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현사는 650년(진덕여왕 4)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처음 세운 사찰로, 후에 낭원대사(朗圓大師)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지장선원(地藏禪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현재의 건물은 조선 후기에 세운 것으로 3단의 장대석(네모지고 긴 석재로 기단에 가로로 길게 놓은 돌) 기단을 설치하고 막돌 덤벙 초석을 기둥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정교하게 그레질 한 후, 둥근 기둥을 세웠다.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다포 양식이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경내에는 낭원대사의 사리탑인 낭원대사오진탑(보물)과 낭원대사오진탑비(보물)가 있어 이 사찰의 역사적 가치를 말해 주고 있다.
강릉 보현사 대웅보전은 보현사의 주불전으로 1831년 중건된 건물이라는 것이 해체수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이후 적어도 2번의 수리가 더 있었다는 것이 기록과 건물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확인되었지만 그럼에도 중건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는 건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삼존불은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협시보살인 관음보살, 대세지보살로 이루어진 아미타 삼존불좌상으로 현재 보현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연화좌대 위에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오른손은 무릎위에 살짝 걸친 아미타 수인의 변형 수인을 짓고 있으며, 왼손은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다. 불두는 육계가 불분명한 형태로 나발이 작고 촘촘하며, 정상계주와 중앙계주가 뚜렷한 편으로 17세기 불상형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얼굴은 갸름한 방형이며, 불신의 상체는 위아래가 거의 비슷한 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좌우 협시불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연화대좌 위에 왼 무릎위로 오른발을 올린 결가부좌 형태이다. 얼굴은 아미타불과 같은 방형의 얼굴이며, 직사각형의 상체, 삼각형의 다리, 오른손을 오른 다리에 살짝 걸치고 왼손을 왼 무릎위에서 엄지와 구부린 4손가락의 중지와 맞댄 수인 등 동일한 형태이며, 보관과 2중 착의법만 차이가 있다.
아미타불의 복장공에서 「康熙三十年辛未五月二十四日佛像願文…」의 조성기가 확인되어 이 불상이 1691년에 제작되었으며, 불상을 옮겼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다른 장소에서 불상이 조성되어 보현사로 이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보살좌상은 보현사내 별도 공간에 보존되어 있는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 불상으로 전체적으로 개금이 두꺼워 상호를 제외한 조각의 섬세함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머리에는 높은 보계에 장식이 있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머리에서 내려온 보발은 귀를 가로질러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형식의 두터운 가사를 입고 있으며, 물결 같은 옷주름과 양 어깨위에 도드라진 장식,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특징적이다. 수인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왼쪽 다리위에 올려두고 있다. 바닥에는 복장을 매납했던 복장공이 있으나, 복장유물은 남아있지 않다. 조선후기 불상의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강원도 내에 소조로 만들어진 조선후기 불상이 많지 않아 희소성이 크다.
보현사에 남아 있는 낭원대사(834∼930)의 탑비로, 대사의 출생에서부터 경애왕이 대사의 덕을 기려 국사로 예우한 사실 및 입적하기까지의 그의 행적이 실려 있다. 대사가 96세로 입적하자 왕은 ‘낭원’이라는 시호와 '오진’이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갖춘 거북받침돌은 등에 6각의 벌집 모양이 채워져 있고, 중앙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한 높은 비좌(碑座:비를 꽂아두는 부분)가 마련되어 있다.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새기고 그 위로 여의주를 다투는 두 마리의 용을 힘차게 조각해 놓았다. 꼭대기에는 석탑에서처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1단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을 갖추고, 화염에 싸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고 있어 특이한 모습이다.
대사가 입적한 지 10년 뒤인 고려 태조 23년(940)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최언위가 짓고, 서예가인 구족달(仇足達)이 글씨를 썼다.