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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전남의 사찰

대웅전을 찾아-해남 미황사 대웅전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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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절로서 749년(경덕왕 8) 의조(義照)가 창건하였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법화경』·비로자나불·문수보살·보현보살·40성중(聖衆)·53선지식(善知識)·16나한의 탱화 등이 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자(美字)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자(黃字)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금강산 오십삼불설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보물
해남 미황사 대웅전 (海南 美黃寺 大雄殿)
Daeungjeon Hall of Mihwangsa Temple, Haenam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조선 선조 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 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표시한 것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해남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海南 美黃寺 大雄殿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해남 미황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美黃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은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 삼존불로 조선 후기 17세기 중엽을 대표할 만한 불상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다.

(처마 ㆍ공포)
처마와 기둥을 이어 주는 곳은 공포(栱包/貢包)라고 하는데 공포의 층계가 높을수록 처마가 더 길게 나올 수 있다. 기둥에만 공포가 있을 경우 이것을 주심포라. 하고.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으면 다포라다.  보통 예전에는 남향으로 집을 짓는데, 이는 계절에 따라 해의 고도가 다른 것을 이용해 처마의 일조량 조절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온도가 낮은 겨울에는 처마가 햇볕을 잘 받아들일 수 있기에 집을 따뜻하게 하며 온도가 높은 여름에는 햇볕을 덜 받게 하여 집을 시원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5량 이상 규모의 건축에는 서까래 끝에 짧은 서까래(부연)를 덧붙여 지붕이 버틸 수가 있게 했다.
이 때, 부연(浮椽)이 붙은 처마는 겹처마, 붙지 않은 처마는 홑처마라고 부르며, 이러한 처마의 하중을 기둥의 위에서 방어하는 것이 공포이고 이 공포가 모서리에  덧붙여지면 귀공포가 되는데 때로는 추녀와 상하로 맞붙여지기도 한다.

자료출처: 미황사, 국가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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