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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전남의 사찰

대웅전을 찾아-화엄사 각황전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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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과 사사자 삼층석탑

각황覺皇이라
듣기만 해도 건방진 태도가
하늘을 찌른다.

나는 화엄華嚴의 곳간
아래서 쉬어 가는
나그네 인데

세상의 장엄이란 것 중에
제일이 화엄이라.
여즉
다시 와서 본
화엄의 자태는
각황을 모시고 있음직 하구나.

화엄사는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큰 절이었고,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탄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보
구례 화엄사 각황전 (求禮 華嚴寺 覺皇殿)
Gakhwangjeon Hall of Hwaeomsa Temple, Gurye


본래 이 자리에는 2층 4면 7칸의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을 의상조사께서 조성 하였으나 정유재란때 소실 되었다. 계파 성능선사(桂波 性能禪師)께서 장육전 중건 불사의 대발원의 백일기도로 문수보살의 선몽으로 공양주 스님이 화주승으로 선택되고, 시주자는 화엄사에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누룽지 따위를 얻어가는 거지노파로 자신의 가난함을 한탄하고 불보살의 원력으로 왕궁에 태어나기를 서원하고 소(沼)에 몸을 던지고 공주로 환생했는데 한쪽 손을 쥔채로 태어났으며 공주는 인경황후(仁敬王后) 막내 딸로 태어났다. 황후는 1680년(숙종6년) 음력 10월 26일 2경(二更: 오후 9시~ 11시)에 경덕궁에서 발병 8일 만에 천연두로 젊은 나이인 20세에 승하했다. 어머니를 여윈 아기 공주는 유모와 나인의 보살핌 속에 자라났다. 5년후 공양주 스님을 만나 손이 펴지니 손바닥에 장육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장육전 법당을 짓기 시작할 무렵에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同參하여 숙종 25년(1699)에 시작하여 숙종 28년(1702)에 완공을 보았고, 무릇 2층 48칸으로서 그 장엄함은 비길 데 없었으며,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1703년에는 삼존불(三尊佛)․ 사보살상(四菩薩像)을 완성하여 일주일에 걸쳐 경찬대법회(慶讚大法會)를 열었으며 장육전 중건 불사를 회향하자 조정에서는 사액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 하고, 예조는 한 격 높여서 올려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이라 하였다. 부처님을 깨달은 왕이란 뜻과 임금님을 일깨워 중건하였다는 뜻으로 각황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채팽윤(蔡彭胤)이 숙종27년(1701)에 쓴 장육전 중건 상량문
願堂大施主 延礽君 親王子 甲戌生 李氏 壽命長
원당대시주 연잉군 친왕자 갑술생 이씨 수명장
成造大施主 親王子母 戊戌生 崔氏 壽命長
조성대시주 친왕자모 무술생 최씨 수명장수명 장수 발원하며 연잉군(영조)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영조(英祖)의 모친(母親)이며 후궁(後宮)인 숙빈최씨(淑嬪崔氏)도 조성 대시주로 기록 되어있다. 연잉군은 전생에 농산(農山) 스님이며, 금산사 목정굴에서 백일 관음 기도후 입적하며 숙빈최씨 꿈에 아들로 환생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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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


화엄사 각황전 앞에 세워진 이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사찰의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배치된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8각 바닥돌 위의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고, 그 위로는 장고 모양의 가운데 기둥을 세워두었다. 장고 모양의 특이한 기둥형태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유행했던 것으로, 이 석등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기둥 위로는 솟은 연꽃무늬를 조각한 윗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8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뚫어 놓았다. 큼직한 귀꽃이 눈에 띄는 8각의 지붕돌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이 석등은 통일신라 헌안왕 4년(860)에서 경문왕 13년(873)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석등 뒤에 세워진 각황전의 위용과 좋은 조화를 보여준다. 약간의 둔중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활짝 핀 연꽃조각의 소박미와 화사석·지붕돌 등에서 보여주는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작품이다.

보물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求禮 華嚴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四菩薩立像)


