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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기의 사찰

전등사-202

by 돛을 달고 간 배 2010.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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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적 아름다움이 흠뻑 묻어나는 전등사 현판을 바라보며

해강의 글씨체에 빠져 본다.




숲을 앉고 조금 비켜나 숨은 듯이 위치해 있는

극락암은 누구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느낌이다.


너무도 넉넉하지 않는가?

오래 세월을 서늘한 그늘을 만들고

또한 청량한 기운을 전해 주는 노목이여






전등사 鐵鐘(보물393호)은 일제시대 말기 금속류의 강제수탈로 빼앗겼다가 광복 후 부평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모습을 한 높이 1.64m, 입지름 1m의 종으로 한국의 종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는 음통은 없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나열하고,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사이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이 명문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 곧 고려 숙종 2년(1097)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중국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너무도 너무도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이제는 용서하소서.

가없는 죄도

다 던져버리시고 훌훌 떠나시오.

무섭사옵니다.

천년의 세월을 지탱한 업이

이제는 내려앉으려고 합니다.

모든 것 털어버리고

해탈의 길로 가시오.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이 세웠다고 전하지만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조선 선조 38년(1605)과 광해군 6년(1614)에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광해군 13년(1621)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보물 178호)

광해군 13년(1621)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네 모서리기둥 윗부분에는 사람 모습을 조각해 놓았는데

이것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3곳의 처마 밑에서는

두손으로 처마를 받치며 벌을 받고 있는 모양새인데 비해,

한 귀퉁이의 것은 한 손으로만 처마를 받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벌을 받으면서도 꾀를 부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우리 선조들의 재치와 익살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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