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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절 순례/경남의 사찰

대웅전을 찾아-관룡사 대웅전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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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은 인구 5만여 명의 소도시인데 문화재는 보기 드물게 많다. 마치 화려한 신라불교를 엿보는 것 같다.
술정리 동탑(국보), 서탑(보물), 척경비, 석빙고, 고분, 관룡사와 크고 작은 사찰들의 석탑과 불상, 제법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보물
창녕 관룡사 대웅전 (昌寧 觀龍寺 大雄殿)
Daeungjeon Hall of Gwallyongsa Temple, Changnyeong
대웅전(보물)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건물 안쪽 천장은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가운데 부분을 한층 높게 한 점이 특이하다. 대웅전(보물 212호)은 원래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특이하게 이 관룡사 대웅전엔 비로자나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1965년 8월 보수공사 때, 천장 부근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 건물은 조선 태종 1년(1401)에 짓고,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 9년(1617)에 고쳐 세워, 이듬해에 완성했음을 알 수 있다

● 팔작기와지붕이 활짝 가슴을 열고 날아갈 듯하다.

경상남도 창녕군 관룡사의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은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불상이다. 본존불의 대좌 밑쪽에 묵서를 통해 숭정(崇禎) 2년, 1629년(인조 7) 기사(己巳) 10월에 불상조성을 시작해서 그다음 해(1630년) 5월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각에는 현진(玄眞),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등 8인이 참석하였는데 그중의 대표 격인 현진(玄眞)은 17세기 초에 경남 함양 상명대보살상, 전라남도 구례 천은사의 목조보살상, 충청남도 보은 법주사 소조아미타여래삼불상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이 상은 비교적 현진의 말년에 제작한 상이다.

대웅전 내 관음보살 벽화

보물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 (昌寧 觀龍寺 大雄殿 觀音菩薩 壁畵)
‘창녕 관룡사 대웅전 관음보살 벽화(昌寧觀龍寺大雄殿觀音菩薩壁畵)’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서 설법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선재동재(善財童子)가 방문하여 법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벽면 전체에 관음보살을 채워 크게 부각해 그렸다.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보채(補彩)가 이루어졌지만 좌우로 넓게 퍼진 보관과 영락장식, 옅은 수묵으로 그린 기암괴석과 대나무 표현,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의 모습, 유희좌(遊戱座)로 단정하게 앉은 보살의 자세 등에서 조선후기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보물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
Stone Seated Buddha at Yongseondae Cliff of Gwallyongsa Temple, Changnyeong

●관룡사 근처의 용선대에 있는 석불좌상으로 산 꼭대기 높은 바위 위에 모셔졌으며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단아한 인상이며 미소를 띤 표정에서는 자비로운 불심(佛心)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몸에 밀착되었으며, 옷주름은 규칙적인 평행선으로 처리되어 도식적인 모습이다. 전반적으로 신체의 양감이 줄어들고 약간 위축된 모습이지만 안정감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무릎에 놓인 손은 두툼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되었으며, 앉은 자세에서는 다소 둔중함이 느껴진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반구형(半球形)의 상대석은 연꽃을 새겼고, 8각 중대석은 각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두었으며, 하대석은 4각의 받침 위에 겹으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양감이 줄어든 신체 표현, 도식적인 옷주름선, 8각 연꽃무늬 대좌의 형식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용선대에는 이곳 지역민들이 토함산 석굴암 부처님에 비견될 만큼 신령스럽게 받드는 돌부처님이 산 아래 올망졸망한 사바세계를 바라보면 좌정해 있다. 화왕산의 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내려오다가 불쑥 솟은 곳에 자리한 널찍한 바위 위, 그곳에 높은 대좌를 놓고 불상을 앉힌 것이다. 불상의 양식은 석굴암 본존에 못 미칠지 모르지만 현재 여러 보호장치에 의해 그 시선이 가려진 석굴암 본존을 생각해 본다면,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자비로운 미소로 중생을 맞이하는 용선대 불상의 안복(眼福)은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누군가 용선대는 그 모양이 마치 큰 바다를 가르는 배의 모습과 같다고 하며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한 바 있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또는 중생을 고통이 없는 극락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 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이 곧 반야용선이요, 용선대가 바로 이 반야용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용선대 부처님은 반야용선의 선장으로서 이곳 하늘과 땅의 무수한 존재들을 싣고 항해의 키질을 하면서 반야용선의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 피안(彼岸)으로 가는 뱃길의 원(願) 자리에는 오늘도 기도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관룡사를 찾는 마음은 이 용선대에 이르러 한숨을 돌리며 가다듬어 세우는 원(願)으로 매듭짓게 된다.

이미지, 글 일부 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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