화엄사 각황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은 예천 학가산에서 화엄사로 온 계파 성능(桂坡 聖能)이 장육전(丈六殿, 지금의 각황전覺皇殿)을 중창한 후 1703년 주존불로 조성한 대형 불상으로서, 색난의 만년작(晩年作)이다. 각황전의 창건과 불상 조성은 화엄사 중창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불사(佛事)로서, 전각명도 왕실로부터 하사받아 이때부터 장육전에서 ‘각황전’으로 변경된 것이다. 또한 불상 조성에 있어 숙종을 비롯해 측근 왕실인사들인 인현왕후, 경종(景宗, 당시는 세자), 숙빈최씨(淑嬪崔氏), 영조(英祖, 당시는 연잉군) 등을 비롯해 여흥민씨, 해주오씨 등 유력가문들도 대거 참여했다는 점에서 18세기 초 최대의 왕실불사였음이 인정된다. 현재 불상에 재복장된 발원문에 의해 이 7존의 불보살상은 1703년 10월 4일에 조각승 색난(色難)을 중심으로, 충옥(沖玉), 일기(一幾) 등 24명의 조각승이 협업해 만든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석가여래좌상은 색난, 다보여래상과 문수보살상은 충옥, 아미타불상은 일기, 보현보살상은 웅원, 관음보살상은 색난과 추붕, 지적보살상은 추평이 각각 주도하여 조성한 사실을 통해 당시 최고 권위의 왕실발원 불상 조성에 색난이 초빙된 것은 조각승으로서 그의 명성이 대단히 높았음을 입증해 준다. 화엄사 각황전은 거대한 이층전각의 목조건물로서, 여기에 봉안된 불상 또한 규모에 맞는 웅장함과 형태미로 조성되었다. 주존불인 석가여래삼불좌상은 당당하고 묵직한 형태에 신체에 비해 큰 네모난 얼굴로 압도적이면서도 정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반면 삼불좌상의 좌우에 서 있는 사보살입상은 유사한 얼굴과 비례를 보이면서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묘사하여 대조를 이룬다. 이렇듯 서로 대비되는 여래와 보살의 조형성은 전각 내부를 웅장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이끄는 효과를 보이는데 이는 색난의 우수한 감각과 조각기술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각황전 불상은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 석가·다보·아미타여래 삼불상과 석가여래의 좌우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다보여래의 협시보살로 지적보살(智積菩薩)이, 아미타여래의 협시보살로 관음보살이 짝을 이룬 도상은 1665년 간행『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에 의거한 ‘법화거불(法華擧佛)’, 즉 법화신앙에 바탕을 둔 불교의식집에 등장하는 도상의 최초 조각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처럼 화엄사 삼불사보살상은 40여 년 동안 활동한 조각승 색난의 거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동안 숙련된 기량과 원숙함이 반영된 그의 기념비적인 대작이자, 도상학적으로도 의의가 크다는 점, 수준 높은 조형성과 기술적 완전성을 갖춘 점에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가치가 있다.

☆☆대애경 지적보살품
보살이 백억 가지 질문에 대하여 충분히 대답하였으니, 마땅히 그의 명호를 지적(智積)이라 해야 하리라.’ 족성자야, 지혜가 그러하기 때문에 지적이라 하니, 그 때의 각의보살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지금의 지적보살임을 알아야 한다.” 지적보살을 조성한 것은 희귀한 경우이기 때문에 지장보살로 오인할 수 있음.

편액은 1703년에 형조참판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각황전 외부 공포

각황전 내부 천정 벽화 십우도중의 일부

각황전의 내부 천정

각황전 기둥에 걸린 주련

偉論雄經罔不通
위대한 경전과 논서 모두 통달하시고
一生弘護有深功
일생을 홍포하사 공덕 깊고 넓도다.
三千義學分燈後
걸출한 삼천 제자 법등을 나누시니
圓敎宗風滿海東
화엄의 종풍 전국을 휩쓸었네.

西來一燭傳三世
인도에서 온 일촉의 등불 온 세상 밝히니
南國千年闡五宗
천년을 전하여 다섯 갈래로 피어났도다.
遊償此增淸淨債
이 많은 청정한 빚 노닐며 갚으려하니
白雲回首與誰同
백운에 머리 돌려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각황전의 외부 귀공포


국보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화엄사 지리산 자락에 있는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 (544)에 연기존자(鷰起尊者)가 세운 절로, . 탑은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절 서북쪽의 높은 대지에 석등과 마주보고 서 있으며, 2단의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천인상(天人像)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비구니)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존자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존자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문짝 모양을 본떠 새기고, 양 옆으로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보살상을 조각해 두었다. 평평한 경사를 보이고 있는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각 부분의 조각이 뛰어나며, 지붕돌에서 경쾌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위층 기단의 사자조각은 탑 구성의 한 역할을 하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14년(645)에 자장율사께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시고 사리탑과 공양탑을 세웠다. 연기존자께서 오른 어깨에 옷을 벗어 메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머리에 석등을 이고 왼 손에는 찻잔과 구슬(여의주:불성)을 받쳐 들고 어머니에겐 진리의 공양을 부처님에겐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효사상의 공양탑(供養塔)이며, 앞쪽은 12선녀(시간,공간), 희노애락(번뇌)의 표정을 한 4사자(지혜)와 어머니(비구니:수행자)는 봉오리 연꽃(불성)을 들고, 3층(3계)의 탑의 모습인 사리탑은 즉 수행자는 불성(佛性)을 밝히기 위해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얻어 삼계(三界)의 대도사인 부처님 되기를 원하는 견성성불(見性成佛) 사상의 사리탑(舍利塔)으로서 4사자3층사리석탑을 일명 효대(孝臺)라고도 부른다.

그리움

수 많은 인연을 끌고 와서는
부처님은 말이 없는데
여보게.....
시름 한짐 벗어 놓고

돌아 가게나.
가고 오는 이 들숨 날숨은
존재함으로 이어지고

오늘도 당신 앞에 서 있네.
중생 중생이 님의 향기에
사무친 그리움으로
예경하옵나니

나무 불. 법. 승.

글 , 이미지 일부 출처: 화엄사 홈페이지,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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