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민주주의 전당은 마산합포구 3·15해양누리공원 일원에 건립됐다.지상 3층, 연면적 7천894㎡ 규모로 2024년 11월 4일 준공됐다.
커뮤니티·다목적 문화공간, 지역특화 전시실, 상설전시실, 민주홀, 도서관, 아카이브 등을 갖추고 있다.전시는 3·15 의거, 부마민주항쟁 등을 위주로 이뤄질 예정인 것으로 파악됐다.
3·15의거는 1960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당시 마산(창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중심이 돼 일어난 대한민국 첫 유혈 민주화운동이다.
그날 시위 중 실종된 김주열 학생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올라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는 등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대통령 유신독재에 항거해 1979년 10월 발생했다.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의 4대 민주항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민주주의전당의 정식 명칭은 최근 전당 관리·운영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민주주의전당'으로 확정됐다.

민주民主란 단어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백성(시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다.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며 잘 단장된 해양누리공원을 걸어 본다.
민주주의 전당의 위치는 3.15와 4.11의거의 중심에 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인양된 곳이다.



1960년 4월 11일 11시경, 3.15의거에서 행방불명이 된 김주열 학생이 27일 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이곳 중앙부두에 떠올랐다.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직접 본 마산시민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해 4.11민주항쟁 (2차 마산의거, 마산 2차 항쟁)이 일어났다
4.11민주항쟁은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현 마산의료원)에서 시작되었다. 항쟁에 나선 시민의 수는 3.15의거 때보다 훨씬 큰 규모로 시위대가 경찰을 압도했다. 이승만 정권의 폭정을 담당했던 경찰서, 파출소 세무서, 시청 등의 관공서가 차례차례 점거되고 파괴되어 국민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날 구호는 "고문 경찰 잡아내라" "살인 경찰 처벌하라" "죽은 학생 살려내라"가 주를 이루었다. 그뿐 아니라 "이기붕 죽여라." 에 이어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전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음 날인 4월 12일, 13일에는 마산지역 8개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밤에는 시민들이 데모를 이어갔다 연 3일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 '4.11민주항쟁'은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졌고 결국은 4월 26일 이승만은 하야했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3.15의거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난동으로 몰아 시민이 더 이상 항거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4월11일 마산 시민항쟁이 없었다면 4.19혁명은 없었으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늦어졌을 것이다. 이날을 3.15에 이은 2차 의거로만 부르는 것은 이 위대한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명이 없으면 그 역사적 가치도 제대로 부여받을 수 없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시민 항쟁을 '4.11민주항쟁'이라는 역사명으로 부르는 것은 창원시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배가시키며 3.15의거의 역사적 위상과 가치를 더욱 높이는 일이다.


바다를 바라 본다. 지금의 날씨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살고 싶은 간절함을 뒤로한 체
생을 마감한 김주열 열사를 생각해 본다.


민주주의 전당의 앞에는 추모의 벽이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얼굴이 사진으로 부착되어 있다.





옛 마산 시청 자리에는 합포구청이 들어서 있다.
3.15 기념 조형물이 서 있다.

부정 선거의 보도 장면을 살펴본다.


