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와바타 야스나리
189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15세, 때 10년간 함께 살던 조부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로 인해 생겨난 허무와 고독, 죽음에 대한 집착은 평생 그의 작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1920년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지만 곧 국문학과로 전과, 1924년 졸업했다. 이후 문예시대를 창
간, 요코미쓰 리이치 등과 감각적이고 주관적으로 재창조된 새로운 현실 묘사를 시도하는 '신감각파' 운동을 일으켰다. 1924년 서정적인 체가 빛나는 첫 소설 "이즈의 무희"를 발표한 이래, 서정가, 등 여러 뛰어난 작품을 발표해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으며, 1937년 "설국"을 출간해 독보적인 일본 작가로 국내외에서 자리매김했다. 이 작품은
발표 후 12년 동안 여러 번의 수정 작업을 거쳐 1948년 마침내 완결판「설국」으로 출간되었다. 그리고 "천우학"과 "산소리", "잠자는 미녀",
"고도" 등의 대표작에서 줄곧 지고의 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독자적인 서정 문학의 장을 열었다. 1968년 그간의 작품 활동으로 노벨 문학상
을 수상했으며, 이 외에도 괴테 메달,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일본 문화훈장 등 여러 상을 수상했다. 1972년 3월,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
은 후 퇴원 한 달 만에 자택에서 가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옮긴이 유숙자
계명대 일어일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일본 도쿄 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일어일문학 전공)에서 연구 과정을 마쳤다. 고려
대 대학원 국어국문화과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고려대 한국어문화교육센터 강사로 있다. 지은 책으로 매일 한국인 문학연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결국, 깊은 강, 전원의 우
울, 애인, 만년, 사양, 옛이야기, 손바닥 소설, 나, 아름다운 여신과의 유희, 전후문학을 묻는다. 처음 온 손님, 경계의 시,등이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은 서구적인 허무주의를 가진 주인공 '시마무라'와 순수한 생명력을 지닌 게이샤 '고마코', 그리고 환상적인 이미지의 '요코'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다룹니다.
이 소설에서 자연 묘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심리를 투영하거나 때로는 그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긴장감을 유발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1
시마무라는 그녀 한 사람만을 따로 떼어서, 그 모습이
전하는 느낌만으로 멋대로 처녀일 거라고 단정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가 처녀를 이상한 눈으로 너무나 뚫어지게 지켜본 나머지, 그 자신의 감상이 다분히 보태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벌써 세 시간도 전의 일로, 시마무라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왼쪽 검지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바라보며, 결국 이 손가락만이 지금 만나러 가는 여자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군, 좀더 선명하게 떠올리려고 조바심치면 칠수록 붙잡을 길 없이 희미해지는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감촉으로 여전히 젖은 채, 자신을 먼데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군, 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있다가,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거기에 여자의 한쪽 눈이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마음을 먼데 두고 있었던 탓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그저 건너면 좌석의 여자가 비쳤던 것 뿐이었다.
🍎🍎2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렸다. 비춰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아득히 먼 산 위의 하늘엔 아직 지다 만 노을빛이 아스라하게 남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먼 곳까지 형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색채는 이미 다 바래고 말아 어디건 평범한 야산의 모습이 한결 평범하게 보이고 그 무엇도 드러나게 주의를 끝 만한 것이 없는 까닭에, 오히려 뭔가 아련한 커다란 강정의 흐름이 남았다.
❤️❤️3
벽도 꼼꼼히 반지를 바른 탓에 낡은 종이상자에 들어온 기분이었는데, 머리 위엔 지붕 밑이 그대로 노출된 채 창 쪽으로 낮아지고 있어 컴컴한 쓸쓸함이 덧씌워진 형국이었다. 벽 맞은편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생각하니, 이 방만이 공중에 매달린
듯한 느낌이 들어 어쩐지 위태로웠다. 그러나 벽이며 다다미가 낡은 데 비해 너무나 청결했다.
