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회색빛 사랑의 좌절
회색 도시의 희생양 인애는 60년대 급격한 근대화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던 젊은 세대의 초상입니다.
상실된 순수함은 그녀의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순수한 열정을 받아주지 못하는 냉혹한 사회 구조와 이기적인 인간관계에서 기인합니다.
녹지대는 인애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인간적 유대와 사랑이 없는 곳은 어디든 사막과 같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 세대가 변화하면서 가치관의 기준도 무너지기시작했다. 부모와 자식세대의 관습과 규율이 변화되면서 각자가 가지는 무게의 추도 달라지게 된 전환기였으리라 생각된다.
표현이 부족하여 안타까워하는 은자를 인애는 흥미 있는 눈으로 바라본다.
"옛날에는.. 가엾은 사람. 과연 나는 엄마를 경멸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을까? 요즘 나는 그 문제를 생각해 보거든. 참 허황하게 껍데기만 뒤집어쓰고 거리를 헤맨 것 같단 말이야. 사실 내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도 못하면서 남의 눈, 남의 마음에만 신경을 쓰고 열등감을 누르려고 일부러 거친 여자 흉내를 내고 말이야. 사실 내 자신을 위해 그랬던 것 같지 않어. 남을 위해서 남의 눈이 두려워서, 속으론 엄마에 대한 애정이 있으면서도 겉으론 엄마를 비판하고 어쩌고 한 내 자신이 실상은 더 크고 나
쁜 허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더란 말이야.."
창문이 바람에 덜덜 흔들린다.
알어."
인애는 손을 저으며 은자의 다음 말을 막는다.
'이젠 그런 말은 그만하자. 하늘도 저따위로 흐려서 빗방울이 떨어지겠는데 너 눈에 눈물방울이 떨어지면 곤란하니까.
🍎🍎 갖고 싶은 욕망마저 차단되고 억눌린 세대들.
그 세대의 틈바구니에서 한 줄기 빛이라고 쪼이고 싶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없을까.
"가진 것 없는 사람에겐 없어봐도 그게 그거 아니에요? 있어야만 잃어버리는 슬픔이라도 있겠죠."
"좋은 말이다. 허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갖고 싶은 욕망 때문에 괴로워들 하지."
인애는 싱긋이 웃는다. 주로 인애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한철의 얼굴
은적이나 담담하다. 처음 미도파 층계 위에서 그를 만났을 때도 은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매는 전과 같은 그런 갈등의 빛이 없었지만.
은자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안도의 감정과 자기로서는
예측할 수 없었던 서운한 느낌을 씹어본다. 한철이 아주 간단하게
자기에 대한 감정을 청산해 버렸다는 데 대한 안도감인 동시 서운함이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굵은 선이 광선을 따라 떠오른 듯한 한철의 옆모습을
숨어 본다. 귀공자처럼 귀엽고 세파에 시달리지 않는 박광수의 가는 선과는 딴판이다.
믿음직스럽고 불안이나 열등의식을 갖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넓은 가
습팍, 은자는 문득 외로워지는 자기를 아프게 느끼고 눈길을 돌린다.
🍎🍎 남과 녀, 사랑과 불륜, 바라이 몰고 오는 일탈,
숭고함과 퇴폐적인 것들의 판단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를 24시간 매달고 다닐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내 눈 앞에서만 나를 사랑 하시라.
인애는 끝없는 독백을 혼자 늘어놓으며 그래도 자기가 거처하고 있는 집을 항해 가고 있기는 하다.
나는 거지공주지만 그인 비단 속에 싸인 거지야.
왜 그렇게 사로잡히고 말았을까? 그 여자에게 무슨 마력이 있었을까? 그인 늘 무서워하는 것
같았어. 왜 무서워할까? 내가 바람이냐, 그 여자가 바람이냐?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부인을 무서워한다지? 그, 그럼 그 여자는 부인이야? 하여간
동서同捿하고 있어. 내가 바람이야? 아, 아니야 아니야!
인애는 고개를 쩔쩔 흔든다. 그의 뒤에는 여전히 한 여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코트를 입고 화장을 하고, 그리고 그일 만나는 거야. 그리고 안녕 코트는 벗어서 팔아 날리고, 그리고 섬으로 간다. 역시 할 수 없는 애라
생각하겠지, 큰어머니는. 나를 길러준 것은 사람이 아니올시다. 나를 길러준 것은 바람이올시다. 코 묻은 애들하고 니는 바닷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한다. 왜?
🍎🍎 나의 섬은 희망이었음 좋겠다. 어쩐지 옛사람의 암울한 귀양살이가 생각나는 건 무엇일까?
떡국도 없는 쓸쓸한 정월 초하루가 지나갔다. 떡국은 안 먹어도 분명히
나이는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아니, 먹어버렸다. 그리고 별로 변덕 없는
맑은 하늘의 여러 날들이 지나간 것 같았지만 실상은 정월 초삼일 날이었다. 초하룻날 말고 겨우겨우 이틀이 지나간 데 불과하건만, 두 달 아니 이년만큼이나 그날들이 길고 지겹게 느껴진 것은 무슨 탓이었을까.