정의로운 분노가
피운 위대한 애국심의 꽃이었으니
3.15 민주의거는 자유당 부정선거에서 비롯됐다. 이승만의 독재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정.부 통령 선거를 부정선거로 준비해왔다 치밀하게 준비된 부정투표 용지는 사전에 투표함을 채우고 유권자는 투표를 한 것으로 조작됐다 많은 시민들이 투표소에서 '선거번호표'가 없어서 돌아서야만 했다.
그날 선거번호표를 잃어버린 마산 시민들은 당시 오동동에 위치한 민주당 마산시당 앞으로 모여 들었다. 국민의 주권인 소중한 한표를 강탈 당한 것에 항의했다. 그 정의가 마산 시민들에게 선거무효 선언 하게 하고 선거 포기로 이어졌다. 그건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 불복종 운동" 다름 아니었다.
마산합포구청은 당시 마산시청으로 선거 개표소가 있던 자리였다. 시청 앞의 큰 도로 (현 3.15대 로)가 마산시민 생과사의 전선이었다. 경찰은 항의하는 시민 들어게 실탄 사격을 가했다. 그렇게 3월 15일의 밤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앞엔 마산의 학생들이 서 있었다."경찰이 학생을 쏴 죽였다" 는 단말마의 고통같은 전언은 순식간에 마산을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물들였다. 골목에서 거리에서 자유와 정의의 함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마산시청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1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마산시청 앞으로 강물처럼 띠를 이루 정의의 바다를 이루었다.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이들을 폭 도로 규정했다. 실탄 사격은 계속 했다. 그 거리에 학생과 시민의 시신이 뒹굴었다. 그날 밤사이 모두 9명의 학생과 시민이 희생되었다.
의로운 주검들은 학생들에 의해 시민들에 의해 마산 도립 병원(현 마산의료원)으로 옮겨졌다.
묻는다 그들이 폭도였나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건 분노에 나온 애국심이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이 보여준 애국심의 꽃이었다.여기 이거리 위에서 뜨겁고 붉게 피어난.
2020년 11월
3.15 민주의거 예순 해를 맞아 (사)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짓고 세우다

합포구청을 건너가면 마산의료원이 있다. 4.19 혁명의 진원지라는 안내 표지판이 보이고, 그 앞에 역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3.15의거 당신 시민을 향해 발사한 총격의 현장


그날 밤 현장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이승만 자유당정권이 온갖 부정선 거를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마산시민과 학생들은 항거하며 맞서 싸우자 경찰은 총격을 가해왔습니다. 이날 밤 저들의 무자비한 총격을 피해 무학초등학교 안으로 피신하여 저항하자 그 만행을 멈추지 않았습 니다. 그총탄 흔적 현장을 복원 후세에 알리고자 합니다 2014. 10 사단법인 3.15의거기념사업회
수카다르마 2025년 3월 30일


3.15 대로를 걷다 보면 보이는 3.15의거 기념탑



3.15의거탑을 끼고 오른쪽으로 걷다 보면 (구)남성동 파출소 쪽이 민주화거리이다.

부림동 문화 공원에서 광복은 위해 힘쓰신 허당 명도석 기념 조형물을 발견하였다.

독립운동
"주권主權을 잃은 국가는 주인主人 없는 빈집과 같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호號를 허당虛堂 빈집이라 짓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함 일제에 의한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 지목되어 수십 차례의 구금 감시 압박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함 의열단義烈團 경남총책 신간회新幹會 경남 책임자를 맡았으며 원동무역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고 민족언론 창달을 위한 동아일보 창립에 참여하였음 또한 무산가정의 자녀교육을 위한 마산노동야교를 개교하였음.
평양 감옥에서 옥고를 치루었고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인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사십여 년간 해방되는 날까지 독립 운동에 매진하였음
해방 후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고위직을 제안 받았으나 "분단된 조국에서 어느 한 쪽의 직위을 수락한다는 것은 분단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응하지 아니하고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감 생가인 마산시 중성동 64 -2 에서 1954년 6월 9일 영면하였음










어머니
이선관 시인
육십구 세까지 어머니의 젖가슴만 그렸더이다
부산 자갈치 시장 여인들
마산 어시장 여인들
지금까지 약 만이삼천 점의 그림을 그려 왔는데도 얼굴도 나이도 모르는 어머니를 찾을 수 없다고 하더이다
음력으로 이천이년 마지막 날에 마주 보고
소주잔을 건네는 내게 눈물 몇 방울 보이더이다
현재호
(1935~2004)
현재호 화백은 1935년 부산 대신동에서 태어나 어머니 얼굴도 모른 채 고아원 등에서 자랐다.청년 시절 해군사관학교에 지망하여 입학수속 중 우연히 동창이 준 빈센트 반 고흐의 판화집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아 홀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였다. 주로 물고기. 술. 아이물 안은 어머니 등 서민 삶의 애환을 작가만의 개성 있는 인물상으로 표현하였으며. 1981년에 마산에 정착하여 2004년 작고하기 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50년 민주신보사에서 주최한 민전에서 잇달아 특선을 하면서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