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트릭 모디아노(2014 노벨문학상)
바스러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 모호함을 신비로운 언어로 탐색해 온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 1945년 불로뉴 비양 쿠르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첫 소설 에투알 광장.으로 로제 니미에 상과 페네옹 상을 받으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 후 외곽도로(1972)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슬픈 빌라"(1975)로 리브레리 상을 수상했으며, 최고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1978)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 도 잃어버린 거리(1985), "8월의 일요일들 (1986), "도라 브루더 (1997), 신원 미상 여자(1999), 한밤의 사고(2003), '가계도 (2005) 등의 작품이 있다. 2001년 작 작은 보석)은 전작인 신원 미상 여자.처럼 갓 사춘기를 벗어난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를 우연히 다시 만나 어두운 유년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테레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통하고 어두운 기조를 유지하지만, 극도로 절제된 감정과 세공된 문장으로 단순미가 돋보이는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다.
옮긴 이 정혜용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 3 대학 통번역 대학원(E.3.J.T)에 서 번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홉의 손, 은화 한 닢, 마르틴과 한나, "단추전쟁" "집 착"을 우리말로 옮겼다.
🌐🌐🌐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패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마치 산능선에 걸쳐진 안개처럼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작가도 독자도 결말이나 전개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읽어낸다.
💥💥테레즈의 현재에 과거를 입히다.
🙏🙏엄마의 상자
🐤사진 한 장
사진 한 장에 대한 기억이, 내가 간직하고 있는 엄마사진 한 장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진 속의 얼굴은 한밤중에 탐조등 불빛을 받아 환히 드러난 것처럼 조명을 받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 앞에서 늘 마음이 불편했다. 꿈속에서 매번 누군가 ㅡ경찰, 시체 안치소 직원 ㅡ가 신원을 확인해 달라며 내밀어 보이는 사진은 범인 수배용 사진이었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엄마는 모로코에서 죽었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살아 있을까? 그녀가 이름마저도 여러 개를 쓰고 있었듯이.
🐤엄마가 살던 집~쿠스투 가 11번지
처음엔 계단에서 야릇한 냄새가 났다. 계단에 깔아 놓은 붉은 융단에서 나는 냄새였다. 서서히 썩어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벌써 군데군데 나무 계단이 드러난 것이 보였다. 이 건물이 싸구려 호텔이던 시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계단을 오르내렸었다. 가파른 계단이 현관문을 넘어 서자마자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전에 호텔에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출생증명서에 그 주소가 나와 있었다. 세 들 방 한 칸을 찾기 위해 광고들을 훑어보다가, '1인용 아파트 임대' 란에서 이 주소와 맞닥뜨리고는 깜짝 놀랐다.
🦜🦜 엄마의 흔적이다. 코스투 가 11번지는 엄마가 거주하던 호텔의 주소이다. 이제는 바래진 건물이지만 테레즈는 거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사를 한다.
🙏🙏엄마의 흔적
🦜노란 외투를 걸친 여인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작은 보석'이라고 부르지 않게 된 지 열 두 해 가량 흘렀을 때. 나는 퇴근 인파로 붐비는 샤틀레 지하철역 있었다 ~~ 노란 외투를 걸친 한 여인이 보였다. 외투 색깔이 내 주의를 끌었다. 내게는 자동보도에 올라서 있는 그 여인의 뒷모습만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샤토 드 뱅센 방향이라고 써여져 있는 통로로 접어들었다. 이제 우리는 자동 개폐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계단에 몰려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여자가 내 옆에 서 있어서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 얼굴이 엄마와 너무 닮아서 그녀가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이면 엄마였을까? 엄마는 이 세상사람이 아닌데, 왜 엄마라고 생각이 들까?
🦜이제 우리는 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좌석에 마주 앉아 있었다. 전화번호부에서 당신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어요. 심지어 당신의 본명과 이름이 같은 네댓 명에게 전화를 걸어보기도 했지요. 하지만 모두 당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언젠가 모 로코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이 정말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요.
🦜🦜 엄마라고 외치라고 속에서는 아우성이다. 엄마일 거야. 아니 엄마가 아닐지도 몰라.
🦜그녀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머리는 약간 수그린 채였고, 두 눈은 냉혹한 동시에 우수에 젖어 있었으며, 팔짱을 낀 채 팔꿈치로 테이블을 누르고 있었다. 초상 화에서 본 것과 똑같은 자세였다. 어떻게 됐을까, 그 그림은? 어린 시절 내내 그 그림은 나를 따라다녔다. 포송브론 라 포레에 있는 집 침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었다. 사람들은 내게 "네 엄마 초상화란다"라고 말했다.
🙏🙏초상화가 정확할까, 사진이 정확할까? 아니면 나의 감정이 정확할까? 눈을 감는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문제는 그 여자가 내게 이백프랑을 빚졌다는 거예요 나는 끈 달린 작은 천 주머니에 돈을 넣어 늘 허리에 묶고다녔 주머니 안을 뒤져 보았다. 백 프랑짜리 지폐와 오십 프랑짜리 지폐 그리고 동전 몇 개가 남아 있었다 나머지는 나중에 들를 때 주겠다고 말하면서 관리인 여자에게 지폐 두 장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녀는 실내복 한쪽 호주머니에 재빨리 돈을 집어넣었다. 불신하던 그녀의 태도가 갑자기 녹아내렸다. 나는 불사조'관해 무엇이든 물을 수 있을 터였다.
