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절 순례/경남의 사찰

광려산 광산사-96

by 돛을 달고 간 배 2006. 8. 5.
반응형


벗어 던지고

멋진 한 생 살 다 가세



극락전의 아미타불 부처님


광산사 대웅전 중앙 불단 위에 아미타 삼존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이 중 도 유형문화재(440호)로 지정된 유물은 향좌측 대세지보살상이다. 이 보살상의 자세는 등이 완만하게 굽었고 고개를 앞으로 약간 숙인 채 결가부좌하고 있다. 수인은 중품하생을 결하였는데 연꽃가지를 쥔 양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오른손은 가슴 위로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왼쪽 무릎 위에 두고 있다. 특히 별조된 손은 두툼하고 넙적한 편으로 손의 측면이나 엄지손가락을 각이 지게 깍은 것은 손가락을 가늘면서 길게 조각하는 다른 불상 조각과는 차별되는 점이다. 머리는 화염보주와 화문으로 장식된 보관을 쓰고, 보관 아래 머리카락은 일정한 간격으로 나누어 음각선으로 머릿결을 표현하였으나 머리 뒷면은 결을 생략하여 밋밋하다.

얼굴은 방형으로 이마가 좁은 편이며, 뺨과 턱은 도톰하다. 눈은 수평으로 길고, 큼직하면서도 오뚝한 코는 매부리코 형태를 띠고 있으며, 뚜렷하면서 짧은 인중선, 얇으면서 길어 보이는 입술은 그 끝이 살짝 올라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조출되어 있다.

착의법은 변형통견식으로 오른쪽 어깨에 편삼을 입고 그 위에 걸친 대의는 오른쪽을 반쯤 덮어 겨드랑이쪽으로 빼어 복부를 돌아 왼쪽 어깨로 넘겼다. 한편 특이한 것은 불상 뒷면의 표현인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들어가는 대의와 그 안에 입은 편삼이 뚜렷이 표현된 점은 전통적인 불상조각에서 주로 표현되는 기법이다. 또한 왼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대의의 주름은 봉긋하게 조각되어 사실성이 강조되고, 가슴까지 올려 입은 승각기는 주름하나 하나가 ‘ㄴ’형으로 양감이 있게 처리되어 마치 만개한 연꽃모양을 이루는 듯하다. 왼쪽 무릎 위 소매 자락은 무릎을 감싸듯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다.

광산사 목조보살좌상은 당당한 체구에 허리를 약간 굽히고 머리를 내민 채 시선을 아래로 지긋이 굽어보고 있는 것이라든지, 중간이 갈라져 있는 보계와 방형에 가까운 풍만한 얼굴 및 군의의 부채꼴 옷주름 표현 등에서 조선후기 보살상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보살상은 조각승이 전통적인 법의 표현을 하고 있는 점과 봉긋하게 조각된 대의 주름 및 ‘ㄴ’형의 승각기 표현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져 있는 수작의 보살상이다.




정말 잘 정돈 된 맢 뜰의 모습



도 유형문화재 440호 대세지보살상









광산사....

광산사(匡山寺)가 위치한 광려산(匡廬山)은 중국의 명산인 여산(廬山)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의 기암절벽이 안개 속에 잠겨 있는 여산의 아름다움은, 수많은 시인묵객과 나그네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橫看成嶺側成峯 이쪽을 보니 산마루요 저쪽을 보니 봉우리다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저마다 같지 않구나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모습 알기 어려우니
只緣身在此山中 다만 내 몸이 산에 묻혀 있을 따름이로다

이 칠언절구는 소동파(蘇東坡)가 중국의 여산을 둘러보고 난 후 그 심오함을 읊은 시이다. 셋째 구절에 나오는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은 ‘너무도 깊고 그윽하여 그 진면목을 알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즐겨 사용되는 말로, 바로 이 시구에서 유래된 것이다.


광산사의 ‘광산(匡山)’ 역시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말로, 은둔자의 대명사인 광유(匡裕)가 여산에 초당(草堂)을 짓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여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광산사의 창건주로 원효스님 외에 중국의 은신스님이 함께 등장하고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법등을 이어왔던 광산사는 6.25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고 현재의 가람은 그 이후에 새롭게 조성된 단출한 규모이지만, 사찰에 남아 있는 현판문이나 상량문 등을 통해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 「광산사중건상량문(匡山寺重建上樑文)」은 구한말의 항일운동가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직접 쓴 상량문으로 유명하다.

여산은 광산(匡山), 광려산(匡廬山)이라고도 불렸다. 여산은 파양호 평원상에 우뚝솟은 모습이 마치 초가집(廬)같고, 산의 모양도 사면은 높은데 가운데가 우묵 들어가서 삼태기(筐)같은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산(廬山), 광산(匡山)이란 이름을 붙였을 터인데, 여기에는 신선과 관련된 몇가지 전설이 전해온다.

첫번째 전설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때 광속(匡俗)이란 사람이 신선이 되고자 이 산에 들어왔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여러 번 광속을 불렀지만 그는 이를 피해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끝내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광속이 신선이 되었다고 하여 광산(匡山), 광려(匡廬)라고 했다고 한다. 송나라때는 광산이란 이름이 태조인 조광윤(趙匡胤)의 이름자와 같다고 하여 강산(康山)이라고 바꾸기도 하였다.

두번째 전설은, 주(周) 무왕(武王)때 방보(方輔)선생이 노자와 함께 하얀색 노새(驢)를 타고 이 산에 들어와 연단술(煉丹術)을 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반응형

'우리절 순례 > 경남의 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천사지삼층석탑-101  (0) 2006.09.24
여항산 의림사-97  (9) 2006.08.06
함안대산리석불-95  (6) 2006.07.30
다시 찿은 관룡사-94  (3) 2006.07.22
청련사-93  (8) 2006.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