누에처럼 고마코도 투명한 육체로 여기서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고다쓰에는 눈바지와 똑같은 줄무늬의 무명이불이 덮여 있었다. 옷장은 낡았어도 고마코의 도쿄 생활의 흔적일까, 결이 곧은 멋진 오동나무 제품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경대는 조출했다. 주홍빛 반짇고리 또한 화려한 광택을 자랑했다. 벽에 판자를 계단식으로 붙박은 건 책장인가, 모슬린 커튼이 처져 있었다.
간밤의 접대복이 벽에 걸렸는데, 속옷의 붉은 안감이 드러나 보였다..
고마코는 부삽을 들고 솜씨 좋게 사다리를 올라와서, 환자 방에서 가져온 거지만 날은 깨끗하대요 하고 새로 올린 머리를 숙인 채 고다쓰 재를 긁어모으며, 환자는 장 결핵으로 고향에 거의 죽으러 온 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했다.
❤️❤️4
그는 도쿄의 서민가에서 자라 어릴 적부터 가부키나 일본춤에 친숙하고 나가우타의 구절 정도는 외위 저절로 귀에 익기는 했으나, 직접 배우지는 않았다. 나가우타라고 하면 금방 춤 무대가 연상되지만 게이샤의 연회는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정말이지 가장 부담스런 손님이군요" 하고 고마코는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샤미센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것만으로 벌써 딴사람이 된 양, 가만히 연습용 책을 펼치고, "올 가을, 악보로 연습한 거예요."
간진초였다.
순간, 시마무라는 뺨에 소름이 돋을 듯 서늘해져서 뱃속까지 말갛게 되는 느낌이었다. 단숨에 텅빈 머리 가득 샤미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실제로 그는 그저 놀랐다기보다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경건한 마음에 사로잡혔고 회한의 상념에 완전히 젖어들었다. 자신은 이제 무력할 뿐, 고마코의 힘에 밀려 속수무책으로 떠내려 가는 것을
기꺼워하며 몸을 던져 떠 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 5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죠? 솔직한 사람이라면 제 일기를 모두 보내드릴 수 있어요. 절 비웃지 않는 거죠? 당신은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시마무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감동을 받아, 그렇다. 나만큼 솔직한 인간은 없다는 느낌이 들자, 더 이상 고마코에게 억지로 돌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고마코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관 출장소에서 주인이 나와 개표를 알렸다.
칙칙한 겨울 복장을 한 이 고장 사람 네다섯 명이 말없이 내리고 탔을 뿐이었다.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 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기차가 움직이자마자 대합실 유리가 빛나고 고마코의 얼굴은 그 빛 속에 확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눈 온 아침의 거울 속에서와 똑같은 새빨간 빰이었다. 시마무라에게는 또 한번 현실과의 이별을 알리는 색이었다.
국경의 산을 북쪽으로 올라 긴 터널을 통과하자, 겨울
오후의 얇은 빛은 땅밑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했다.
낡은 기차는 환한 껍질을 터널에 벗어던지고 나온 양, 중첩된 봉우리들 사이로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산골짜기를 내려가고 있었다. 이쪽에는 아직 눈이 없었다.
🍎🍎6
이 방에서 내다보이는 국경의 산들 중 어느 한 정상
부근에는 아름다운 못과 늪을 잇는 오솔길이 있어 일대의 습지에서 다양한 고산식물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고, 여름이면 고추잠자리가 무심히 노닐다가 모자나 사람 손, 때로는 안경테에까지 날아와 앉아, 그 한가로움이 도시의 잠자리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고 쒸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잠자리떼는 뭔가에 쫓기고 있는 듯 보인다. 날이 저물수록 거무스름해지는 삼나무숲 빛깔에 제 모습이 사라질까 초조해하는 것 같다.
먼산은 석양을 받아, 봉우리에서부터 단풍져 내리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사람은 참 허약한 존재예요. 머리부터 뼈까지 완전히
와싹 뭉개져 있었대요. 곰은 휠씬 더 높은 벼랑에서 떨어져도 몸에 전혀 상처가 나지 않는다는데 하고 오늘 아침 고마코가 했던 말을 시마무라는 떠올렸다. 암벽에서 또 조난 사고가 있었다는 그 산을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노을진 산을 바라보노라니, 감상적이 되어 시마무라는 사람의 살결이 그리워졌다.