은자는 출판사에 나갔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인애는 지난해 그믐께 받아온 일거리를 책상 위에 어수선하게 펴놓고
열심히 원고 정리를 하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든다.
어디서고 쿵쿵 파도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머리칼이 바닷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것 같은 착각에 진 것이다.
옛날에는 죄인들이 귀양 간 곳이라지만.. 지금도 오늘날에도 내가 섬으로 간다면, 아주 간다면 그런 기분일까? 욕망과 미래와 희망과 그리고 젊음을 다 버리고 가는 그런 기분이 될까?
🍎🍎 저 많은 군중속에도 속할 수 없는 인애는 철저한 이방인으로 남는 걸 택했다.
여전히 눈에 띄는 것은 많은 군중이다. 군중에 둘러싸인 계곡과도 같이 폭포는 도시 한복판을 어나가고 있다. 오가는 사람들, 양켠의 높은 빌딩.... 사람의 마음도 건물의 마음도 소음을 외면하고 또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봄의 발소리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다만 가난하고 초라한 그리고 비어버린 공간을 안고 있으며 또는 가고 있을 뿐이다.
좋 더 나아질 수는 없는가. 좀 더 영혼을 흔들어주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없는가. 도시는 괴물같이 커지기만 하고 사람의 무리는 보다 더 범람하여 홍수를 일으킬 지경인데. 구두점에는 오렌지 빛깔의 귀여운 세무 구두가 진열되어 있고 어느 누구보다 봄에 민감한 양장점의 주인
은 봄옷을 만들어 진열장에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건만 진정 봄은 어디메에 있는고. 소녀들의 얼굴은 어둡고, 대머리의 중년신사나 구두창이 밖으로만 닳은 청년들의 걸음걸이. 그리고 어울리지도 않게 호화롭기만 한 흰털외투 입은 숙녀들, 모두 모두가 생활하는 모습은 아니다. 다만 생존하고 있는 모습들이 아닌가.
🍎🍎 인애의 불꽃 같은 타오름은 은자에겐 가능하지 않다. 그녀는 순응한다. 세상의 모순을 겪었지만 모순마저도 거머쥐면서 가고자 한다.
은자는 말없이 그를 따라간다.
은자의 마음속에도 이제는 한철로부터 떠나서 방황하면 안 된다는. 그래서 다시 한 번 자기 마음을 확정해 두고 싶은 것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들어가버린 깊은 관계. 그것은 우연의 결과였다. 우연의 결과였다면 불안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의식적인 부딪침이 있음으로써 다짐해
둘 필요를 쌍방이 다같이 느끼며 사람들의 그림자가 뜸하고 네온사인도 옅어지고 만 밤거리를 그들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결어간다.
죽어버릴 만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생애를 같이할 것을 어찌 바라겠는가. 그런 요행을 바란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오만이다. 작은
것을 스스럽게 받아들이자. 그러면 인생은 내게 미소를 보내줄 것이다.
원하는 곳에 이룩된다 하지만 그 원함이 과욕일 때 그것은 전락의 결과가 올 것이다.
🍎🍎 인애는 자신이 희망을 잃을망정, 주위의 지인들까지 등달아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네들의 행복을 두손으로 기원한다.
사람이란 마지막의 희망마저 잃었을 때 맑게 체념하기란 어려운 일인가. 인애의 경우도, 소리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보지 않았을 경우 그는 그
자신의 강한 고집으로 마음의 기둥을 세워 올 수 있었을 것이지만, 자기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는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의욕에 충만해 있고 작은 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은 역시 괴롭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어떤 최악의 상태 속에서도 마지막의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끝없는 길처럼 김정현을 찾아 헤매었을 때도.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인애는 강하게 의식한다. 비 젓은 병아리 새끼 같은 자기를 의식한다.
'모두 다 행복하여라! 나에게 손해도 이익도 없는 바에야 행복한 편이 좋지 않으냐. 은자도 갈 곳으로 가고 안경잡이도 가고 숙배도 가게 될 것이고 큰어머니도 그러시겠지'
🍎🍎 사랑했단다. 그래서 죽음을 택한 바보같은 선택을...하지만 이해해야만 한다.
결혼식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숙배는 나직한 소리로 물었다.
"그럼 그 청년은 인애를 사랑하지 않았던가요?"
"사랑했지. 그러니까 죽은 거야."
"그럴수 있을까요?"
"수수께끼로 남겨두자. 인애는 숙배의 운명을 돕고 정현이는 내 운명을 도왔다고만 생각해. 더이상 깊이 파고 들어갈 필요는 없구. 언젠가 밤에
인애가나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편지를 보이면서 숙배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라고...... 이젠 그만이야. 끝장이 왔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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