근 전통사찰인 소재사를 함께 관할하고 있으며 경북 3대 수도처라는 도성암과 기도정진처인 수도암 등을 산내암자로 두고 있다. 면내의 현풍포교당 역시 유가사 관할로써, 영화로웠던 유가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3.유가사에는 석등 하대석, 고풍스러운 대웅전 석축, 괘불대를 비롯해 시도유형문화재 제50호 유가사석조여래좌상 등 유가사의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4.유가사에는 청도 김씨의 시조이자 고려시대 문인인 김지대가 지은 ‘유가사’라는 시로 유명하며 현재 시방루에 그의 시가 작은 현액이 되어 걸려 있고 그의 일생에 대해서는 유가사 내에서 안내판을 통해 소개되어 있다. 시를 잘 음미해 보면서 유가사를 둘러보는 것도 좋은 관람포인트다. (조계종홈페이지)

반응형

'우리절 순례 > 경북의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각사 와 일연스님-115  (1) 2006.12.17
용연사와 석조계단-114  (2) 2006.12.11
은해사-76  (4) 2006.05.29
불굴사-75  (4) 2006.05.21
팔공산 파계사-74  (5) 2006.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