🙏🙏세 들어 사는 엄마에 대해 뭔가를 알고 싶어 관리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빚만 대납을 한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창문을 마주 보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물병은 바닥에 초콜릿은 침대 위에 놓았다. 나는 약사 가준 약병들 중 하나를 열고, 손바닥에 내용물 일부를 쏟았다. 작고 흰 알약들. 나는 알약들은 입에 털어 넣고는 병째 물을 마시며 넘겼다 그리고 초콜릿 조각을 깨물었다. 그렇게 여러 번 되풀이했다. 초콜릿을 먹으면 알약들은 더 잘 내려갔다.
🙏🙏 정신적 혼란과 나약함이 나를 나락으로 가게 한다. 푹 자고 싶다. 깨어나지 않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은 아마 그 약사였을 것이다. 우리는 저녁 여섯 시에 만나 바르 쉬르 오브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수족관 안에서 무언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는데 물고기들인 듯싶었다. 물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나는 오래전에 빙하 속에 갇혔었고. 이제 그 빙하가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그날부터 내게도 삶이 시작된다는 신호가 그러고도 오랫동안 귓가에 쟁쟁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새 걸음으로 어딘가 걸어보자.
🙏🙏약사의 모피 외투
그녀는 계산대 뒤 납은 가죽 안락의자가 놓여 있는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의자에 앉았고, 그녀는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손이 얼음장 같군요 어디가 안 좋죠?'
오래전부터 나는 그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모든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설명하자면 너무 복잡해요' 왜요? 복잡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눈물을 쏟았다. 개가 죽은 후로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것도 벌써 열두 해 전의 일이었다.
🙏🙏엄마의 흔적을 찾아갔다가 관리원에게 엄마의 빌린 돈을 갚고 오면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과거에 대한 그림자가 망막에 터진 실핏줄처럼 어른거리는 시간이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우리는 내가 조금 전 건네었던 교차로에 도착했고, 이제는 리옹 역과 시계가 바라다보이는 작은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너무 친절하시다고, 그리고 괜히 저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시 는 건 아닌가라고요.
그녀는 나를 항해 얼굴을 돌렸다. 모피 외투의 깃이 뺨을 스쳤다. "무슨 그런 말을. 아가씨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다니, 그렇지 않아요"
🙏🙏 머리 떠나보내고 싶은 엄마의 흔적을 사뿐히 흘러버리는 약사의 손길. 그 손길을 놓치고 싶지 않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워요? 그녀는 내 곁에.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톨라 순구로프가 그린 엄마의 눈빛과는 정 반대로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면 여기 있을게요' 그녀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나른한 듯 신발을 벗었다. 마치 매일 저녁 이 시각 이 방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녀는 외투를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침대 가에 앉은 채 그대로 꼼짝 않고 있었다.
🙏🙏 엄마였으면 했다. 잠시 동안 엄마였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바드 마에브
내 가인생에서 추구하는 것은. 나는 있는 대로 기운을 짜냈다. 정말이지 뭔가 대답해야만 했다. 그처럼 스무 개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무 대답도 못 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지 '내가 찾는 건.. 인간적인 접촉이에요 그가 내 답변에 실망한 것 같진 않았다. 다시 나를 감싸며, 내 시 선을 떨구게 하는 그의 얇은 색 두 눈.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잘 생긴 두 손. 나는 그 길고 섬세한 손가락들이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시선과 손에 너무 민감했다.
🙏🙏인간으로 접촉은 무엇일까? 감정이 따스하게 가슴을 적시는 것. 그윽한 눈길을 보내는 것. 아니야 언어로 한정할 수 있는 게아니야.
한 번 고정점을 찾게 되면, 그땐 모든 게 더 좋아지겠죠?"
나는 그가 내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음을 느꼈다. "사 람들은 나를 '작은 보석이라고 불렀어요"라고 나를 다시 소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에게 처음부터 모두 설명하리라. 하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만
말했다. 내 이름은 테레즈예요 지난밤, 가로수 길을 걸으며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었다. "이름은 없어요. 그냥 바드마에브라고 부르세요. 아니면 모로라고 하든지요. 그게 더 편하다면 말입니다."
그는 지하철역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나는 그곳이 포르트도 트레앙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열여섯 살까지 파리에 올 때마다 이곳에 내리지 않았던가. 당시 내가 포송브론 라 포레에서 타고 온 장거리 버스는 라 로통드 카페 앞에서 멈추었섰다 그는 계속 초원지역의 페르시아어에 대해 말했다. 그 언어는 핀란드어와 비슷해요. 듣기에도 좋죠. 그 언어를 듣고 있으면. 풀 사이를 어루만지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떨어지는 물소리가 되살아 난답니다.
🙏🙏언젠가 가보고 싶다. 과거. 또는 현재가 제대로 고정된 시기에.
🌐🌐🌐 어릴 적 기억 회로, 사진 한 장으로 엄마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딸의 애타는 마음. 마지막 남은 기억에서 엄마는 보내주어야 하겠다. 나의 미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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