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고자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속에서 떠나질 않던 백련사를 가게 되었다. 신라의 고찰로 번영과 쇄락을 거듭하면서 소실과 중창을 거쳐 지금에 이른 백련사. 지눌이 결성한 수선결사, 천태종지를 천명한 시기, 정다산의 흔적을 느끼는 시기들. 그러한 흔적을 간직한 곳이 백련사다.
보물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康津 白蓮寺 大雄寶殿)
강진 백련사는 고려말 원묘국사 요세(1163∼1245)의 결사처로서 조선시대에도 많은 승려들이 수행했던 사찰이며, 주불전인 대웅보전은 1760년 화재 이후 중창 불사를 통해 1762년에 중수 건물이다.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8세기 불전 건축의 장식화 경향을 대표하는 사례이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3출목 내4출목 형식이다. 제공의 외부는 초제공에서부터 3제공까지 연화 무늬가 결합된 앙서형, 4익공은 연봉이 달린 수서형, 5운공은 봉두이고, 내부는 아래에서부터 차례로 연봉·연밥·연밥·연꽃을 조각했고 그 위로 봉두를 올렸다. 이러한 살미의 구성은 호남을 중심으로 형식화되어 점차 영남까지 확산되는데, 백련사 대웅보전의 건축연대는 그 중간에 있다. 또한, 불상 위에 닫집을 설치하지 않고 우물천장을 이중으로 설치한 점, 실내를 채운 여러 마리의 용과 봉황 장식, 정면 기둥에 끼워진 청룡과 황룡 모습의 안초공, 살미를 길게 빼서 내주의 보아지로 사용하는 기법 등은 당시 건축양식의 시대적, 지역적 전개를 비교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로 평가된다.
둘째, 사찰 건축 관련 기록이 풍부하여 학술적 가치가 높다. 백련사 대웅보전 건축과 관련된 기록은 「만덕산백련사대법당중수기」가 대표적이다. 중수기에는 복구 사업의 정확한 일정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대시주질, 연화질, 야장, 목수질 등 직임과 인명을 정리해두었다. 이를 통해 당시 사찰 건축의 추진과정을 복원할 수 있으며, 담당자들 간의 인맥이나 영향 관계도 추적이 가능하다. 특히, 도편수, 부편수, 승묵편수 등 불전 건축 목수들의 계보와 교류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이다. 나아가 「만덕산백련사중창기」, 「만덕산백련사비」 등과 함께 치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만덕사지』가 전하고 있어서, 불교사의 전체적인 맥락 아래 사찰 또는 불전의 건축생산사를 고찰해볼 수 있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셋째, 고려와 조선 불교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백련사는 고려시대에 원묘법사 요세의 백련결사가 개설되고 조선시대에 취여삼우의 법회가 열렸던 장소이고, 효령대군의 지원에 힘입어 중창했던 역사가 있다. 또한 승려들은 사대부에게 의탁하여 중창기와 사적기를 작성했고, 특히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백련사의 승려들과 협업하여 『만덕사지』를 편찬했다. 백련사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는 조선 후기의 명필 원교 이광사의 작업이며, 법당 실내에는 신라시대 명필 김생의 글씨가 집자되어 있다. 이처럼 백련사의 역사는 권력과 민중, 불교와 유교의 상호교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대웅보전은 그 한 시기를 예증하는 건물이다.
동백- 수카다르마
동백을 보면
어머니의 머릿결이 생각이 난다.
고향집 언덕에
아름드리 나무에 동백이 열리고
그 적동백꽃이 떨어져 날리면
꽃 목걸이 만들어 다니던.
꽃은 사라지고 동백만 남아
머릿결에 윤기를 더한다.
동백을 어머니 사진첩에서 끌어낸다.
나는 동백이 좋아
아이디를 동백으로 하였다가
어느 사람이
동백림 사건과 연관이
있냐는 그런 질문을
받기도 했다.
아직도 고향집 언덕의
너무도 선명한 유년기의 추억속으로
동백꽃을 그리워 한다.
천연기념물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 (康津 白蓮寺 冬柏나무 숲)
Forest of Common Camellias at Baengnyeonsa Temple, Gangjin동백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며, 우리나라에서는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꽃은 이른 봄에 피는데, 매우 아름다우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부른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강진에 있는 백련사 부근에 있는데 동백나무 1,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으며, 이밖에 굴참나무,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군데군데 자라고 있다. 동백나무의 높이는 평균 7m쯤 되고, 동백꽃이 필 무렵이면 매우 아름다워 이 지역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동백림의 유래에 관하여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 초당이 가까이 있고, 이곳에서 다도(茶道)연구를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백련사의 동백림은 우리나라의 난온대지방을 대표하는 나무인 동백나무가 집단적으로 자라고 있는 지역일 뿐만 아니라, 정약용 선생과 관련된 문화적 장소로서의 가치도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위치한 다산 정약용과 관련된 문화재이다. 1963년에 다산초당을 포함한 관련 유적 일대가 사적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초당에 걸린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글씨로 알려져 있다.
공식 명칭은 강진 다산 정약용 유적 또는 강진 정다산 유적이다. 원래는 초가로 있지만 현재는 기와집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유적지로 불리고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유배되어 11년간 머물면서 많은 책을 저술했던 곳이다.
정약용은 여유당(與猶堂) 등의 여러 호를 가지고 있으며, 천주교 이름으로는 요한(Johan)이라 하였다.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며, 유형원과 함께 수원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하여 수원 화성을 쌓기도 했다. 정조가 죽자 신하들의 모함을 받아 투옥되어 유배되었고, 그 후 18년 간의 유배생활 동안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의 사상은 한국사상의 원형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곳에서 11년 동안 머물면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비롯한 50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는 ‘철학’, ‘법제’, ‘종교’, ‘악경’, ‘의술’, ‘천문’,‘측량’, ‘건축’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장래에 도움이 될 학문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학술적 연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하여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은 것이다. 작고 소박한 남향집으로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 뒤 언덕 암석에는 다산이 직접 깎은 ‘정석(丁石)’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으며, 초당 왼쪽으로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앞 뜰에는 차를 달였다는 ‘청석’이 있고, 한 켠에는 ‘약천(藥泉)’이라는 약수터가 있어 당시 다산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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