🍎🍎7
요코는 부엌일을 하느라 아직 객실에는 나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손님이 붐비기 시작하면 취사장 하녀들의 목소리도 커지곤 했는데, 요코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시마무라의 방을 담당하는 하녀 얘기로는, 요코는 잠 자기 전에 욕조 안에서 노래를 부르는 버릇이 있다고 했으나 그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집 와 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8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리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준 교토 산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별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을 소리가 아련히 울려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
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
🌸🌸
1. 기(起): 거울 속의 풍경, 비현실의 서막
소설의 도입부에서 시마무라는 기차 유리창에 비친 요코의 얼굴과 창밖의 저녁 풍경이 겹쳐지는 '거울 속의 허상'을 목격합니다.
자연 묘사: 끝없이 펼쳐지는 설국(雪國)의 차가운 저녁 어둠.
심리 묘사: 시마무라는 현실의 여인인 고마코에게 가면서도, 유리창에 비친 요코라는 '비현실적 미(美)'에 매료됩니다.
갈등의 양상: 차가운 설경이라는 자연적 배경은 시마무라의 방관자적이고 허무한 심리를 정당화하며, 독자를 현실이 아닌 탐미적인 환상의 세계로 끌어들입니다.
2. 승(承): 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눈의 대비
시마무라가 고마코와 재회하며 본격적인 관계가 깊어지는 단계입니다.
자연 묘사: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두터운 눈, 그리고 뼛속까지 시린 추위.
심리 묘사: 고마코는 시마무라를 향해 헌신적이고 뜨거운 감정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시마무라는 이를 '헛수고'라 치부하며 거리를 둡니다.
갈등의 양상: '붉은 뺨의 고마코'와 '하얀 눈'의 색채 대비는 극에 달합니다. 생명력 넘치는 고마코의 심리는 냉정하고 정적인 자연 묘사에 의해 끊임없이 부정당하고 고립됩니다. 자연은 그녀의 열정을 식히려는 냉각 장치처럼 작용합니다.
3. 전(轉): 은하수의 추락, 갈등의 폭발
소설의 절정인 화재 장면에서 자연과 심리의 갈등은 극적인 이미지로 변모합니다.
자연 묘사: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하고 눈부신 은하수.
요코가 불타는 누각에서 떨어지는 순간, 시마무라는 공포나 슬픔 대신 은하수가 자신의 몸속으로 흘러드는 듯한 황홀경을 느낍니다.
갈등의 양상: 비극적인 사건(요코의 사고)이라는 인간적 고통이,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묘사(은하수)에 의해 잠식됩니다. 인간의 심리가 감당해야 할 슬픔이 자연의 미학에 의해 소멸되는 지점이며, 이는 시마무라의 허무주의가 완성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4. 결(結): 허무로의 침잠
사건이 종료된 후, 모든 감정은 다시 설국의 정적 속으로 잦아듭니다.
자연 묘사: 발밑을 울리는 은하수의 소리와 차가운 공기.
심리 묘사: 열정(고마코)과 환상(요코)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마무라는 결국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거대한 허무를 마주합니다.
갈등의 종결: 자연은 인간의 감정에 답하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의 심리적 갈등은 결국 거대한 자연의 풍경 속으로 흡수되며,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라는 시작만큼이나 고요한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습니다.
'독서의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독서후기 2026-36,37 조정래 장편소설 황금종이(1~2권) (9) | 2026.03.27 |
|---|---|
| 독서후기 (2026-34) 한이리 장편소설/게르니카의 황소 (18) | 2026.02.25 |
| 독서후기 (2026-33) 미우라 아야코 장편소설/ 사랑의 계단 김지숙 옮김, 문지사 (11) | 2026.02.24 |
| 독서후기 (2026-32) 진수미 시집/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문학동네 (18) | 2026.02.21 |
| 독서후기 (2026-31) 양귀자 장편소설 "모 순" (18) | 2026.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