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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중현의 고향, 신두고라국

by 돛을 달고 간 배 202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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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현(衆賢)의 고향, 신두고라국

탁사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서 신두고라국新頭故羅國이르렀다. 옷 입는 복장과 풍습, 절기, 추위와 더위의 기후 등은 북천축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좀다르다. 이 나라에는 낙타가 대단히 많다. 사람들은 우유와 수락을 먹는다. 왕과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하니 절도 많고 스님들도 많다.
[순정리론( 順正理論]을 지은 중현(衆賢,상가바드라Sanghabhadra) 논사(論師)가 이 나라 사람이다.
이 나라에는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지금은 대식(大寔아랍)이 침략해 나라의 대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이 나라로부터 오천축국에 이르기 까지 사람들이 대체로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천축의 다섯 나라[오천축국]
를 두루 다니면서 술 취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설령 마셨다 하더라도 몸이 흐트러지지 않고 기운이 차려져 있을 뿐, 노래하고 춤을 추고 놀면서 술잔치를 벌이는 것은 보지 못했다.
북천축국에 다마삼마나(多摩三磨娜) 타마사바나Tamasavana)라는 절이 하나 있다. 부처님께서 살아계실 때 이곳에 오셔서 설법을 하시고 사람과 하늘의 신을 널리 계도 하셨던 절이다. 절의 동쪽 골짜기에 있는 샘물 가에 탑이 하나 있는데,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이이 탑 속에 있다고 한다. 이곳에 300여 명의 스님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 절에는 대벽지불(大僻支佛)의 이빨과
뼈 사리 등도 있다. 또한 7~8개의 절이 더 있다. 절마다 사람이 500~600명씩 있으며 불법을 잘 지키고 산다. 왕과 백성들은 삼보를 특별히 공경하고 믿는다.
산중에는 절이 또 하나 있는데, 이름은 나게라타나에 (那揭羅馱나가라다나 Nagaradhana)라고 한다. 여기에 중국인 스님 한 분이 살다가 이 절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한다.
이 절에 사는 덕 높은 스님 한 분이 말하기를 입적한 중국 스님은 중천축에서 왔으며, 삼장(三藏)의 성교(聖敎)에 밝은 분이었는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파 사운(四韻)의 오언 율시(五言律詩)를 적어 그의 저승길을 슬퍼하였다.

고향의 등불은 주인을 잃고
故里燈無主
타향의 보배나무도 꺾여버렸으니
他方寶樹摧
신령스런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神靈去何處
옥 같던 용모는 이미 재가 되었으니
玉貌已成灰
생각하니 가엾고 애절하구나.
憶想哀情切
그대 소원 못 이룬 것 슬퍼하노니
悲君願不隨
누가 고향 가는 길 알고 있으랴
孰知鄕國路
흰 구름만 덧없이 돌아가누나
空見白雲歸

원문(혜초)

해설 (지안,譯)
혜초의 고단한 여행은 계속되어 신두고라국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신두고라국이 어디인지 학자들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혜초의 기록 내용으로 보아 사막지대이고 탁사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갔다고 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현재의 라지푸타나(Rajpuana)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대당서역기]에 나오는 구절라국(瞿折羅國)이 신두고라국이다.
중현(衆賢) 논사 (論師)의 범어 이름은 상가바드라(Saghabhadra)이다.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라고 음사하기도 하고 의역하여 중현(衆賢)이라 불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순정리론(順正理論)은 설일체유 부(說一切有部)의 비바사론을 깊이 연구한 뒤에 지은 것으로 세친(世親)이 지은 [아비달마구사론(아비달마구사론) 반박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이름을 구사박
론이라고 하였다. 세친의 [구사론](아비달마구사론의 약칭)을 반박한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구사박론'을 쓰기 위해
서 중현은 세친의 '구사론'을 12년 동안 연구하였다고 한다.
중현은 책가국으로 가서 세친과 논쟁을 벌이려고 했지만 세친이 그를 만나주지 않아 무산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중현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임종을 앞두고 세친에게
서신을 보내 사죄를 청하며 아울러 자신의 유작 [구사박론]을 보존하여 줄 것을 세친에게 부탁하였다. 세친이 그의 청을 받아들여 구사박론을 보관하면서 책의 이름을 순정리론으로 바꾸었다. 세친이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왜곡하고 경량부의 교의를 도입했다고 하여 중현은 설일체유부의 정통교의를 내세
우기 위하여 세친을 비판했던 것이다.
세친(바수반투Vasubandhu)은 북인도 건타라국 부루사부라(지금의 페사와르 Peshawar) 출신으로 4~5세기경에 활동한 학승이었다. 소승의 한 부파였던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유부의 교의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대비바사론을 지어서 강의했다. 그 외에도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처음에는 소승의 교
의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대승을 비방하다가 나중에 형인 무착(無着,아상가 Asanga)의 권유에 따라 대승으로 전항했다. 그리고 나
서 십지경론 등 대승의 논서를 저술하고, 무착이 지은 섭대승론을 해석한 섭대승론석을 짓는 등 많은 대승의논서를 저술하였다. 세친은 소승의 논서 500부를 짓고 또 대승
의 논서도 500부를 지어서 천부논사 (千部論師)라고 불렸다.형 무착과 세친 그리고 동생 사자각(師子覺)의 삼형제가 모두 불교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혜초는 중현을 신두고라국 사람이라고 했는데 실제 중현은 가섭미라국(카슈미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대식(아랍)의 침공은 711년 무하마드 이븐 까심의 원정군이 신드 지방을 침공한 이후의 거듭된 내침을 말한다. 혜초가 인도를 순방하던 724년에서 727년 사이에도 이슬람의 침공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도 헤초의 순례가 얼마나 힘든 고행 길이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다나삼마나절은 대당서역기 의 답말소벌나
절로 추정되는 곳인데, 부처님께서 다녀가셨던 절이라고 했으므로 대단히 유명한 절이라고 볼 수 있다.
나게라타나사는 현장의 '대당서역기 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다만이 지역 일대에 50여 개의 가람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죽은 중국 스님의 소식을 듣고 지은 시가쓸쓸하고 무상한 감회가 서려 있다. 부처님의 법을 구하기 위해 이국에 와서 활동하다 죽은 것을 고향의 등불이 주인을
잃고 타향의 보배나무가 꺾였다고 애도하고 있다. 혜초 자신도 이국에 와서 고단한 순례를 하는 중이었으니 중국 스님의 입적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로 무관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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